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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무기 이야기] <2> 자주국방의 신호탄 ‘백곰’ 유도탄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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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10-06 00:56:18 수정 : 2010-10-06 00:5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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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전쟁억지 등 목적…“4년안에 끝내라” 하달 “76년까지 장거리 유도탄을 개발하라.”

1971년 12월27일 국방과학연구소(ADD) 창설 멤버로 로켓연구실장이던 구상회(75) 박사는 청와대 오원철 경제수석으로부터 급히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청와대에서 오 수석이 구 박사에게 내민 것은 놀랍게도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메모였고, 메모지 서두에는 빨간 잉크로 ‘極秘’(극비)라고 씌어 있었다. 내용은 ‘국과연은 국방부의 명령을 받는 즉시 지대지 유도탄 개발계획을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하고 공군은 유도탄 개발 이후의 작전운영계획을 수립, 대통령께 보고할 것’이었다.

◇국방과학연구소(ADD)가 미국의 나이키 허큘리스(Nike Hercules·NH) 미사일을 모체로 1974년 개발에 착수해 4년 만에 시험·발사에 성공한 한국형 중거리 유도탄 ‘백곰’(NHK-Ⅰ).
ADD 제공
이듬해 4월14일 국방부는 “북한의 기동공격무기를 효과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단거리 전술 지대지 유도탄을 1974년 말까지 개발·생산하고, 1976년까지 북한의 주요 군사기지를 단시간 내에 파괴·무력화할 수 있는 장거리 지대지 유도탄을 개발하라”고 국과연에 지시했다. 이 지시는 보안상의 이유로 ‘항공공업 육성계획’이라는 위장사업명을 달아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핵탄두 개발과 더불어 급속도로 발전해온 유도탄은 그 성능이 하루가 다르게 개량되고 있었다. 유도무기는 무기체계의 핵심이 됐을 뿐 아니라 현대전을 과학기술전쟁으로 바꿔 놓았다. 특히 장거리 지대지 유도탄은 적 후방에 위치한 전쟁지휘본부 등 전략 표적을 직접 타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쟁을 억지하는 주요 무기체계가 됐다.

당시 군사전문가들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할 경우 예상되는 북한의 공격 양상을 1967년 중동의 ‘6일전쟁’이나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처럼 전폭기, 기계화 부대, 유도탄 및 고속정을 총동원한 ‘단기 속도전’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아울러 1968년 1월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과 그 해 10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으로 남북 간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데다 월남전 등으로 자주국방이 절실히 요구되던 때였다. 전쟁억지력을 지닌 정밀 전술·전략 타격무기 확보에 눈길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암담했다. 미국 지원을 받아 소총(M-16) 생산공장을 지을 정도로 가내수공업 수준을 면치 못하던 시절에 현대 정밀무기체계의 꽃이라 불리는 유도탄 개발은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었다. 당시 한국군은 쏘면 포탄처럼 날아가는 비(非)유도 로켓탄인 ‘어니스트 존’(Honest John) 1개 대대를 보유한 게 고작이었다. 1964년과 1966년 미국으로부터 구입한 ‘호크’와 ‘나이키 허큘리스’ 지대공 유도탄이 있긴 했지만 미국 승인 없이는 부품 하나도 손댈 수 없던 터라 소총처럼 ‘역설계’를 통한 제조는 꿈도 꾸지 못했다.

구 박사는 당시를 떠올리며 “3.5인치 로켓탄도 못 만들어 쩔쩔매던 판국에 사거리 200㎞의 지대지 유도탄을, 그것도 4년 안에 개발하라는 것은 무모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대통령이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고 말했다. 자주국방의 신호탄으로 불리는 ‘백곰’(NHK-Ⅰ) 유도탄 개발은 그렇게 ‘맨땅’에서 시작됐다.

박병진 기자 공동기획 국방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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