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앞에 배치한 ‘한 박자 쉬고’는 기묘한 악의 현신이다. 중고등학교 때 줄곧 정균수의 노예로 살아온 ‘나’ 양재준은 세상에 나와 우연히 다시 그놈을 만난다. 그놈은 너무 반가워하면서 옛날 회포를 풀려 한다. 그 자식은 심지어 교회에 다니면서 하늘나라 백그라운드까지 지녔다. 어정쩡하게 물리치지 못하는데, 그 녀석은 아내와 자식들까지 불러 고깃집으로 가잔다.
이 녀석, 세월이 흘러 우연히 만났어도 정균수에게 정면으로 대응하지 못한다. 정균수는 어쭙잖게 무용과까지 들어가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 이쁜 자식들을 낳아 그 앞에 오게 한다. 하느님을 믿는 아름다운 가정의 정균수. 살기어린 눈초리는 여전한데 그는 헤어지면서 “내일 교회 같이 가자, 전화하마”고 속삭인다.
백가흠은 이어지는 단편 ‘더 송 The Song’에서는 이른바 ‘운동’을 한다면서도 최소한의 책임은 방기하는 ‘미현’이라는 인물에 대해 성토한다. 바빠서 미치겠다는 그네는 개새끼는 끔찍이 여기면서 자취방의 나와 그녀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다. 억울해서 그 개새끼 버렸다가 죄책감에 내내 시달렸는데, 알고 보니 미현은 일찌감치 죽어버렸다. 표제작 ‘사십사’에는 쓸쓸하고 억울하게 나이 들어가는 여성과 그네 또한 담담하게 활용한 정부와의 연애가 창백하게 흐른다. 자책과 가책과 비루와 남루의 극점을 불편하게 끝까지 시추하는 백가흠 스타일이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과 자신에게 이렇게 문학을 당부했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결코 문학은 끝나지 않고 결과도 없는, 과정만 있는 길이니 그냥 걸어라. 조급해하지도 말고 실망도 하지 마라. 그러니 지치지 마라.”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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