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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의거 뒤에 러시아 동포 있었다”

입력 : 2015-04-02 20:48:43 수정 : 2015-04-02 22:5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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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독립운동과 러시아’ 학술대회 1909년 10월 24일, 의거를 이틀 앞둔 날이었다. 안중근은 이강에게 엽서를 보냈다.

“…정거장에서 때를 기다려 그곳에서 일을 결행할 생각이오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곳의 김성백씨에게 돈 50원을 차용하니, 속히 갚아 주시기를 천만 번 부탁드립니다.”

이강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된 ‘해조신문’(海朝新聞)과 ‘대동공보’(大同共報) 제작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계획을 설명하고, 빌린 돈을 대신 갚아줄 것까지 청했다는 것은 이강이 의거의 계획 단계부터 참여했음을, 또 안중근이 그에게 물심양면으로 의지했음을 보여준다. 엽서는 러시아 동포사회에서 벌였던 독립운동의 증거인 셈이다. 특히 언론을 통해 동포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소통과 교류를 이어갔음을 알려준다.

한국민족운동사학회가 3일 전쟁기념관에서 ‘한인독립운동과 러시아에 대한 재조명’을 주제로 여는 학술대회에서 이런 사실들이 구체적으로 소개된다. 

안중근 의사
◆‘안중근의 배후(?)’ 이강과 유진률

일본 군부가 1909년 12월 작성한 문건에는 “이번 사건(이토 저격)은 대동공보사의 이강, 유진률… 등의 교사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됨”이라고 적혀 있다. 일제가 배후로 지목한 이강, 유진률은 1908년 11월 창간호를 낸 대동공보의 주필과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각각 참여하고 있었다. 수원대 박환 교수는 발표문 ‘러시아지역 한인언론과 유진률’에서 “1909년 10월 10일 대동공보사의 사무실에서 유진률, 정재관, 이강, 윤일병, 정순만 등이 모인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위한 조직이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당시 대동공보사에는 안중근 동료들이 일하고 있었는데, 이강은 의형제라는 설이 있다. 실제 안중근은 이강에게 보낸 엽서에 ‘아우 안중근’이라고 서명했다. 

민족언론 대동공보 주필 이강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제공
안중근 변호인인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는 유진률과 가장 친밀한 인물로 파악된다. 미하일로프는 대동공보가 창간되면서 발행인 겸 주필을 맡았다. 박 교수는 “러시아인의 한인 배척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러시아군 휴직 중령인 미하일로프를 내세워 러시아 당국과의 마찰을 피한 것으로 보인다”며 “미하일로프가 대동공보에 관여하게 된 것은 유진률에 의해서인 것 같다”고 분석했다. 신문 연재를 통해 조국 현실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유진률은 “정부가 백성을 말미암아 된 것이오, 백성이 정부를 위하여 난 것은 아니다”고 해 국가와 정부의 설립 목적이 국민을 위하는 데 있다는 인식을 보였다. 

안중근이 이강에게 쓴 편지 안중근은 이강에게 엽서를 보내 이토 히로부미 저격 계획을 알리고, 빌린 돈을 대신 갚아달라고 부탁했다. 러시아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이강이 독립운동에 깊숙이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교류와 소통의 통로였던 민족언론


19세기 말 이래 계속된 이주로 러시아에는 한인사회가 형성되었으나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특히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륙 진출을 추진하면서 두 나라가 협상을 통해 이익을 조정해가자 동포들 고난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포들은 의병부대를 조직했고, 학교 설립을 통한 민족교육을 도모했다. 이런 양상의 또 다른 한 면이 언론활동이었다. 1908년 2월 26일 창간한 해조신문은 러시아 동포들이 만든 첫 신문이었다. 독립기념관 김형목 연구원의 논문 ‘한말 연해주지역 한인 독립운동과 러시아’에 따르면 신문 발간을 주도한 최봉준은 “일본의 보호국이라는 ‘더러운 칭호’를 받고 있다”고 한탄했고, 발간 취지서에서 “국권회복 도모와 민족정신 앙양이 신문 간행의 목적”임을 천명했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와 주필로 참여했다. 해조신문이 3개월 동안 75호를 내고 폐간되자 뒤를 이은 것이 대동공보였고, 대양보 등도 발행됐다. 

러시아 동포들이 처음으로 만든 신문인 ‘해조신문’. 동포사회에서 민족언론은 교류와 소통의 매개체였다.
독립기념관 제공
김 연구원은 “(신문들을 통한) 교류와 소통 확대에 따른 자아각성은 들불처럼 한인사회에 널리 파급되었다”고 평가했다. 하와이 한인들이 농장을 중심으로 근대 교육기관을 세워 교육에 매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공립신보, 해조신문 등을 통해 전파돼 러시아 동포들에게 귀감이 된 것이 한 사례다. 또 1908년 장인환, 전명운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친일외교관 더럼 스티븐스를 사살한 사실이 동포사회에 알려졌고, 공립신보를 통해 장인환·전명운 구명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동포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김 연구원은 “국내외에서 전개되고 있던 국권회복운동 등은 신문을 통해 한인사회에 곧바로 전달되었다. 신문은 국권회복을 도모하는 이들에게 정보를 교류하는 통로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고 설명했다. 이토 저격과 같은 활동을 보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보도해 국내외에 널리 알린 것도 해외의 민족언론이 수행했던 역할이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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