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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 교수의 일본을 보면 한국이 보인다] 화재이야기 1

관련이슈 심훈 교수의 일본을 보면 한국이 보인다

입력 : 2010-12-22 21:36:35 수정 : 2010-12-22 21:3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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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가 일상다반사 ‘오명’… ‘소실과 재건축’ 도돌이표 ‘타워링’이란 미국 영화가 있었다. 1974년 개봉된 작품으로 연기파 배우 폴 뉴먼과 스티브 맥퀸이 함께 출연해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윤 극대화를 위해 규격 미달품을 사용한 건축주의 탐욕으로 140층짜리 초고층 빌딩에 누전이 발생하면서 종국에는 엄청난 비극을 야기한다는 내용이 영화의 줄거리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흥행 돌풍을 일으키며 그해 전미(全美) 박스 오피스 1위를 기록한 ‘타워링’은 우리나라에서도 서울 관객 42만명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해낸 바 있다. 후에 밝혀진 이야기지만 ‘타워링’을 감독한 존 길러민과 어윈 알렌은 한국의 ‘대연각호텔 화재’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한국인들 사이에서 더욱 회자되기도 했다. 1971년 서울 충무로 대연각 호텔에서 발생한 화재는 사망 163명, 부상 63명이라는 피해 규모가 말해주듯 우리 나라 건국 이래 최대의 화재 사건이었다. 크리스마스 아침인 12월25일 발생한 화재는 10시간 가까이 TV로 생중계됐으며, 사람들이 아우성치다 고층 호텔에서 지상으로 떨어지는 지옥도가 안방까지 그대로 전달됐다.

◇1657년의 메이레키(明歷) 화재를 상세히 기록한 ‘무사시아부미’에 실린 그림. 현재 도판은 도쿄 도립중앙도서관에 있다.
출처:소방방재박물관 홈페이지
안타까운 사실은 한국인들에게 있어 가장 악명 높은 대연각 호텔 화재조차 재난 왕국 일본에선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열도의 역사 자체가 화재와 진화, 발화(發火)와 방화(防火), 소실(燒失)과 재건축의 도돌이표인 까닭에서다.

일전에 일본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네 가지로 지진과 벼락, 화재와 아버지를 언급한 바 있다. 오늘은 그 세 번째에 해당하는 ‘화재’ 이야기다. 사실, 화재는 일본인들의 삶 속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요악으로 존재해 왔다. 오죽 화재가 많았으면, 화재 다반사가 일상 다반사였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일까.

 
◇영화 ‘타워링’의 광고 포스터. 미국에선 1974년 개봉했음에도 한국에선 여러 이유로 3년 뒤인 1977년에야 개봉됐다. 당시 초호화 캐스트로도 화제를 모은 ‘타워링’은 당해 국내 흥행성적에서도 2위를 차지할 만큼 성공한 작품이었다.
‘일본재이사’(日本災異史)라는 책을 쓴 코시카 시마하테(小鹿島果)에 따르면 고대 이래 1865년까지 발생한 열도의 화재 가운데 역사적으로 기록할 만한 대형 화재는 무려 1463건에 달하고 있다. 코시카 시마하테는 또 게이초(慶長)를 연호로 쓰기 시작한 1590년대 이후부터 따져 보아도 역사에 기록될 만한 대형 화재가 779차례나 발생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필자를 경악하게 하는 것은 그러한 기록을 일일이 남겨놓은 일본인들의 철저함과 집요함에 있다. 얼마나 화재에 대한 피해의식이 심했으면 수백건 이상의 기록들을 청사(靑史)에 빠짐없이 남겨놓았을까 싶은 이유에서다. 하지만 대화재의 피해 규모를 찬찬히 들여다 보노라면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재난사에 절로 고개가 끄떡여진다.

