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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 전 혜초스님이 머물렀던 광효사, 향로 연기 ‘구법의 열망’처럼 피어올라…

입력 : 2014-10-30 23:57:06 수정 : 2014-10-30 23:5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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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실크로드를 가다 ①
문명교류의 욕망은 산과 사막과 초원과 오아시스를 거치는 육로뿐 아니라 바닷길을 낳았다. 1300여 년 전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인인 혜초(慧超)는 그 바닷길의 삼엄함에 과감히 몸을 던진 인물이다. 일찍이 열여섯 나이에 출가한 그는 진정한 깨달음을 향한 여정을 길 위에서 찾았다. 만행(萬行)의 길이자 구법승의 길이었다. 신라 계림을 출발하여 입당(入唐)한 그는 오늘날 인도에 해당하는 동천축에 상륙하는 구법의 바닷길을 열었다. 나는 동서양 문명교류의 개척자적 선각(先覺)의 결과물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떠올리며 ‘해양실크로드 탐험대’의 일원으로 해양대학교 실습선 한바다호에 동승했다.

이 바닷길은 1300년의 시공간이, 그리고 혜초 스님과 내가 서로 갈마들고 넘나드는 장이 될 것이다. 바다는 잔잔하고 듬직했고 때로 음험했다. 광폭의 돛을 올리며 출항했을 스님의 목선과 해양대학교 현대식 철선의 차이는 외항을 빠져나와 수평선에 둘러싸이면서 서로 두동지지 않았다.

바다는 무엇일까. 이 짧지 않은 바닷길에는 사람만이 동행은 아닌 듯싶다. 바닷새가 아닌 뭍의 새가 깃들였다. 참새 같다고도 하나 참새는 아닌 듯했다.

뭍의 새가 홀몸으로 배 갑판을 배회하는 걸 본 사람이 여럿이다. 어찌된 일인지 한 배 안에서 쉽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그 항해에 오른 뭍의 새가 도반(道伴)처럼 여겨진다. 그 밖에도 동행은 또 있다. 항해 둘째 날 아침엔 돌고래가 배 앞을 선도하며 길라잡이로 나아갔고 날치들은 마치 새마냥 파도 위를 한참 날았다. 지느러미와 날개가 하나였다.

포항 신항 부두를 출발한 해양대학교 실습선 한바다호는 꼬박 나흘을 걸려 중국 광저우 상선부두에 입항했다. 사흘의 바닷길은 태풍도 앞서 비껴간 뒤끝이라 잔잔하고 청람색으로 눈부셨다. 

혜초의 흔적은 광저우 광효사(光孝寺)에서 돌올하다. 당나라 719년 남천국의 마뢰야국 출신 밀교승려 금강지(金剛智)를 만나 사사하고 그의 독려로 천축국을 향하게 된 시절 인연의 장소였다.

광효사 스님들의 예불과 독경 소리 속에서 문득 한 스님이 형형한 눈빛으로 내게 다가와 나를 통과해갔다. 그것은 지독한 한순간의 환시였다. 그 눈빛 속에는 구법의 바닷길이 파란만장 혹은 망망대해로 출렁였다.

스님이 천축국을 향해 떠난 황푸고항이 광저우에 있다. 당나라 때는 무역선이 황푸항을 출발해 남아시아와 인도양을 지나 페르시아만까지 이르렀다 한다. 지금의 황푸고항은 당시의 주변 13항거리의 번성함이 무색하게 고둥잡이 배 몇 척만이 고즈넉하다. 스님도 이곳에서 세 개의 돛을 단 배, 일명 정크선을 타고 바다의 비단길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런 옛 포구엔 더위를 피해 유모차를 밀고 나온 지역민들과 남방의 연인들, 그리고 나 같은 관광객의 호기심 어린 발걸음만이 완연하다.

