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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 신시·고조선 적통 이은 ‘400년 북부여’ 역사도 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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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6-14 21:49:25 수정 : 2015-06-14 21:4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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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바꿔야 할 한국사] 〈13〉 고조선과 북부여·부여 역사 부정하는 한국사
필자는 지난 호 (세계일보 6월8일자 26면 참조)에서 우리 역사의 출발이 신시로부터 시작되어 단군왕검이 건국한 고조선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현 교과서에도 서기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고 말하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을 소개하는 것 외의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믿기 어렵다는 말이다.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는 이 고조선의 역사를 찾는 것이 매우 긴요하다.


◆고조선은 8000리 땅을 100명 이상의 ‘단군’이 1908년간 다스린 나라


고조선의 영토 크기와 위치를 알 수 있는 기록이 ‘관자’에 있다. 관자는 제나라 환공(서기전 685∼643년)과 관중(서기전 ?∼645)의 대화록이므로 서기전 645년 이전의 기록이다. 그 관자에 ‘팔천리지발조선(八千里之發朝鮮)’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동안 이 기록을 ‘발조선이 제나라에서 8000리 떨어진 나라’라고 해석해왔으나 사실은 ‘발조선은 8000리 영토를 가진 나라’라는 말이다.

이 관자와 ‘산해경’, ‘여씨춘추’, ‘사기’ 등에 수록된 조선 위치 관련 기록을 종합적으로 연구·분석한 결과 고조선 영역은 서쪽으로 영정하(베이징·톈진의 서부)에 이르고, 발해의 북쪽에 있던 8000리 대제국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나카 미치요와 이마니시 류는 ‘단군’은 평양지역의 박수무당, ‘왕검’은 ‘선인’으로서의 호칭이라고 하였다. 이 주장을 이은 최남선은 ‘단군은 무당의 일명인 당굴, 왕검은 대인·신성인의 뜻’을 가진 단어라고 하였고, 이병도는 ‘제정일치 시대에는 단군뿐이요, 제정이 분리된 후로는 제사단체의 장은 단군, 정치단체의 장은 왕검’이라고 하였다. 

단군은 지배자의 칭호로, 수많은 단군들이 나와 1908년간 고대의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지배했다.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로서 민족 통합의 중요한 상징으로 여겨져 지금도 경배의 대상이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런 주장에 따라 현 교과서에서는 단군왕검을 제사장을 의미하는 ‘단군’과 정치적 지배자를 의미하는 ‘왕검’이 합쳐진 제정일치 시대의 직책명칭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단군왕검’은 중국의 성명과 칭호의 표기 방법에 따라서 칭호가 앞에 오고, 이름이 뒤에 오도록 표기한 것이다. 따라서 단군(壇君)의 ‘단(壇)’자는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는 제천단을 의미하고, ‘군(君)’자는 ‘임금’을 의미하는 칭호였으며, 왕검은 1세 단군의 이름으로 봐야 한다.

‘나이가 1908세였다(壽一千九百八歲)’는 기록은 단군 홀로 1908년을 살았다는 신화가 아니다. 신라·고려·근세조선 119명 임금의 평균 재위 기간이 16.7년이었음을 고려하면 고조선 1908년 동안 1세 단군 왕검, 2세 단군 ○○, 3세 단군 ○○에 이어 114세 단군 ○○까지의 단군이 나라를 다스렸다는 의미이다.

그 흔적이 4000년 전 이전에 시작된 하가점하층문화와 하가점상층문화이고, 이보다 앞선 환웅천왕의 신시문화는 6725년 전 이전에 시작된 홍산문화이다. 이렇게 되면 요하문명이 우리 조상들의 유적임이 명확해진다.

◆환인이란 말을 빌미로 삼국유사 기록 부정


나카 미치요와 이마니시 류 등의 일본 식민사학자들은 ‘삼국유사’ 고조선 편에 ‘환인(桓因)’이라는 불교용어가 등장하는 것을 이유로 이 기록이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 온 이후에 날조한 신화라고 하였다. 환인(桓因)이 ‘석가제파인타라’ 혹은 ‘석제환인인타라’라고도 불리는 불교의 천신을 간략하게 줄인 칭호이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하늘님금’을 하느님이라며 받들어왔고, 한자로는 ‘천제’, ‘상제’, ‘황천’, ‘천(天)’ 등으로 기록하였으며, 불교 도입 후에는 불교의 ‘천신’인 ‘환인’으로 표기를 한 것뿐이다.

