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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바꿔야 할 한국사] 韓民族의 國統, 한사군과 무관… 고조선→북부여→고구려로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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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5-31 21:02:29 수정 : 2015-05-31 21: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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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뿌리’ 고대사 정립 시급
최근 우리는 나라 밖의 걱정스러운 뉴스들을 접하고 있다. 내년부터 거의 모든 일본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에 ‘독도는 일본 땅이며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지난 4월 6일 교과용 도서 검정조사심의회를 열고 검정 결과 18종의 교과서를 모두 합격 처리했는데 그중 15종이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적고 있으며 13종은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4월 3일 중국 지린성 공산당 기관지 길림일보에 따르면 ‘중국 창바이산(長白山) 문화’라는 제목의 책은 서론에서 백두산(白頭山)을 ‘중화(中華)의 성산(聖山)’이라 하고, 중원의 한족(漢族) 문화가 중국 동부의 부여, 고구려, 발해, 선비, 거란 민족은 물론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의 문화와 융합해 독특한 ‘창바이산 문화’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우리는 광복 70년이 되었는데도 주변국과 주체적 시각을 가지고 공동연구라도 할 만한 우리 고대사의 정립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일본과 중국의 태도에 대해 제도권에서 효율적인 대응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있는 이유다. 민족의 뿌리역사와 관련된 수많은 중국의 역사기록과 문화 유적을 민족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을 가장 먼저 서둘러야 한다고 본다.

중국은 최근 백두산으로 중심으로 한 일대를 ‘창바이산 문화권’으로 지칭하며 중국사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왜곡을 일삼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우리 민족의 역사는 식민지배로부터 시작됐다(?)

우리 역사의 시작을 어디로 보느냐 하는 것은 개인의 생년월일이 언제냐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권덕규는 ‘조선유기’(1924년)에서 우리 역사의 시작을 환웅의 신시(神市)시대로부터 서술하면서 우리 조상을 환족(桓族)이라 하고 5000∼6000년 전부터 인종이 번성하여 유목에서 경작으로 농업시대를 열었다고 했다. 단채 신채호는 1930년대에 발표한 ‘조선상고사’를 수두시대로부터 시작했다.

광복 이후에 나온 이병도의 ‘국사대관’(1949년)은 ‘한군현(漢郡縣) 설치 이전의 동방제사회’와 ‘설치 이후의 동방제사회’라 하여 한군현(漢郡縣) 설치를 중심으로 그 이전에 고조선이 서고, 이후에 한(漢)의 군현정치가 있었다고 봄으로써 단군의 고조선을 한사군의 곁다리 정도로 보았다. 그의 제자였던 이기백은 ‘한국사신론’(1990년, 신수판)에서 한국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필요한 것 중에 ‘우선적인 과업은 식민주의 사관을 청산하는 일’이라면서, 식민주의 사관이란 일제가 ‘한국 민족의 자주정신, 독립정신을 말살하는 방향으로 짜여진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마치 본인은 식민사관을 모두 청산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으나 그 책의 내용은 식민사관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고대조선의 평양중심설, 위만의 한반도 내재설 및 낙랑군의 대동강설 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이기백은 한사군의 지배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정치적 자유를 고조선인들은 누리고 있었다”(41쪽)고 미화하고 있다. 이병도가 ‘한국고대사 연구’에서 “중국의 한 콜로니가 된 동방군현은 발달된 중국의 고급의 제도와 문화-특히 그 우세한 철기문화-를 도입하면서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의 싹을 트게 했다.…일정시대에 낙랑·대방 양군시대의 유적 유물의 발굴·발견으로 인하여 새로운 재료와 지식을 제공해준 점도 적지 않다”고 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독자적인 통치능력이 부족해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행복한 백성으로 살았다는 의미를 애써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사편수회와 동북공정 의식과 같으며, 현재 우리나라 교과서에서 거의 모든 앞선 것은 중국에서 배워왔다고 기록하는 바탕이 되고 있다.
1600년 전 지금의 중국 지린성에 세워진 ‘광개토호태왕비’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천제의 아들’이라 서술하며 고대조선을 이은 북부여 출신이라고 전한다.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세워진 광개토호태왕비 재현비 위로 고구려의 장구한 역사를 증명하듯 별이 흐르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인류사회는 단계적으로 발전했다

