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적십자사가 화사해졌다. 우중충하던 사옥을 보수했고 건물 옹벽은 ‘생명사랑 희망벽화’로 장식됐다. 총재 집무실에는 검은색 소파 대신 밝은색의 회의용 테이블과 의자가 들어섰다. 변화의 중심에는 한적 첫 여성 수장인 유중근 총재가 있다. 지난 16일 남산 입구에 자리한 한적 본사에서 만난 유 총재는 자리에 앉자마자 “들어오면서 달라진 것을 봤느냐”고 물었다. 소감이 궁금한 듯했다. 질문이 아닌 대답으로 인터뷰가 시작됐다.

―한적이 한결 부드러워졌다는 느낌을 준다.
“인테리어 자체는 달라진 게 없고 소품만 바꿨다. 건물이 오래돼 보수공사를 했고, 옹벽에 누수방지 공사를 하면서 국제적십자운동 150주년을 기념해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150명의 작품 이미지를 담은 생명사랑 희망벽화를 만들었다. 지역 명물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1층에는 희망풍차 라운지를 만들어 주변 직장인이나 외국인 관광객이 물 한 잔 마시며 쉴 수 있게 했다. 한적이 사람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가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총재 취임 후 1년반가량 지났다. 3년 임기의 반환점이다.
“2011년 10월에 적십자사 창립 106년 만에 첫 여성 총재로 취임했다. 그때 많은 사람들에게 한적이 하는 일에 대해 물었더니 대부분이 이산가족 상봉과 헌혈만 얘기하고 사회봉사 등 다른 활동은 잘 알지 못하더라. 한적은 국민의 기부와 회비로 운영되고 국민을 행복하고 건강하게 하는 게 사명이므로 국민 속으로 들어가는 적십자가 되자고 결심했다. 국민 공감, 국민 참여, 국민 감동을 목표로 정했다. 이를 통해 적십자정신을 살려보려고 한다.”
―한적의 활동에 대해 소개해 달라.
“국제적십자사연맹(IFRC) 소속 187개국 적십자사 가운데 한적이 가장 통합적이고 포괄적인 일을 한다. 크게 보면 재난구호·사회봉사, 적십자병원, 혈액사업의 세 가지 큰 덩어리로 엮여 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재해·재난이 일어났을 때 노란조끼를 입은 적십자 봉사원이 벌이는 구호활동이다. 평상시에는 사회봉사가 역점사업이다. 보건안전교육과 청소년적십자(RCY) 사업, 남북관계 사업도 중요한 일이다.”
―봉사활동은 자발적 참가가 중요하다. 봉사자는 늘어나는 추세인가.
“성인봉사자는 2008년 6만5800명에서 작년 12만6000명으로 늘었다. 또 RCY 단원이 24만명이다. 이밖에 260만명의 헌혈자와 적십자 회비를 내주는 500만명의 국민이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해 2016년까지 성인봉사자를 16만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RCY 단원과 합하면 봉사자가 50만명을 넘어서 전체 국민의 1%에 달하게 된다.”
―아동, 노인, 다문화가족, 북한이주민 등 4대 취약계층에 대한 통합지원을 하는 ‘희망풍차 프로젝트’는 성과를 내고 있나.
“작년 7월에 희망풍차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자원봉사자와 지원대상자 간 결연을 통한 지원 프로그램이다. 우리는 ‘국민과 함께 하는 적십자의 새로운 희망 만들기’로 정의한다. 자원봉사자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방문해 기초생활보장·의료·교육·주거 등을 통합 지원하는 희망풍차 프로그램의 경우 지원대상 결연 가정이 작년 말에 2만가구로 늘었다. 올해는 2만2600가구, 2016년에 3만가구로 늘릴 계획이다.”
―많은 일을 하려면 예산 확보가 관건인데.
“작년에 국민 500만명이 518억원의 회비를 냈고 정기 후원회원이 112억원을 냈다. 전체 세입 1468억원의 43%가 회비 수입으로 조성된다. 적십자회비는 액수가 늘고 있지만, 회비를 내는 회원 수는 조금씩 줄고 있다. 앞으로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봉사를 진실하게 함으로써 정기후원자를 늘려나갈 생각이다. 이를 위해 먼저 봉사자들이 사랑과 봉사의 소금이 돼 대한민국에 진정한 나눔 문화의 맛을 내자고 강조하고 있다.”
―‘300만 헌혈 캠페인’을 벌이고 있지만 인구 고령화로 헌혈을 늘리기가 쉽지 않을 텐데.
“현재 헌혈로 병원 수혈은 충당하지만 의약품용 혈액은 외국에서 수입하고 있다. 매달 13일을 헌혈의 날로 정하고 헌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홍보활동을 하고 있다. 올해 전국 100대의 헌혈버스와 136곳의 헌혈의 집을 확대 운영할 계획이다.”
―다문화가족 지원은 어떻게 하고 있나.