근세조선 말기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인 로스, 게일, 기포드, 헐버트, 성서변역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지낸 언더우드 등은 각기 한국의 역사문화에 대한 내용을 책으로 남겼는데, 그 책에서 “한국인들이 수천 년 전부터 하느님, 하나님을 부처님보다 높은 최고의 신,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관리하며 상과 벌을 주관하는 신으로 믿고 있으니 ‘성서’ 번역에 있어 여호와를 하느님(하나님)으로 번역하자”고 주장하여, 그렇게 되었다. 따라서 환인이라는 말을 빌미로 ‘삼국유사’의 고기와 ‘제왕운기’의 본기를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 조작된 신화라고는 할 수 없게 된다. 

약 4000년 전 고조선인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꺽창 유물.
◆해모수의 북부여와 동명제의 부여 400년 역사가 사라졌다


삼국유사에 고조선이 서기전 2333년에 건국되어 1908년 만에 망했다 했으니 고조선이 멸망한 해는 서기전 425년이다. 이어서 서기전 419년에 북부여가 건국되었고, 서기전 100년 전후에 동명제가 해부루왕의 북부여를 빼앗아 부흥시켰다.

이런 긴 역사적 흥망 과정을 시라토리 구라키치와 이마니시 류는 “단군과 하백의 딸 사이에서 부루가 태어났고, 해모수와 하백의 딸이 주몽을 낳았으며, 부루는 해모수의 아들이라 하여 단군이 곧 해모수이고, 주몽과 부루는 형제”라는 식으로 모두 서기전 59년에 태어나는 주몽과 거의 동시대 인물들로 왜곡하였다.

이렇게 되면 단군의 고조선, 해모수의 북부여, 동명제의 북부여(부여) 등 400여년의 역사가 없어진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를 근거로 신시, 고조선, 해모수의 북부여, 동명제의 북부여, 해부루왕의 동부여 등의 역사 교육이 금지되었다.

그러한 가르침을 받은 이병도는 ‘부여고’에서 북부여는 언급조차 하지 않고, 하느님(천제)의 아들이라며 부여를 부흥시킨 동명제의 탄생, 성장, 탈출, 부여로 와서 왕이 되는 등에 대한 ‘논형’, ‘후한서’, ‘위략’ 등의 중국 기록이 고구려 건국시조(주몽)의 전설을 잘못 전한 것이고, 동명제 즉, 동명은 주몽으로 고구려의 시조라고 왜곡하였다. 이 논리는 현재의 교과서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역사교과서에서 ‘부여는 1세기에 이미 왕을 칭하고’라고 하여 전국시대부터 서기 1세기 이전까지 수백 년의 북부여·부여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준왕의 조선, 위만조선의 영토 위치와 정체

고대 한국의 맹주였던 고조선이 사라지자, 요동국과 더불어 가장 서쪽에 있던 고죽국이 국호를 ‘조선’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수서’ 배구전에 “고구려 땅은 본래 고죽국이다. 주나라 무왕 때에, 이 고죽국 땅에 기자를 봉하였고 한나라 때에는 이 땅을 나누어서 삼군(낙랑·현도·대방군)을 두었고”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기자와 무왕은 서기전 12세기 사람이고, 고죽국은 서기전 18세기부터 서기전 7세기까지도 존재하던 나라이므로 무왕이 기자를 고죽국에 봉할 수 없다. 이는 고죽국이 조선으로 국호를 바꾼 것을 아는 사람들이 기자의 조선으로 생각하고 만들어낸 말로 보인다. 고죽국에서 조선으로 국호를 바꾼 조선의 마지막 왕이 준왕이고, 준왕이 서기전 194년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고죽국은 난하 하류 유역에 있었고, 그 지역의 창려가 준왕과 위만조선이 도읍했던 왕험성이었다. 고대 한국 영토 중에 가장 서쪽 지역에 있던 나라가 준왕의 조선과 위만조선이었다. 따라서 이 조선들은 혈통적으로나 영토 위치상으로나 신시·고조선의 적통을 이은 고대 한국의 중심 국가가 될 수는 없다. 신시·고조선의 적통을 이은 국가가 북부여이고, 그다음이 오국(부여·신라·고구려·백제·가야)으로 이어진다.