광저우 광효사(光孝寺)에서 탐험대원들이 실크로드를 연구해온 정수일 교수(맨 오른쪽)로부터 실크로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나는 광효사 입구의 구걸하는 걸인들을 보며 왠지 인간 혜초의 또 다른 분신을 보는 듯했다. 저들은 혜초를 모를 것이다. 그러나 혜초는 여전히 그가 1300여년 전 스승 금강지와의 만남을 통해 서역과 천축국을 가게 된 그 본원적인 구법과 번뇌의 파란만장을 아직도 지금 우리 앞에 화두처럼 던져준다. 본능적으로 손을 내미는 사람, 퀭한 눈빛으로만 동냥을 하는 사람, 깡통을 앞에 놓고 좌선하듯 심드렁하게 앉아 있는 사람, 그걸 이채롭게 바라보는 나에게도 일말의 구법이 드리웠을까.

탑처럼 선 커다란 철제 향로에 풀풀 향 연기가 풍긴다. 그 연기 속에 언뜻 혜초 스님이 나를 바라고 서 있다. 목숨은 스러지지만 스러지지 않는 구법의 열망은 우리 앞에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인문학적 진경을 선사한다.

배멀미에서 잠시 해방된 일행 중 하나는 땅멀미를 농담처럼 얘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몸의 울렁증이 아니라 새로운 문물과 진정한 깨달음의 현장에 대한 바닷길의 열망이 남긴 현기증이 아닐까. 광효사 입구의 거지 탁발승과 윗옷을 벗어젖힌 반백의 구걸 노인의 구릿빛 등짝에도 여전히 혜초 스님의 방황과 번뇌가 늡늡하게 배어 있다. 길은 방황 속에 있고 그 방황 속에 번뇌하는 마음이 오롯해야 둘러보고 궁구하는 마음의 처지가 여실해진다. 왕오천축국전은 의문의 기행문이고 정신의 물색을 살피는 마음의 기록이다. 마음이 풍경과 풍물과 그 물색에 갈마들지 않고서야 번뇌는 새로운 국면을 얻을 수 없다. 번뇌를 버리고 내치는 것이라기보다는 번뇌의 친구이자 도반이 바로 혜초의 중국에서의 첫길이 아니었을까.

회성사(懷聖寺)는 가장 오래된 이슬람 사원이다. 타향에 거주하며 무함마드를 기린다는 뜻이 오롯하다. 당나라 때 지어져 무슬림 교당으로 그 면면이 고색창연하다. 경내 서남쪽에 있는 광탑은 예배장소로서뿐 아니라 광저우 앞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의 등대로서의 기능도 겸비했다. 그 견실한 방극탑은 모르타르가 없던 당시에 찹쌀과 홍차와 조개껍질 가루를 한데 이겨 청색 벽돌을 쌓는 데 사용했다 한다. 종교적 독실함 때문인지 아직까지 그 건재한 위용은 소박하면서도 담대하다. 서역과의 활발한 교역 한쪽엔 이슬람교의 전파라는 종교적 넘나듦이 있다. 아랍어 활자들은 문외한인 내게 담배연기 같은 문양 같기도 하고 알라의 진리를 상징하는 오묘한 디자인처럼 보인다.

경내의 백 년이 넘는 용안(龍眼)이라는 나무 중동에는 말벌의 집이 서렸다. 탐사대원들은 벌에 쏘일 걱정도 아랑곳없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말벌들은 가끔씩 앉은 자리에서 날개를 털어 바람을 부친다. 남방의 한낮 더위를 견디는 몸짓으로 보인다. 

