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설왕설래] 64년 만의 영면

관련이슈 설왕설래

입력 : 2015-07-06 20:34:20 수정 : 2015-07-06 20:34:20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딸은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투사가 되었다. 난생 처음 1인 시위까지 벌였다. 조국에 헌신한 아버지에게 합당한 예우를 해달라는 호소였다. 엊그제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국군포로 손동식 이등중사와 딸 손명화씨의 이야기다.

6·25전쟁 이듬해에 포로로 붙잡힌 손 중사는 북한에서 모진 고초를 겪다 1984년 숨을 거뒀다. 그의 유해는 62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명화씨를 비롯한 세 딸이 탈북한 뒤 천신만고 끝에 유해 송환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진짜 고초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국방부는 DNA 감식으로 ‘국군포로 손동식’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서도 포로에 걸맞은 보상과 명예회복을 거부했다. “살아서 돌아온 포로는 가능하지만 죽어서 돌아온 포로한테는 규정이 없다”는 앵무새 답변만 늘어놓았다. 딸은 참다못해 아버지의 유골 상자를 메고 거리로 나섰다. 청와대와 국방부 청사 앞에서 눈비를 맞으며 8개월간 시위를 벌였다. 아버지의 유해는 2년 동안 집 베란다에 보관됐다고 한다.

딸 명화씨는 “국군 포로와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들의 명예회복은 이제 시작이다. 8만명에 이르는 국군 포로 중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유해는 겨우 여섯 분이다. 확률로 따지자면 1만분의 1도 넘는다. 대한민국에 목숨을 바친 수많은 분들이 그런 기적을 기다리고 있다.

세계 최강 미국은 군인들의 희생을 명예롭게 기린다. 북한 장진호에서 중공군에 포위당한 미 해병은 생사를 넘나드는 눈보라 속에서도 동료들을 땅속에 묻고 좌표를 꼼꼼히 기록했다. 반드시 돌아와 그 죽음을 기억하겠다는 국가적 다짐이었다. 그 약속은 이뤄졌다. 4년 전 6·25 전사자 한 명의 안장식이 열리자, 병사의 고향인 웨스트버지니아주는 주 전역에 조기를 내걸었다. 초강대국 미국의 저력이 배어나는 생생한 예화다.

64년 만에 안식한 손 중사의 조국은 하나였다. 그는 딸들에게 “죽으면 고국 땅에 묻어 달라”는 말을 남겼다. 딸들은 그 유언을 지키느라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날 영결식장의 태극기 아래엔 “국가를 위한 희생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글씨가 빛나고 있었다. 태극기는 그 뜻을 알고 있을까?

배연국 논설위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