◆고조선 역사를 부정하기 위해 ‘고조선’ 국호 왜곡

고조선은 본래 기자조선, 위만조선보다 고대에 있었던 조선이라는 의미로 쓰인 국호이다. 그러나 일본강점기에는 단군왕검이 건국한 고조선의 실존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고조선이라고 하였다. 그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이병도학파 학자들에 의해 현재 역사교과서에서도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 기자조선, 준왕 조선, 위만조선보다 고대에 있었던 조선이라는 의미로 고조선이라 불렀던 것인데, 준왕의 조선,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 한국 고대국가의 중심에 있는 국가라는 의미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기자조선의 군주를 뜻하는 ‘기후’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기 유물. 기자동래설, 기자조선의 실존을 증명하는 유물로 제시되지만 조작된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존재한 적도 없는 기자조선의 망령이 중국 동북공정의 근원


우리 역사에서 기자와 기자조선보다 더 큰 비중을 가진 인물과 나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 기자와 기자조선이 수·당나라의 고구려 침략 원인, 고구려 멸망의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고, 유학자들의 모화·사대에 명분이 되기도 했다. 또 일제가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였다.

하지만 기자동래, 기자조선의 실존 유무에 대한 연구는 의외로 적다. 필자가 중국의 수많은 사서를 뒤져 고증한 바에 의하면, 기자가 조선에 온 적도 없었고, 기자가 건국한 조선이라는 나라, 기자조선은 존재한 적도 없었다. ‘사기’ 송미자세가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기록과 ‘상서대전’의 “기자가 주나라에 의해 석방된 것을 용납할 수 없어 조선으로 달아났는데, 무왕이 그 말을 듣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라는 기록에 등장하는 조선은 고조선이 아니라 하남성 상구시에 있었던 넓이 50리의 작은 땅이었다.

기자의 이름은 서여이고, 서여를 봉한 이 땅 이름이 하남성 ‘조선(朝鮮)’이었다. 나라 이름은 조선이 아닌 ‘기(箕)’이며, 서여의 작위가 자작이다. 이 때문에 서여를 ‘기 나라의 군주인 자작’이라는 의미로 ‘기자(箕子)’라고 불러온 것이다.

반고가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송미자세가’와 ‘상서대전’ 기록의 조선을 한국의 고대국가인 ‘조선’으로 오인하고, ‘한서’ 지리지에 “은나라가 쇠약해지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그 백성들에게 예, 의, 밭농사, 누에치기, 벼 짜기, 옷 만들기를 가르쳤다”라는 말을 창작해 넣은 것이다. 이러한 반고의 역사왜곡이 확대재생산되어 존재한 적도 없는 기자조선이 고대 한국을 920년 지배하였던 역사로 왜곡되었다. 

김종서 문학박사
1970년대에 들어서 대릉하 유역에서 기자조선의 군주를 뜻하는 ‘기후’, 연나라 군주를 뜻하는 ‘연후’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기를 비롯하여 은나라 말, 주나라 초기(서기전 1117년 전후)의 청동기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기존의 기자 동래,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과 인식에 더하여 이 청동기를 기자조선의 실존을 입증하는 증거로 삼았고, 요하서쪽 유역이 상(은)과 서주의 세력범위에 포함된 증거로 삼았다. 그러나 이 청동기들은 조작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중국은 실존한 적도 없는 기자동래, 기자조선을 동북공정의 핵심 근거로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왜곡은 중국의 한반도 북부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불러올 수 있고, 영토분쟁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그러한 불행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역사의 진실, 역사적 사실을 바르게 찾고 가르쳐야 한다. 필자의 ‘기자·위만조선 연구’, ‘신시·단군 조선사 연구’, ‘잃어버린 한국의 고유문화’ 등에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김종서 문학박사·역사교육을 바로잡는 사람들의 모임( www.yuksamo.com)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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