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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 있는 군주는 외롭지 않다”… 사람을 중시한 유비의 삶 재조명

입력 : 2015-06-13 01:29:09 수정 : 2015-06-13 01:2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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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쭤야오 지음/남종진 옮김/민음사/3만5000원
유비 평전 - 사람을 아껴 난세를 헤쳐 나간 불굴의 영웅/장쭤야오 지음/남종진 옮김/민음사/3만5000원


‘유비는 인재를 기용하고, 단결시킬 줄 아는 인물이었다.’ 마오쩌둥의 말이다.

후한 말 혼란한 정국에서 살아남아 촉한 황제에 등극한 유비. 그가 위나라 조조, 오나라 손권과 겨루며 천하삼분의 한 축을 지탱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사람을 아끼는 성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거듭된 실패에도 자신을 추슬러 다시 일어섰고, 인덕과 매력으로 인재를 모아 힘을 키웠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따르는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았던 인물이 유비였다.

흔히 시골 촌부 출신 유비와 장군의 아들 조조가 비교된다. 유약하고 지략이 모자란 자가 유비였고, 난세에 뛰어난 지략으로 영웅이 된 자는 조조였다. 그러나 오로지 자신만의 피나는 노력과 강인한 정신력으로 황제에 오른 이는 유비였다.

중국 역사학계의 원로인 장쭤야오 중국 산둥대 교수가 문학으로 전해지는 삼국지를 역사적 기록으로 고증한 ‘유비평전’을 냈다. 국내에서 ‘조조 평전’으로 널리 알려진 역사학자이다. 통상적인 유비의 이미지를 고대 사료를 통해 재조명했다. 유비는 이런 말을 남겼다.

“조조가 조급하게 굴면 나는 느긋하게 했고, 조조가 사납게 굴면 나는 어질게 했으며, 조조가 속이면 나는 정직하게 했소. 늘 조조와 정반대로 했더니 일이 비로소 이루어졌소.”

간교한 조조와 어진 유비라는 통속적인 이미지에 부합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의미가 뒤바뀐다. 저자는 오히려 유비가 더 간교하고 머리 좋은 인물이라고 한다.

‘덕 있는 군주는 외롭지 않다’는 것은 삼국지에서 가장 유명한 말이다. 조조의 압박으로 후퇴하는 유비에게 10만 백성이 따라나섰다. 어린아이와 짐을 바리바리 싸 짊어진 탓에 행군은 지체되었고 쫓기는 형세였다. 조조의 정예 기병 5000명이 바짝 따라붙어 곧 제압당할 위기였다. 백성을 버리고 서둘러 피신하라는 측근의 권유에 유비는 이렇게 말한다.

“큰일을 하려면 반드시 사람으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 지금 사람들이 나를 따르는데 어떻게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명백한 실책이다. 중국 역사에서 보기 드문 이 일화는 깊은 울림을 남긴다. 저자는 “광활한 대륙에서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며 때로 숙청과 학살을 자행했던 중국의 역대 군주들 가운데 유비처럼 인간을 중시한 지도자는 없다”고 전한다.

유비는 일생을 통틀어 승리보다 패배를 더 많이 겅혐했다. 군사 전략으로 보면 유비는 영웅 축에 끼지 못한다. 그럼에도 유비는 한 번도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고 뜻을 세웠다. 유비 곁에는 늘 인재가 많았기 때문이다.

희대의 장수인 관우와 장비, 위대한 정치가 제갈량이 보필했으며 명장 조운과 방통이 재능을 바쳤다. ‘삼고초려’ 고사를 낳은 제갈공명은 유비가 얻은 최고의 인재였다.

조조를 일컬어 용인술의 대가라지만 유비의 인재 기용은 한 수 위였다. 사람을 정성껏 대한 유비는 마음으로 서로 통하는 결과를 얻었고 내 사람으로 만들었다. 무명의 병사들까지도 유비에 호응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다는 숱한 일화는 기록을 통해 드러난다고 저자는 전했다.

‘각자도생’의 후한 말 난세에 별 기반이 없었던 유비는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남의 도움으로 채웠다. 덕을 갖춘 리더가 부족한 요즘, 새로운 사표를 제시하는 군주가 유비다.

정승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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