신진화론자로 분류되는 엘먼 R 서비스는 1962년 인류사회가 ‘band society→tribe society→chiefdom society→state society’(윤내현은 무리사회-마을사회-고을나라-고대국가사회라고 번역)로 발전되어 왔다는 발전도식을 발표했는데, 현재 세계적으로 사회학·역사학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이런 시각으로 ‘삼국유사’의 단군사화를 보면 고대조선 이전도 ‘신화시대’가 아닌 역사시대의 기록이라는 것이 보이게 된다.

단군을 꾸며진 허구(虛構)의 역사로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 관변사학자들이다. 시라토니 구라키치(白鳥庫吉)는 1894년에 ‘단군론’이란 논문을 통해 삼국유사를 요괴(妖怪)스럽고 황탄(荒誕)하다고 비난했고, 단군의 전설은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고구려 소수림왕(372년) 이후에 ‘만들어진 황당무계한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송호정 교수는 2002년에 ‘단군, 만들어진 신화’라는 책을 통해 “식민사학자들이 말하는 단군신화 날조 주장은 성립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됐다”(121쪽)고 말해 단군사화 날조를 주장한 식민사학자들을 비난하면서 “단군신화 역시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세워지고 난 이후에 ‘만들어진’ 건국신화가 구전되다가 고려시대에 정리된 것”(119쪽)이라며 신화론을 인정했다. 이 ‘만들어진 신화’라는 말은 100여년 전 시라토니의 논문 속에 있는 바로 그 말이다. 이처럼 국내 식민사학은 입으로는 식민사학이 아닌 것처럼 말하면서 원조 식민사학을 끊임없이 복제하여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송 교수는 ‘단군신화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주몽신화도 지배자의 신성성을 부각시키고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면서 본인의 이런 주장은 ‘거의 통설로 되고 있다’(119쪽)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유일의 고구려 1차 자료이자 ‘삼국사’보다 730여년 앞선 가장 오래된 사료인 ‘광개토호태왕비문’에는 주몽(추모)의 고구려 건국과정과 북부여와의 관계가 고스란히 적혀 있다. 신화가 아닌 역사임을 증명하는 자료다.

식민사학은 버린다고 해서 저절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민족사를 상처내고 흠집 낸 식민사학의 원조 학자(이마니시 류, 시라토니 구라키치 등)들의 이론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비판을 통해 문제점을 철저히 찾아내어 극복해야 한다.
고구려인의 활기찬 기상을 전하는 벽화.

◆‘위만조선’은 조선현을 고대조선으로 착각한 데서 비롯됐다

단군왕검의 고대조선이나 고구려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난 나라가 아니라 인류사회 발전단계설처럼 ‘조선’ ‘고구려’라는 작은 마을로부터 고을나라를 거쳐 고대국가로 성장해 온 역사가 있기에 나타난 것이다.