“다양성은 창조의 시작이다. 우리 국민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봤을 때 배척하기보다 존중하고 포용하는 것이 새로운 창조와 화합의 정신이 될 수 있다. 다문화가족 지원센터 두 곳을 운영하고 있다. 희망풍차 외에 RCY의 멘토링 사업도 있다.”

“명절이나 어버이날에는 이산가족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이산가족이 고령이어서 한 해 3000여명이 돌아가신다. 안타까운 일이다. 작년에 두 차례에 걸쳐 이산가족 상봉을 협의하기 위한 남북적십자 실무접촉을 북측에 제의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올해는 추석 때나 그 전에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으면 한다. 국제적십자사연맹 등을 통해 다리를 놓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아울러 이산가족이 북한의 가족에게 전할 영상편지를 제작하고 있다. 작년에 800여편을 만들었고 올해는 5000편 정도를 제작할 예정이다.”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 사업도 벌이는데.
“박근혜 대통령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강조하면서 인도주의적 지원에는 항상 열려 있다고 얘기한다. 정치적 상황 때문에 남북관계가 굳어져도 멈추지 않고 시그널을 보낸다고 생각한다. 평양에는 IFRC 사무소가 있다. 이곳을 통해서라도 유아·산모 등 취약계층에 대한 분유·의약품 지원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올해는 RCY 창립 60주년이다. RCY의 성과에 대해 말해 달라.
“RCY가 창립되고 처음 한 일이 임시수도 부산에서 우정의 나무 심기였다. 지난 4월 강원도 고성의 비무장지대(DMZ) 인근 민통선의 지뢰를 파낸 자리에 나무를 심어 생명·미래·평화의 숲을 조성했다. 언젠가는 북쪽으로 올라가 ‘푸르게 가꾼 국토로 하나 되기’ 차원의 나무 심기를 계속할 것이다. 청소년들이 역사의 사명을 깨닫고 세계적 안목을 지닌 글로벌 인도주의 리더로 성장할 수 있게 하겠다.”
―해외 개발협력 사업에도 활발히 참여하는데.
“우리나라가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바뀌었다. 국제사회가 경이롭게 여긴다. 한적은 아프리카·아시아의 개발도상국에서 워터빌(Waterville) 프로그램을 벌이고 있다. 수자원 개발, 식수 공급과 위생교육을 병행해 ‘건강한 물의 마을’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베트남에서는 결혼이주 여성을 위한 사전교육과 고엽제 피해자 생계지원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첫 여성 한적 총재인 데다 여성 대통령 시대다. 여성 리더십에 대한 소신을 말해 달라.
“리더십은 권력·권한이라기보다는 영향력이다. 리더십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봉사라고 생각한다. 여성 리더십은 정직성·진실성으로 다가가 소통의 장을 만들고 경청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서 공감이 형성된다. 그 공감이 에너지로 나오는 것이 협력이다. 공감으로 참여를 유도하면 감동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리더십이 땅에 심어져 열매를 맺기까지 리더는 인내와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이 여성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여성 대통령 시대가 열린 데 대해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참 반가웠다. 약속과 신뢰를 지키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분이다. 유기적인 협력과 네트워킹이 잘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나눔의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나눔은 채움이라고 본다. 자기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나눔이다. 상대방의 아픈 마음을 같이 느끼면 안목과 가치를 넓히는 기초가 된다. 소금같이 되는 마음으로 봉사를 하면 생명의 활력을 얻게 된다. 거기서 나오는 행복은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생수와 같은 것이다.”
―적십자정신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존중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쟁과 성공이 아니라 우정과 이해, 협력, 평화를 이뤄 나가는 것이다. 그 정신으로 돌아가면 지쳤던 육체도 힘이 난다.”
―앞으로의 계획은.
“희망풍차 프로젝트가 잘 뿌리 내리게 하겠다. 자원봉사자 훈련이 잘 이루어져 자긍심을 갖고 일하도록 하고, 청소년에게는 글로벌 인도주의 리더로 성장할 수 있는 훈련의 장이 되도록 하겠다. 무엇보다 3300명 적십자사 직원들이 협력해 감동을 만들어내는 데 힘을 보태겠다.”
사진=남정탁 기자
한적 첫 여성 수장 유중근 총재
▲1944년 서울 출생 ▲경기여고, 이화여대 영문학과 졸업, 미국 컬럼비아대 영어교육학 석사 ▲김활란장학회 감사, 이화학당 감사, 경기여고 총동창회장, 대한적십자사 여성봉사특별자문위원장·부총재 역임 ▲현재 경원문화재단 이사장
▲1944년 서울 출생 ▲경기여고, 이화여대 영문학과 졸업, 미국 컬럼비아대 영어교육학 석사 ▲김활란장학회 감사, 이화학당 감사, 경기여고 총동창회장, 대한적십자사 여성봉사특별자문위원장·부총재 역임 ▲현재 경원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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