일본의 대도시 가운데 일왕이 거주하는 데다 문화재도 많아 화재 발생이 가장 적었던 쿄토(京都)에서도 1708년 3월 대형 화재가 발생해 황궁과 가신(家臣), 무장(武將)들의 집을 전소시키며 364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당시 소실된 가구 수는 무려 1만3051개. 하지만 22년 뒤인 1730년 6월 다시 화재가 발생하면서 이번에는 132개 마을, 3858가구가 소실되고 808명이 사망하는 비극을 낳는다. 그러고 보면 1788년 1월에도 대형 화재가 발생, 이틀간에 걸쳐 1424개 마을에서 3만6797가구가 전소돼 백성들이 그 어느 해보다 추운 겨울을 보내게 된다.

문제는 교토의 사정이 오사카(大阪)나 도쿄(東京)에 비하면 훨씬 양호했다는 것.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하며 대도시를 형성했던 오사카의 경우 십 년이 멀다 하고 발생하는 대형 화재로 시민들은 숱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피해가 컸던 화재로는 1716년 3월 하순에 발생한 묘우치야케(妙知燒) 대화재를 꼽을 수 있다. 당시 오사카 전 지역의 약 3분의 1이 피해를 입는 참사로 408개 마을이 소실됐으며 사망자도 300여명에 달했다. 화재 참사는 이후에도 끊이지 않아 19세기 말인 메이지(明治) 시대만 하더라도 1875, 1880, 1881, 1884년에 각각 대화재가 발생했다.

◇화재가 일상 다반사로 발생했던 에도(江戶)의 트라우마는 지금도 도쿄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진은 일정한 간격으로 시내 곳곳에 설치된 방화용 소화기. 일반인들이 함부로 열지 못하도록 봉인한 종이가 이채롭다.
쿄토와 오사카가 화마(火魔)에 시달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화재 다반사의 중심지는 단연코 에도(도쿄의 옛 지명)였다.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화재는 1601년 11월 초, 지금의 니혼바시 근처에서 발생한 것으로 당시 막부에서는 초가집이 화재를 키웠다고 보고 송판 지붕을 민가에 적극 장려하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반세기 뒤인 1657년, 토쿠가와 막부 자체를 파멸시킬 정도의 초대형 화재가 에도를 덮친다. 이른바 메이레키(明歷) 대화재로 알려진 ‘후리소데 화재’가 그것. ‘후리소데’란 일본식 긴 옷을 일컫는 말로 에도 본묘사(本妙寺) 스님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어린 소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태운 공양물이었다. 한데, 후리소데를 태우던 불이 본당에 옮겨 붙더니 순식간에 에도 중심부로 번지는 바람에 수도의 75%가 파괴되는 횡액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에도는 80여일간 비가 오지 않아 매우 건조한 상태였는데 마침 북서풍까지 강하게 불어 닥치면서 온 수도가 불길에 휩싸여 버렸다. 얼마나 피해가 컸던지 도시 재정비를 꿈꾸는 에도 막부가 일부러 불을 놓았다는 음모설마저 돌았다. 어쨌거나 한겨울인 1월18일에 발생한 이 화재로 1만석 이상의 농토 500개가 불에 타버렸으며, 사망자는 무려 10만7046명에 달했다고 당시의 참화를 기록한 역사서 ‘무사시아부미’는 증언하고 있다.

이 밖에도 1772년의 화재와 1865년의 화재 역시 수천명의 인명을 살상한 재난으로 악명이 높다. 그런 와중에 1806년 발생한 화재 참사에서는 다음날 호우가 쏟아지며 홍수까지 발생, 불 타 죽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12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렇게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에도에 막부를 세운 1603년 이후, 열도의 수도에서 발생한 주요 화재는 200건을 훌쩍 넘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근대의 에도사(江戶史)는 화재사(火災史)나 매한가지다. 오죽했으면, ‘화재와 싸움은 에도의 꽃’이라는 속담까지 생겨났을까.

다음에는 세계 최고의 화재 왕국이 될 수밖에 없었던 열도의 숙명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고 한다. 더불어 일본인들은 이 같은 악조건에 어떻게 맞서며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도 곁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shimh@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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