해릉도에 있는 해상실크로드 박물관 전경.
정철훈 사진 작가 제공
광효사와 함께 육용사(六榕寺)는 여러 이름으로 불렸지만 지금의 명칭은 소동파가 경내의 여섯 그루 용나무에 연유해 지었다 한다. 8각9층의 거대한 화탑은 높이가 60여m에 이른다. 돌계단을 통해 내부로 올라가 바다 쪽을 바랄 수 있다. 이슬람교든 불교 사원이든 하나의 장소에 여러 이름이 갈마들었다. 여러 이름으로 불릴 만큼의 시간의 풍화를 견뎠다. 혜초의 안목에도 이국의 풍물은 새뜻하였고 전에 없는 생각이 돌올했을 것이다. 사물을 다르게 보는 안목과 감각 속에서 분별심의 또 다른 겨를을 보았을 것이다. 다양한 외물(外物)은 정신의 또 다른 지경을 가늠하게 했을 것이다.

풍랑에 더럭 겁을 집어먹었다가도 어느 순간 풍랑의 흔들림에 기대어 평정을 찾았을 수도 있다. 유일한 것을 여럿으로 그 결을 달리 보아내고 혼란스러운 여럿을 다시 하나로 가지런히 하는 마음, 젊은 스님의 가슴 안엔 무량한 생각의 파도가 쉬 잠들지 못했을 터이다.

광저우 시내에서 하이링다오(海陵島)까지는 버스로 꼬박 네 시간이 걸린다. 하이링다오에 있는 광둥해상실크로드박물관은 남해1호를 1987년 해양 인양 이후 30년 가까이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남송 시대 목선을 인양하는 중국의 자세는 참으로 진지하고 늡늡하고 웅숭깊음 속에 능노는 듯하다. 목선 한 척의 가치를 아직도 인양하고 발굴하고 조사하고 연구하며 전시하며 궁구하는 저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해양박물관의 중심테마가 되고 있다. 중국의 저력과 스케일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보다 크고 웅숭깊은 대륙과 대양의 문화적 기틀, 그 역사적 공정에 고무돼 있다. 그들 표현대로 ‘海上絲組之路’를 기획하는 중국의 역사인식인 중화대양(中華大洋)에 번져나갔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웅대하면서도 한국과는 다른 차원의 실크로드에 대한 개념 접근과 웅지를 품어야 한다. 저들이 남송 시대의 목선 한 척을 기반으로 광둥성 양장시 해변에 ‘남해1호’라는 목선 한 척을 삼십 년 넘게 품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범박하게 말해 본래적 중화(中華)를 찾고 그 대륙적이고 세계 포용의 이미지를 위한 역사적 기반을 충분히 확보하자는 취지가 여실하다. 그것을 해양이라는 문화적 기반 속에서 그들만의 늡늡하고 치밀한 여건 속에서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너비 삼십여 미터의 남송(南宋)의 목선 한 척의 의미는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것이 중국의 무서움이자 저력이고 웅비(雄飛)의 서막이다. 양장시의 해양실크로드 박물관 관장의 환대 속에는 대륙의 자신감과 혁명적 세계 경영의 느낌이 소소하게 그러나 실질적인 스케일로 감지된다.

광둥성 박물관에는 다양한 16만여점의 유물들이 즐비하다. 최초의 아메리카인으로 인디언 원주민의 문화와 역사를 기획전시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저들의 대륙적 수용성이 느껴졌다면 지나친 말일까. 그러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대한 언급과 조명은 과문한 탓이겠지만 광저우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광둥박물관은 광저우 지역의 유물과 문화재를 다룬다. 그러나 혜초는 이곳 황포고항을 출항해 인도지역을 탐험한 최초의 세계인이고 유명한 왕오천축국전을 쓴 연고가 있는 인물이다.

침몰한 상선 남해1호를 인양하고 보존하기 위해 해양실크로드박물관을 홍콩이 가까운 양강시 해변에 크게 지은 중국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점은 유물 하나를 조명하기 위해 커다란 박물관을 짓는 음험한 마인드에 있다. 우리도 문화재 수만점을 수용하고 보전하는 것도 좋지만 하나의 유의미한 문화유물을 의미 깊게 성찰하는 혜안이 더 종요롭다.

글·사진=유종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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