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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끝나지 않은 전쟁' 노병에게 듣는다-에드워드 로니 장군

입력 : 2013-05-30 15:39:12 수정 : 2013-05-30 15:3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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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아버지·할아버지의 용기·희생 자랑스러워하라”
미국 현충일인 메모리얼 데이를 하루 앞둔 26일(현지시간) 에드워드 로니 장군(96·예비역 중장)을 만났다. 그는 전처와 사별한 후 1994년 재혼한 부인과 함께 워싱턴 서북쪽 외곽의 ‘놀우드’ 군은퇴자커뮤니티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는 앞이 거의 안 보일 정도로 시력이 떨어지고 거동이 불편했지만 건강해 보였다. 이번 인터뷰는 미국에서 6·25전쟁 비밀해제 문서들을 수집 중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남보람(39) 소령이 주선했다.
에드워드 로니 장군이 26일(현지시간) 워싱턴 서북쪽 외곽 ‘놀우드’ 군은퇴자커뮤니티에서 세계일보가 선물한 태극기를 앞에 두고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인터뷰 내내 6·25전쟁 참전 장교로서 자부심과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
워싱턴=박희준 특파원
― 올해로 60주년을 맞은 한·미 동맹을 평가한다면.

“양국은 좋은 관계를 이어왔다. 강한 관계로 발전해 왔다. 한편에서 미국 의회의 반대가 있다. 해외 주둔에 예산을 너무 쓴다는 지적이 있다. 한국 내에서도 일부이지만 ‘양키 고 홈’이라는 구호를 외친다. 1970∼1971년 한·미 혼성부대인 한·미 제1군단을 만드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서로 다른 두 부대를 하나로 만드는 게 쉽지 않았다. 주거와 식사 문제 등에서 어려움이 있었다. 처음에 미군과 한국군 식사대가 따로 있었다. 시간이 지나 서로 상대방 음식을 좋아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동고동락하는 사이가 됐다. 그런 노력으로 양국이 함께 발전해 오늘날의 한·미 관계가 있다. 양국은 강한 유대감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맥아더 장군의 참모가 되었나.

“1949년 9월 무렵 일본 도쿄의 미 극동군사령부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군수기획장교로 부른 것이다. 역사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케네스 모로 박사와 일본 전역을 한 달간 여행하고 ‘트립리포트’를 작성해 보고했다. 일본에서 미군을 철수하는 문제는 1년가량 이어진 정치 논쟁이었다. 나는 리포트에서 전원 철수는 안 되고 일본 자위병력 창설 같은 게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공격할 것 같다는 내용도 담겼다.(*도발 징후는 대북 첩보부대인 켈로부대 등에서도 지속적으로 보고됐다.)”

더글러스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부 사령관(오른쪽 두번째)이 1950년 9월15일 ‘USS 마운트 맥킨리’호 선상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6·25 발발 당일 극동군사령부 상황은.

“1950년 6월25일 일요일 당직장교로 근무하는데 긴급 전문이 왔다. 북한이 서울을 공격해 왔다는 내용이었다. 에드워드 아먼드 참모장에게 가져갔더니 직접 가서 보고하자고 했다. 보고를 받은 맥아더 장군은 매우 침착했다. 장군은 가장 신뢰하던 서울의 존 무초 미국대사한테서 전화를 받고 상황이 매우 안 좋다고 판단했다. 그는 휴가 중인 전 장병의 기지 복귀를 지시하고 전투 훈련을 준비할 것을 명령했다. 먼저 한국에 사과부터 해야겠다. 당시 한국 내 미군은 숫자와 탱크도 적었고, 그나마 등급이 낮았다. 러시아와 중국은 북한에 많은 현대식 탱크를 제공하고 북한군을 훈련하고 있었다. 북한 전력은 우리나 한국군보다 4배는 강했다.”

―인천상륙작전 기획에 참여했는데.

“맥아더 장군이 상륙작전을 희망한 인천은 조수간만 차가 10m에 이르고 접안지역이 좁고 3, 4㎞가 뻘밭이다. 소련제 지뢰가 너무 많았다. 어디로 가든 서울을 방어하는 북한군과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맥아더 장군은 ‘나는 어떻게든 이쪽으로 가겠다’면서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상륙작전에는 최소 3개 사단이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는 2개 사단(미 7사단과 해병1사단)밖에 없었다. 또 서울로 진입하려면 한강을 건너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나를 준장으로 2단계나 진급시켜 기획그룹을 지휘하도록 했다. 맥아더 장군은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너희를 제1 제파로 보내겠다’고 했다. 우리는 열심히 계획해 인천으로 갔고 큰 성공을 거뒀다.”

인천상륙작전 실행 다음날인 1950년 9월16일 유엔군 소속 탱크와 병력이 인천 월미도에 상륙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제38보병연대를 이끌고 직접 6·25전쟁에 참전했는데.

“아먼드 장군(당시 미 10군단장) 명령으로 1950년 12월27일 10군단에 배속됐다. 10군단장은 계속 싸우자고 했다. 매슈 리지웨이 8군 사령관도 결전을 강조했다. 9군단 참모 중 한 명이 그러더라. ‘제기랄. 리지웨이(산등성이 길)가 아니라 롱웨이군(먼길)’이라고. 우리 병력이 중국보다 적었으나 포병과 공군이 우세해 해볼 만했다. 북한군과 중공군이 철로를 모두 파괴하고 땔감으로 써버려 다시 건설해야 했다. 아먼드 장군이 38보병연대를 맡게 해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김제고지’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 피의 능선의 일부였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중공군과 맞서 싸웠다. 한국인 노무자로 이뤄진 ‘지게부대(chuggy boy)가 쇳덩이인 박격포와 기관총을 고지까지 날랐다. 우리는 중공군 수백명을 사살하고 수백명을 포로로 잡았다. 우리는 단 한 명도 숨지지 않았다. 공병인데도 공병보다 보병으로서 전장에 있었던 것 같다.”

―전쟁이란 어떤 것인가.

“전쟁은 거친 것이다. 우리는 배고픈 시절을 겪었으나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전쟁이 세대를 바꾼 것 같다. 기존 체제에 저항하고 구세대와 신세대 갈등이 심해지고. 엊그제 웨스트포인트에 가서 연설하면서 아이비리그처럼 학문을 추구하기보다 규율을 지키는 집단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행히 한쪽에 자기만을 아는 ‘미제너레이션(me generation)’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 젊은이가 스스로 군에 지원한다.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도 가고 이라크에도 가서 이슬람과 IED(급조폭발물)와 싸워야 한다. 아주 어려운 환경이고 과거와 다른 종류의 적과 맞서고 있다. 그래서 정확한 답을 줄 수가 없다. 여러분 세대가 공부해서 나에게 알려줘야 한다.”

―한국의 젊은이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과거를 기억하라고 말하고 싶다. 여러분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한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다시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워싱턴=박희준 특파원 july1s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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