윤내현은 ‘고조선 연구’에서 “고대조선 시대에 고구려는 난하 하류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구려, 고죽국, 기자조선, 한사군 등은 모두 같은 지역에 있었다”(447쪽)라고 했다. 고조선이라는 고대국가가 수많은 마을이나 고을나라의 연맹체로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기록을 통해 찾아낸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고구려라는 나라도 작은 마을에서 고을나라가 되어 고대조선의 거수국(연맹 소국)이었다가 고대조선이 해체되면서 독립국가가 되었다는 사회발전의 역사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위만이 들어왔던 낙랑군의 조선현은 한반도 대동강유역이 아니라, 난하 하류 동부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당시로서 이는 매우 중요한 발견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주나라 호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고(구)려는 원래 고죽국이었는데 주나라에서 기자를 봉함으로써 조선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고, 사마천이 지은 ‘사기’(조선열전, 무제기 등)에는 한나라 유철(劉徹, 무제)이 “조선을 평정하고 4군을 두었다”고 적고 있다. 두 기록에서의 ‘조선’은 단군의 고대조선이 아니라, 고대조선의 서쪽 변방인 난하 유역에 남아있던 ‘위만 세력의 점령지인 조선현’이다. 교과서에서도 고대조선의 멸망 연대를 위만이 멸망한 서기전 108년이라고 한다. 위만의 점령지였던 조선은 일개 현에 지나지 않는데, 마치 중앙정부인 고대조선으로 혼동하여 역사를 축소하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이것을 악용하여 ‘한반도 대동강 유역에 있던 단군의 조선을 계승한 나라가 위만이었다’는 식민사학을 만들었다. 조금만 주의 깊게 살피면 행간에 숨은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고대조선은 위만조선에 의해 계승한 것이 아니라, 북부여(北夫餘)에 의해 계승되었다.

◆‘고구려’라는 나라이름 따다 ‘고구려현’ 만들어 역사 격하

‘후한서’(동이열전)에는 “무제(유철)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로서 현(縣)을 삼았다”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조선도 역시 단군의 고대조선이 아니고 조선현의 위만 세력이며, ‘고구려’도 나라와는 다른 현의 이름일 뿐이라는 증거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개마현이나 낙랑군도 다 우리의 개마국, 낙랑국의 이름을 훔쳐다가 군이나 현으로 격하시켰고, 그러니 위치도 바뀌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신채호가 “한(漢)이 위씨(위만)를 멸망시키고는 그 토지를 조선에 돌려주지 않고 스스로 군현을 설치하고, 또한 그 군현의 이름을 조선 열국의 나라이름에서 가져와서 지음으로써 조선열국을 모욕하였다”고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모욕도 모욕이지만,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고구려는 위만이 망한 BC 108년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앞에서 보았다. 고구려국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 이름을 빌려다가 땅 이름만 ‘고구려현’이라고 부르고 그 땅을 고구려에 돌려주지 않고 한(漢)이 강제로 통치한 것이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 한(漢)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고구려가 한사군을 계승하였고, 그래서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라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현과 고구려라는 나라를 동일시하는 억지다. 우리가 알다시피 고구려는 한사군에 저항하며 나라를 지키다가 313년에 낙랑군을 몰아내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한사군을 이은 게 아니라 한사군을 멸했으며, 광개토호태왕비에 나오듯이 북부여(北夫餘)를 계승하였다. 우리 제도권 학자들 중에서도 이렇게 착각하는 사람이 많아 문제다.

◆북부여는 고대조선을 이었다

1600년 전 지린성 집안에 세워진 광개토호태왕비의 서두에는 “고구려의 추모(주몽)왕은 북부여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천제의 아들’임을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천제는 고대조선의 임금을 일컫는 다른 이름이기도 하므로 북부여가 고대조선을 이어 임금을 천제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북부여는 고조선과 고구려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국통(國統)이 ‘고조선-위만조선-한사군’과는 무관하게 ‘고조선-북부여-고구려’로 계승되었음을 1600년이 지난 지금, 광개토호태왕비가 국내 식민사학자들과 국외 동북공정론자들에게 웅변으로 경고해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북한의 손영종은 ‘고구려사’(1990년)에서 고구려의 건국을 BC 277년으로 끌어 올렸다. 고구려 고유의 쇠 화살촉 발견이 근거가 되었는데 고구려의 원뿌리를 찾아서 ‘고구려의 역년 900년설’을 뒷받침해주고 있어 주목된다. 이제는 지방의 일개 조선현을 고대조선으로 보거나 고구려현을 고구려로 보는 식민사학과 동북공정 사학의 미망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정부가 나서서 관련 학자들을 모아 연구하면 어렵지 않게 해결될 수 있다. 정부의 분발을 촉구한다.

이찬구 우리역사복원연대 연구위원·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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