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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나라를 세우면 먼저 땅의 신(사신·社神)과 곡식의 신(직신·稷神)에게 나라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이를 사직제라고 한다. 사직제는 삼국시대부터 행해졌다고 한다. 중국 역사서 ‘후한서’에는 “고구려는 10월에 제천의식을 지내는데, 밤에 남녀가 모여 노래하고 귀신과 영성(靈星·농사를 주관하는 별), 사직에 제사를 드린다. 이를 동맹(東盟)이라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자연에 감사하는 고대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조선 태조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뒤 가장 먼저 세운 것이 사직단이다. ‘태조실록’에는 “임금이 직접 도평의사사와 서운관의 관원과 서리들을 거느리고 종묘와 사직의 터를 살펴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궁궐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가 있고 오른쪽에 사직이 있다”는 유교 경전 ‘주례’의 원리에 따라 궁궐 자리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단을 세웠다. 그후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을 차례로 지어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나라를 보살피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사당인 종묘와 더불어 나라의 근본이었다. 종묘가 왕조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반면에 사직단은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기를 기원하던 곳이다. 조선 중기 문신 허목은 행도호부사 시절 사직단을 보수한 뒤 쓴 글에서 “이기(二氣·음양)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능력은 쉼 없이 운행하여 만물을 생육하는 것이니, 그 덕이 매우 성대하다”고 했다. 사직은 중화주의적 사대론에 맞서 우리 민족의 고유성을 지키려는 자주적 태도의 상징이기도 했다.

어제 사직단에서 사직대제가 열렸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11호인 사직대제는 종묘제례와 함께 가장 중요한 국가의례였다. 나라를 빼앗기기 직전인 1908년 일제 강압으로 폐지됐다가 1988년 원형대로 복원해 해마다 지내고 있다. 조상들이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빌던 뜻을 되새기게 된다.

맹자가 말했다. “백성이 귀하고 사직이 그다음이며 임금은 가벼운 것이다.” 이런 말이 이어진다. “제후가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바꿔 세운다. 희생으로 바칠 동물은 살쪘고 제기에 담을 곡식도 깨끗해 때에 맞춰 제사를 지내는데도 가뭄이나 홍수가 난다면 사직을 바꾼다.”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가 명심해야 할 경구다. 나라는 백성이 마음 놓고 살아가는 터전이고, 정치는 그런 터전을 만드는 것임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박완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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