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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성폭력' 솜방망이 처벌… <하> 인권유린 방조 ‘침묵의 카르텔’

입력 : 2011-10-05 04:37:33 수정 : 2011-10-05 04:3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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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시설 이름만 바꿔 버젓이 운영… 지자체도 “대안 없어” 팔짱
강원도 원주시내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국도변에 있는 C시설. 건물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쉽게 눈에 띄지 않는 데다 인기척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한 그곳은 2008년 장애인 학대와 시설 운영비 횡령 등이 적발됐던 지적장애인 생활시설이다. 

4일 세계일보 취재팀이 확인한 결과 그곳은 노인장기요양시설로 이름만 바꿨을 뿐 버젓이 운영 중이었다. 오히려 시설 관계자는 “학대 혐의로 기소된 현 소유주의 재판이 진행 중” 이라며 “노인시설로 새롭게 출발하려 하는데 과거 일이 알려지면 곤란하다” 며 곤혹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깃털만 뽑아내고 몸통은 그대로…

과거 인권유린이나 비리가 드러났던 장애인생활시설 상당수가 이름과 형태만 바꿔 ‘이미지 세탁’을 한 뒤 버젓이 사회복지사업을 운영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재원 부족으로 시설 폐쇄를 꺼리는 중앙·지방정부와 ‘그런 시설이라도 있어야 장애인을 쉽게 격리할 수 있다’는 사회, ‘다른 갈 곳이 없다’는 장애인 가족 등이 만들어낸 ‘침묵의 카르텔’이 시설 생활 장애인들에 대한 인권침해를 뿌리 뽑지 못하고 있다.

현행 사회복지사업법과 장애인복지법에 따르면 보건복지부장관이나 구청장 이상 지방자치단체장은 사회복지법인이나 개인이 설치·운영하는 시설에서 인권침해 등 불법·부당행위가 발생했을 때 시설장 교체나 시설폐쇄 등을 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권한을 강하게 행사하는 경우는 드물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4월 폭행, 차별 등을 이유로 시설폐쇄 권고를 내린 전북의 S시설은 지금도 정상 운영 중이다. 관할 지자체가 ‘수사, 재판 결과가 나와야 행정조치를 할 수 있다’며 폐쇄를 미루고 있는 탓이다. 전북시설연대 김병용 활동가는 “재판이 끝나려면 수년이 걸리는데 그때까지 방치하는 건 부당하다”며 “지자체가 행정소송 부담을 핑계로 권한 행사를 미루고 있다”고 지적했다.

2007년 성폭행과 횡령 사건이 발생한 전남 목포 농아원은 시설장 조모씨가 자진사퇴한 뒤 재단 이사장이자 조씨 남편인 이모씨가 시설장으로 앉았다. 관할 시청은 보조금을 환수하고 재발방지대책을 확인하는 선에서 사태를 봉합했다. 이곳은 정림원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됐으나 1년 만에 다시 폭행 사건이 발생해 결국 폐쇄됐다.

지자체가 시설을 폐쇄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뒤늦게 폐쇄조치를 강행해도 실제 폐쇄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

법인 이사장 부부가 성폭행과 시설 운영비 횡령 등을 저질렀던 전북 영광의 집은 2007년 7월 문제가 처음 드러났지만, 관할 시가 폐쇄명령을 내린 건 1년이 훌쩍 지난 2008년 말이었다. 법인의 핵심 인사들이 수사와 재판으로 불려다니면서 시설 운영은 원활하지 않았고, 그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생활인들에게 돌아갔다.

◆갈 곳 없는 장애인들… 2차 피해 우려


장애인들은 상시적인 보살핌과 관리가 필요하다. 문제는 이들의 보호자가 학대나 성폭행 등 인권유린 행위를 자행했을 때 마땅히 갈 곳이 없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인권을 유린당한 이후에도 가해자와 함께 생활하면서 ‘2차 피해’ 가능성에 그대로 노출되는 게 현실이다.

지적장애인 A양은 만 9살 때부터 할아버지, 작은아버지, 큰아버지에게 수년간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 하지만 법원은 가해자 모두에게 “부모를 대신해 피해자를 키워 왔고, 피해자의 정신장애 정도에 비춰 앞으로도 가족의 도움이 필요하다”면서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장애인 범죄 피해자에 대한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탓이다. 장애인도 범죄피해자보호법에 따라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거주 요건이 ‘보복 우려가 있을 때’로 한정돼 시설 입소가 까다롭다. 장애여성 전용쉼터는 전국에 3곳, 수용 가능인원도 40명에 불과하다.

민병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장애인상담소권역 대표는 “지역사회와 정부가 여성장애인 중 방치된 장애인을 찾아내 보호할 수 있는 ‘공동체 돌봄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며 “피해자와 가해자를 격리하려면 피해자가 쉼터를 나온 이후 대책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전·현직 시설장들이 장애인 상습 폭행·횡령 등 혐의로 형사처벌된 뒤 이름을 바꿔 운영 중인 장애인 복지시설.
시설 생활장애인들도 상황이 비슷하다. 2007년 횡령과 성폭력 사실이 드러났던 경기도 희망맹아원은 취재팀 확인 결과, S시설로 이름만 바뀐 채 운영되고 있었다. 관할시가 행정조치를 했으나 시설장을 교체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시 관계자는 “18명의 생활인 중 성폭력 피해자 2명은 바로 이관조치하고 다른 2명은 퇴소했으나, 갈 곳이 없었던 14명은 잔류를 희망해 폐쇄조치를 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인천의 행복이 가득한집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관할구청이 인권위 권고를 받아들여 행정조치에 착수하면서 20명의 생활인은 곧바로 다른 시설로 거처를 옮겼지만, 나머지 6명은 시설장에게 유죄 판결이 나 시설이 완전히 폐쇄될 때까지 남아 있었다. 이 과정에서 장애인 부모들은 문제를 제기했던 지역 시민단체들을 찾아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면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돌봐야 하는데, 왜 고발을 해서 문제를 만드느냐”며 격렬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인천 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종인 간사는 “인권침해가 발생하면 법원 판결이 나기 전에 일단 가해자와 분리조치를 해야 하지만, 피해자가 갈 곳이 없다는 이유로 가해자랑 계속 같이 생활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며 “정부나 지자체가 임시보호시설을 운영하고 장애인들 자립이 가능하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태영·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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