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백범, 광복군 한반도 상륙작전 준비 국내에 알려라 밀명"

관련이슈 광복·분단70년, 대한민국 다시 하나로

입력 : 2015-03-17 21:47:29 수정 : 2015-03-18 09:27:43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광복·분단 70년, 대한민국 다시 하나로 - 1부 광복, 다시 빛을 보다
[나의 해방 70년] ② 김우전 前 광복회장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안히 하지 못하면(男兒二十 未平國)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後世誰稱 大丈夫)”

생전에 백범 김구 선생은 이 글귀를 친필로 써서 청년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즐겼다. 조선 전기 무신인 남이 장군이 지은 ‘북정가’(北征歌)의 한 대목이다. 27살의 나이에 지금의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병조판서에 올랐던 남이 장군의 호연지기를 젊은이들이 배우기 바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우전(93) 전 광복회장도 20대 시절 김구 선생의 친필 휘호를 직접 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김구 선생의 기요비서(機要秘書)를 역임한 그는 현재 88명에 불과한 생존 독립유공자(애국지사) 중 한 명이다. 김 전 회장은 광복 전에는 김구 선생의 기밀 업무를 수행하는 기요비서로, 광복 후에는 가까운 거리에서 김구 선생을 보필하는 비서로 일했다.

지난 13일 그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의 자택에서 만났다. 현관문에 붙어있는 ‘독립유공자의 집’이라는 표식이 눈에 띄었다. 김 전 회장은 “성남시에서 표식을 마련해줬다. 독립운동을 하신 분 중에서 성남시에 생존해 계신 사람이 4명 정도”라며 “현재 80여명의 생존 독립유공자 중에 저처럼 실제 활동하는 사람은 10여명밖에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아흔을 넘긴 고령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힘있고 또렷했다. 그는 학도병으로 강제집징됐던 일부터 광복군 시절, 해방 후 활동까지 70여년 전의 이야기를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김 전 회장이 지난 13일 경기도 분당의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광복 70주년을 맞는 소회를 밝히고 있다. 왼쪽에 걸린 액자 속 ‘愛國(애국)’이란 글씨는 백범 김구 선생이 광복 직후인 1946년 직접 써줬다.
-일본에서 대학에 다니다 강제징집을 당했다고 들었다.


“1941년 시작된 일본과 연합군 간의 태평양전쟁에 일본 학생들은 대부분 군대에 끌려 가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일제의 패색이 짙어졌는데, 일본은 군인이 부족해지자 조선인 대학생들을 포함한 식민지 학생에 대한 강제 지원 명령을 내렸다. 대학에는 조선 학생과 대만 학생들뿐이다시피 했던 상황이었다. 일본은 ‘특별지원병제도’라는 이름으로 지원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부모들을 협박했다. 당시에 대학 재학 중이던 우리나라 학생은 4500여명이었는데, 1943년 11월 강제로 지원을 받아 1944년 1월20일에 4500여명 전부가 징집됐다. 고 김수환 추기경도 그중 한 명이었다. 대부분 평양에서 입대를 해서 각지로 흩어졌는데, 당시 입대한 사람끼리 후일 입대 날짜를 붙여 ‘20동지회’를 만들었다. 동지들은 광복 이후 각 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일본 군영을 탈출해서 광복군에 합류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일본 교토에서 대학교에 다니던 중 독립운동을 하다가 형무소에 잡혀 갔던 남창녕이라는 분을 만났다. 당시 법학과를 다니고 있어서 아는 변호사를 통해 그의 변호를 도왔다. 남형의 집이 평양이었는데, 학도병으로 입대하기 전날 평양에 있는 그의 집에서 자게 됐다. 거기서 남형의 아버지인 남재호 선생을 만났다. 남 선생은 1919년 평남 진남포(鎭南浦)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셨고, 같은 해 10월에는 항일 단체인 국민단에 가입해 독립운동 지도자인 안창호 선생의 밀명으로 평남과 황해도 지방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날 밤, 선생은 장롱에서 태극기를 꺼내 보여주셨다. 처음 본 태극기였다. 선생은 학도병들이 중국에서 많이 훈련을 받는데 많이들 탈출해서 광복군에 합류한다고 넌지시 말씀해주셨다. 그게 가슴에 와닿았다.”

그는 일본군에 입대해 한 달도 안 돼 중국의 쉬저우(徐州)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2개월여 군 생활을 하다가 1944년 5월 말 목숨을 걸고 일본 군영을 탈출했다. 꼬박 일주일을 걸어 광복군이 있는 푸양(阜陽)에 도착했다. 그렇게 그는 독립운동과 연을 맺었다. 그는 한국광복군 3지대 소속 중앙사관학교에서 한국어로 된 제식훈련과 군사 기초과목, 독립정신 교육을 받았다. 당시 4개월여의 교육을 함께 받았던 동기생들로는 장준하(전 국회의원), 김준엽(전 고려대 총장), 윤경빈(14대 광복회장), 김국주(17대 광복회장) 등이 있었다. 김구 주석이 참석한 졸업식은 1944년 10월20일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重慶)에서 치러졌다.

김우전 전 광복회장이 백범 김구 선생으로부터 1944년 받은 기요비서 임명장 사진을 들고 있는 모습. 명주 수건에 써준 원본은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김구 선생의 기요비서는 어떻게 됐나.


