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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종 장편 '옛날 옛적에 자객의 칼날은'

입력 : 2015-04-30 11:07:39 수정 : 2015-04-30 11: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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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 장르를 차용해 이야기의 힘과 이야기꾼의 운명을 설파한 소설가 오현종. 그는 “우리는 왜 이야기를 하는지 이야기하고 싶었다”면서 “다양한 장르를 차용하는 실험이 흥미롭다”고 밝혔다.
치명적으로 훼손된 삶을 복원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복수를 한다면 가능할까. 복수는 용이하지도 않고 부질없는 짓이다. 복수를 한다고 훼손된 삶이 제자리로 돌아올 리 없다. 삶을 복원하고 지탱할 힘은 그나마 ‘이야기’ 속에 있다는 것이 소설가 오현종(42)의 믿음이다. 누구도 할 수 없는 나만이 들려줄 수 있는 나의 이야기, 그리하여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명분이 될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쓰는 일이야말로 손금에 길을 물어 가야 할 자신의 길이라고 그는 선언한다. 무협 장르를 빌려 차진 문체로 장중하게 그려나간 장편소설 ‘옛날 옛적에 자객의 칼날’(문학동네)에서다.

늙은 왕을 능멸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온갖 악행을 자행하는 재상이 있다. 마흔 칸이나 되는 미궁을 만들어 깊이 숨어 사는 그를 베기 위해 자객이 목숨을 걸고 침투한다. 이 자객은 암살에 실패한 뒤 자진하기 전에 처자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얼굴 가죽을 스스로 도려낸다. ‘사기’의 자객열전에 나오는 작은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오현종은 이야기를 부풀리고 다채로운 색깔을 입혀 이야기의 안과 밖을 액자식으로 구성해 풀어나갔다.

이야기 밖에서는 복수의 칼날을 오로지 책을 통해 갈고 닦는 남자가 나온다. 그는 온갖 종류의 책에서 복수와 관련된 글귀를 찾는 일에 앉은뱅이처럼 서탁 앞에서 꼼짝도 안하고 몰두한다.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정’이라는 여자와 그네의 오빠 ‘명’이라는 사내가 이야기 안과 밖을 연결하는 캐릭터들이다. 이 남매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에서 죽은 자객의 아이들이다. 태어날 때부터 얼굴에 핏자국이 있어 살인자의 운명을 타고 났다는 오빠 ‘명’은 무예를 벼리며 부모의 복수를 벼르고 벼른다. 여동생 ‘정’은 이야기 바깥의 화자처럼 재상의 의붓아들이 전해준 ‘벙어리가 쓴 이야기’를 붙들고 이야기 속에서 복수의 칼을 벼린다. ‘칼에 들린 오빠와 이야기에 들린 동생’은 과연 훼손된 삶을 복원해낼 수 있을까.

세상 누구도 믿지 못하는 불행한 재상은 고독과 꿈속의 고통에 몸부림친다. 밤마다 귀신에게 다리를 베어 물리는 꿈을 꾼다. 자신만의 고독이 억울하여 그나마 곁에 두었던 의붓아들을 거세시켜 환관으로 만들어버린다.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처럼 밤마다 이야기로 재상의 삭막한 꿈을 지켰던 아홉 번째 첩은 그 혀마저 잘린다. 혀가 없는 첩과 검은 밤 팥죽을 나누며 의붓아들은 고통의 연대를 느낀다. 살이 잘려나간 고통을 당한 뒤에서야 고독으로부터 해방되는 역설을 체험하는 셈이다. ‘미궁 안에서 산 자는 누구이고 죽은 자는 누구인가. 팥죽처럼 검붉게 끓어오르는 뜨거운 지옥 안에서.’ 첩은 검고 차가운 먹물로 이야기를 적어 내려간다.

오현종은 다양한 장르 문법을 차용해 소설을 쓰는 실험을 해왔다. 스릴러 기법을 차용한 ‘달고 차가운’을 비롯해 스파이 양식을 빌린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학원물 성장소설 기법의 ‘외국어를 공부하는 시간’ 등이 그것이다. 이번에는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던 무협소설 양식을 빌려 문학적인 깊이를 가미했다. 대학원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찾다가 ‘사기’에 빠져 시작한 작업이다. 처음에는 단편으로 발표했는데 이야기 속 인물들이 제 목소리를 요구해 다시 한 편을 더 썼다가 장편으로 방향을 틀어 3년여에 걸친 작업 끝에 완성한 작품이다.

올해 우리 나이로 100세가 된 작가의 할머니 허염조 씨는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된 이력을 지녔다. 증조할아버지도 이야기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었고 할아버지는 이야기를 좋아해 모험을 꿈꾸다 광산에 투자해 망하기도 했다. 아버지 역시 빌려온 이야기책을 밤새 읽다가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이 되었다. 이야기에 들려 있는 집안에서 이야기를 짓는 작가로 살고 있는 오현종은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죽고 나면 다 사라져버릴 부질없는 삶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면서 “누구든 자신만의 이야기, 들려줄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면 의미 없는 삶이었다 말할 수 없지 않을까. 나는 그 믿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단번에 무예에 통달할 길이 담겼다는 비전( <示+必>典)이 뜬소문이듯, 하루아침에 이야기다운 이야기를 써내는 것도 가능하지는 않다. 팔자에 길을 물어 이야기꾼의 운명을 성실히 살아갈밖에.

글·사진=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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