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류순열의경제수첩] 비트코인의 사회학

관련이슈 류순열의 경제수첩

입력 : 2013-12-20 22:49:59 수정 : 2013-12-21 07:52:37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세계 경제위기 부른 주류 금융에 대한 불신·저항의 산물
월가의 탐욕·부도덕 가상 화폐 확산 키워
‘나는 정직한 돈만 믿는다. 금과 은 그리고 비트코인.’(I believe in Honest Money, Gold Silver and Bitcoin) 독일 베를린의 한 술집 출입구에 내걸린 안내문이다. 이곳에선 온라인 가상화폐, 비트코인으로 술값을 받는다. 이 짧은 안내문은 불온하다.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고삐 풀린 금융에 대한 반감이 깔려 있다. 버블을 키우고 키우다 마침내 폭발해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은, 정직하지 않은 금융시스템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다. 한마디로 실패한 주류 지배질서에 대한 반항의 격문이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비트코인이 열풍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 기술적으로는 전문가들이 감탄해 마지 않는 ‘비잔틴제국 장군 딜레마’를 해결한 혁신의 힘일 것이다. 비트코인은 중앙통제 시스템 없이 이뤄지는 P2P(개인 대 개인) 분산컴퓨팅(distributed computing)의 오랜 딜레마인 정보 간 충돌(중복사용) 문제를 말끔히 해결했다. 이로써 분산컴퓨팅의 효율성, 보안성과 같은 장점을 맘껏 누리면서도 중복되고 동기화하지 않는 정보에 골머리를 앓는 혼란과 고통이 사라졌다. ‘채굴’(mining)이라는 참여자들의 자발적 작업증명 시스템 덕분이다.

그러나 지구촌 곳곳에서 비트코인이 분출하고 형성하는 에너지를 설명하는 데 기술적 혁신만으로는 부족하다. 또 다른 중요한 답은 베를린 술집의 안내문에서 찾을 수 있다. 비트코인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바로 시장실패를 야기한 신자유주의 금융시스템임을 이 짧은 격문은 웅변한다.

보다 정확히는 시장실패 자체보다도 반성도 없고 책임도 지지 않는 세태가 비트코인을 키웠다고 봐야 한다.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고도 뉴욕 월가의 탐욕과 부도덕성은 제대로 심판받지 않았다. 금융파생상품을 남발하며 거품을 키운 투자은행들은 천문학적 공적자금을 수혈받았고 이후에도 거액의 성과금 파티를 벌였다. 월가의 행태를 조장한 금융경제학자들 중에도 반성하는 이가 없다. 거두인 유진 파마 시카고대 교수는 올해 노벨경제학상까지 받았다. 200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그를 ‘반성할 줄 모르는 거짓말쟁이’로 혹평했다. 

류순열 선임기자
비트코인의 사회학적 뿌리를 월가 점령시위(Occupy Wall Street)로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2011년 9월17일 시작된 월가 점령시위는 금융위기를 일으켜놓고도 책임지지 않고 반성할 줄도 모르는 월가에 대한 대중의 분노에서 비롯됐다. 이 시위로 대중은 분노를 쏟아냈지만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그런 그들이 기술적 혁신을 겸비한 비트코인에 주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 시위 참여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비트코인이야말로 완전한 경제적 표현의 자유를 위한 것”이라고 평했다.

출발부터 비트코인의 정신은 불신과 저항이었다. 정체불명의 개발자, 사토시 나카모토는 2008년 10월 세상에 공개한 논문에서 기존 화폐와 금융시스템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그는 “중앙은행이 화폐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필수적인데 국가 화폐의 역사는 이 믿음을 저버린 사례로 충만하며 은행 또한 신뢰를 저버리고 신용버블이라는 흐름 속에서 대출했다”고 일갈했다. 논문의 핵심은 “정부나 중앙은행, 금융기관 등 어떠한 중앙 집중적인 권력의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비트코인이야말로 시장의 무한자유를 추구하는 시장자유주의자들의 구미에 딱 맞는 발명품인 셈이다.

비트코인 열풍은 ‘책임과 반성’이 결여된, 그래서 대안을 찾지 못하는 사회의 필연이다. 당시 월가를 찾은 세계적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의 연설은 의미심장하다. “우리에게 대안을 생각할 수 있는 자유가 허용돼야 한다는 메시지를 잊어선 안 된다. 이러한 기본적인 것이 무너지는 사회라면 우린 최선의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류순열 선임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