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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시진핑 시대 열 주역들] ② 리커창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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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1-09 23:37:31 수정 : 2012-01-09 23:3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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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최고 경제과학상 받은 박사 출신
공청단 ‘좌장’ 후진타오 후광 한몫
허난성 경제 살리며 입지 굳혀
지난 6, 7일 베이징에서 향후 5년간 중국 금융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금융공작회의가 열렸다. 신화통신 등 관영매체들은 이 소식을 전하면서 회의장에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를 따라 리커창(李克强) 부총리가 입장하는 사진을 부각시켰다. 리 부총리가 내년 3월 원 총리의 자리를 이어받을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지난해 10월 하순 리 부총리는 닷새 사이에 남·북한을 번갈아 방문했다. 그는 이 방문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및 후계자 김정은을 비롯한 남·북한 핵심 실세를 만나며 사실상 국가원수급 환대를 받았다. 미래권력 리커창의 위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리커창 부총리
리 부총리는 그 이후에도 허베이(河北)성 서민주택 시찰과 베이징시 질병예방센터 방문 등 왕성한 민생·경제 행보를 이어갔다. 그는 2004년 12월 랴오닝(遼寧)성 당서기로 부임하자마자 한 달 사이 중소도시 17곳과 선양, 다롄 등을 방문할 정도로 현장을 챙기는 정치가로 정평이 나 있다.

리 부총리는 중국 지도자로는 보기 드물게 박사 학위를 소지한 학구파이기도 하다. 그는 베이징대 경제학 석·박사 과정 시절 ‘중국 경제의 3원 구조를 논함’이라는 논문으로 1991년 중국 경제학계의 최고상인 ‘쑨예팡(孫冶方) 경제과학상 논문상’을 받았다.

이러한 재능에다 정치적 스승인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후광까지 더해지면서 리커창은 중국 정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리커창은 1983년부터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중앙서기처에서 중앙학교부 부장을 맡으면서 공천단파의 좌장인 후 주석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당시 7년간 가까운 거리에서 후 주석과 함께 일했고 사석에서 서로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해졌다고 한다.

리커창은 1993년 38세에 공청단 제1 서기(장관급)에 뽑혀 ‘최연소 장관’ 기록을 세웠다. 45세와 47세 때에는 각각 허난(河南)성 성장과 당서기로 발탁되며 최연소 성장·당서기 기록도 갈아치웠다. 당시 중국 매체들은 ‘내일의 별’, ‘가장 어린 성장’, ‘최초의 박사 성장’이라는 표현을 동원하며 그의 행보에 주목했다.

지난해 10월 23∼24일 북한을 방문한 리커창(가운데) 중국 부총리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사이에 앉아 기념촬영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리커창은 1998년 당부서기로 시작해 2004년 당서기를 끝으로 허난성을 떠날 때까지 낙후된 농업에 기대던 허난성의 경제를 확 바꿔놓았다. 이 기간 허난성의 지역 총생산은 4308억위안(약 79조5170억원)에서 8554억위안(약 1578897억원)으로 두 배 늘어났고 전국 31개 성 가운데 21위였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도 16위로 올라왔다. 리커창은 이어 랴오닝성 당서기로 자리를 옮겨 동북 진흥의 중책을 수행했다. 이 시절부터 그는 ‘리틀 후’로 불리며 유력한 차기 국가주석 후보로 거론됐다. 

리커창 중국 부총리(오른쪽 두 번째)가 6일 베이징에서 열린 금융공작회의장에 원자바오 총리(오른쪽)를 따라 입장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거칠 것 없던 황태자 리커창에게도 불운이 찾아왔다. 예상과는 달리 2007년 10월 제17차 당 대회에서 리커창은 권력 서열 7위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입성해 6위인 시진핑(習近平)의 벽을 넘지 못했다. 당시 정가에서는 공천단파의 경쟁세력인 상하이방과 태자당이 후 주석의 독주를 막기 위해 리커창 견제에 나섰다는 분석이 많았다. 후 주석의 후광이 양날의 칼이었던 셈이다. 이후 리 부총리는 2009년부터 의료개혁영도소조 조장을 맡았으나 공익성에 집착하다 성과도 없이 막대한 예산만 축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급기야 왕치산(王岐山) 부총리가 리커창을 제치고 총리직을 맡을 것이라는 설도 흘러나왔다.

그러나 리 부총리는 2010년 초부터 다시 경제구조 전환과 부동산 및 거시경제 정책을 주도하면서 지도력 위기를 극복했다는 평가가 많다. 베이징 정가에서는 리 부총리가 명석한 두뇌와 탁월한 행정 력에다 후 주석의 계승자라는 풍부한 정치적 자산까지 겸비한 점에 주목해 시진핑 부주석과 더불어 향후 10년간 중국을 쥐락펴락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베이징=주춘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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