“1945년 4월6일이었다. 지금도 그날이 생생하다. 당시 나는 광복군 제3지대장이었던 김학규 장군의 부관이었다. 김구 선생이 주석 판공실로 나를 은밀히 부르셨다. 2시간여 김구 선생과 독대를 했다. 선생께서는 광복군이 한반도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런 사실을 조국에 있는 애국지사들이나 동포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하시면서 내가 OSS(미국 중앙정보국인 CIA의 전신인 전략첩보부대) 훈련도 받았으니 적격이라고 하셨다. 김구 선생은 1932년 일본 승전 기념 잔치에 윤봉길 의사를 보내셨던 이야기도 하시면서 ‘윤봉길 덕분에 독립운동이 활기를 띠었던 것처럼 자네도 주어진 임무를 훌륭히 해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힘껏 해보겠습니다’라며 중임을 맡겨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김구 선생께서 판공실 기요비서 임명장을 만들어 주셨는데, 옷에 숨기기 쉽도록 종이가 아닌 명주 수건에 써주셨다.”

이후 기요비서로 임무 수행을 위해 모든 훈련을 마치고 대기 중인 그에게 예상치 못한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이 잇따른 원자폭탄 공격을 받고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국내로 들어오기 위해 비행기편을 기다리던 중국 쿤밍(昆明)에서 그는 광복을 맞았다. 김구 선생은 당시 기쁨 반 걱정 반의 표정으로 “일본 제국주의가 망한 것은 잘되고 기쁜 일이지만, 해방을 이렇게 외세의 힘을 빌려 찾아오게 되면 우리 민족의 앞날은 불행해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해 11월,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은 신탁통치에 나선 미군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아서 일반인 자격으로 조국에 돌아왔다. 김 전 회장은 다음해 3월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그는 김구 선생의 사저인 경교장에 살면서 선생의 비서 역할을 했다.

해방 후 청년 김우전에게도 큰 일이 생겼다. 그는 1947년 4월, 지금의 아내인 남인실(86)씨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장인은 그에게 처음으로 태극기를 보여줬던 남재호 선생이었다. 7살 아래의 인실씨가 김 전 회장과의 혼인에 더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김구 선생을 주례로 모시고 싶었지만 선생께서 ‘내가 주례를 서면 팔자가 사납다’며 결혼 주례를 사양하셨다”고 말했다. 대신 김구 선생은 하객으로 참석해 ‘萬福之源’(만복지원)이라는 글을 써줬다고 한다.

-김구 선생의 아들로 전 공군참모총장인 김신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장과도 친분이 있다고 들었다. 기억나는 일화는.

“김구 선생의 둘째아들인 신은 나와 나이가 동갑이라 허물없이 지냈다.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젊은 시절 신은 나보다 건장한 체격에 주량이 하해와 같았다. 1947년 가을쯤 김좌진 장군의 아들인 김두한씨가 신이가 미국 공군사관학교에서 조종사 교육을 마치고 돌아오자 그를 환영한다고 충무로에서 술을 산 적이 있다. 둘이 술을 사발로 마시면서 많이 먹기 시합을 했는데 종로의 술대장이라 불린 김두한씨가 여러 부하들 앞에서 신에게 항복하는 것을 봤다.”

1946년 3월부터 김구 선생을 보좌하던 그는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에도 동행했다. 하지만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흉탄에 돌아가셨을 때는 그 자리에 있지 못했다.

백범 김구 선생이 김우전 전 광복회장에게 직접 써준 휘호. 조선 전기 무신인 남이 장군이 지은 ‘북정가(北征歌)’를 담고 있다.
-당시 상황은.


“어머니를 뵙기 위해 잠시 집에 갔다 왔는데 선생께서 저격당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사흘 동안 빈소에서 꼼짝 않고 있었다. 물론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다. 선생의 영정 아래서 ‘결코 선생님에게 욕이 되는 행동은 하지 말자’고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든가 아니면 밥벌이라도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김구 선생의 서거 이후 정치권에서 발을 빼 무역회사에 취직했다. 이후 그는 해운업과 건설사업을 하며 전문경영인으로 활약했다. 2003년에는 광복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2년 임기 동안 모은 급여와 자신의 연금 등 1억5000여만원을 독립유공자 증손 자녀들을 위한 광복회 장학기금으로 기탁하기도 했다.

광복 70주년·분단 70주년을 맞은 올해, 그의 소원은 여전히 통일이다. 그는 “우리 같은 노인들이야 겪을 대로 다 겪었기 때문에 더 이상 받을 고통이 별로 없다”며 “하지만 젊은이들은 남북문제, 통일을 소홀히 생각하면 안 된다. 분단이 계속되면 외부의 간섭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의 표정에서 공교롭게도 최근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듯했다.

글 김선영·사진 김범준 기자 007@segye.com

■ 김우전 前 광복회장은…


1922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배달 등을 하면서 교토 리쓰메이칸대학 법학과에 합격했지만 1943년 강제 징집되면서 학업을 중단했다. 일본군에서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한 뒤 미국 중앙정보국(CIA) 전신인 전략첩보부대(OSS)의 특수훈련을 받았다. 김구 주석의 기요비서, 독립군 연락장교 등으로 활동했다. 광복 후인 1947년 독립운동가인 남재호 선생의 딸인 인실씨와 결혼했다. 1999년 한국광복군동지회장에 이어 2003년 제16대 광복회장을 역임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2001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고 1998년 ‘김구 선생의 삶을 따라서’, 1999년 ‘김구 주석의 남북 협상과 통일론’이라는 두 권의 책을 집필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