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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지키며 최후 맞은 서해훼리호 백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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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4-18 11:35:05 수정 : 2014-04-18 11:3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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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객들을 구하려고 끝까지 배속에 남아 사투를 벌였던 서헤훼리호 백 선장의 숭고한 죽음이 떠오르네요."

전북 부안군 위도면 주민들은 21년 전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당시 배 속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백운두(당시 56세) 선장을 '진정한 뱃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서해훼리호 침몰사고는 1993년 10월10일 오전 10시20분께 부안군 위도면을 떠나 격포항으로 가던 중 침몰, 362명의 승객 중 292명이 숨진 사상 최악의 해상 참사다.

당시 백 선장은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한 상황에서 홀로 탈출해 인근 섬이나 뭍으로 도주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구조작업에 나섰던 민간인들과 생존자 중 누구도 배에서 백 선장을 보지 못했다는 진술이 나오고, 사고 후 인근 항구에서 백 선장과 비슷한 사람을 봤다는 제보까지 이어져 검찰은 그를 지명수배하는 촌극을 벌였다.

당시 사법당국은 백 선장이 살아있을 확률이 98%라고 단정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백 선장의 가족은 가슴에 대못이 박히는 고통 속에서 죄인처럼 숨죽여야 했다.

그러나 백 선장은 사고 닷새 만에 침몰 선박 2층 조타실 뒤편 통신실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고 순간 선장실에 있었던 백 선장은 황급히 조타실 뒤 통신실로 뛰어들었으나 순식간에 휩쓸려 들어온 물살에 출입문이 막혀 탈출하지 못하고 희생됐다.

해경에 '구조 요청'을 하려고 통신실로 뛰어든 것이다.

위급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승객의 안전을 지키고자 그는 숭고한 죽음을 택했다.

서해훼리호는 출항 당시 북서풍이 초당 10∼14m, 파고 2∼3m로 해상 기상이 좋지 않았다. 폭풍주의보 등 기상특보가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여객선이 출항하기에는 악천후였다.

백 선장은 결국 높은 파도 때문에 운항이 어렵게 되자 무리한 운항보다는 회항을 결정, 선수를 돌리려다 사고와 맞닥뜨렸다.

극도의 불안 속에서 무서운 죽음을 직감했을 그였지만 선장으로서 자세와 의무, 책임을 저버리지 않았다.

부안군 위도면의 한 선장은 "선장은 승객은 물론 배와 함께 하는 공동운명체"라며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자신의 직업에 충실했던 백 선장의 숭고한 죽음이 다시 생각난다"고 말했다.

서해훼리호 참사가 어느새 20년을 넘겼지만, 사망자들의 넋과 선장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추모제는 위도 앞바다에서 매년 열리고 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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