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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현 기자의 대중과 소통하는 학자들] <36>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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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10-19 17:20:45 수정 : 2009-10-19 17: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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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자존심 지켜줄때 소통 길 열려”
◇서울 시내의 한 모임에서 강연을 끝낸 하지현 교수는 “우리 사회가 좀 더 다양성을 존중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그에게 사회 진보의 의미는 다양성이 확보되고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다. 그는 “사회가 제대로 발전하면 개인의 삶은 건강해질 수 있고, 구성원들 간에는 도와주는 삶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1979년 2월 촉망받던 영화감독 하길종이 38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영화계는 ‘바보들의 행진’을 비롯해 7편의 영화를 제작한 그를 천재 감독으로 기억한다. ‘속 별들의 고향’(1978)과 ‘병태와 영자’(1979) 등 그가 남긴 작품들은 우리 영화 발전에 소중한 밑거름이 됐다. 이달 초순 부산국제영화제는 그의 사망 30주년을 기념하는 회고전을 마련했다.

그를 추억하는 모임에는 유족들도 함께했다. 그가 남긴 유일한 2세가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다. 하 교수는 정신과 전문의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회고전에 참석할 당시 교통체증으로 조바심을 냈던 그의 솔직한 고백이 재미있다. 병원에서 외래 진료를 끝내고, 자가용을 몰고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가족을 태우고 올림픽대로를 달리는데, 어느 지점에서 교통체증이 심했다. 꽉 막힌 도로에서 예정된 시간에 공항 도착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 순간 ‘나쁜 기대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차라리 사고가 나서 이곳만 차가 막힌 것이라면….”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었다. 기대대로 어느 지점을 지나자 차들이 잘 움직였다. 도로의 경찰차가 사고를 증명하고 있었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운이었다.

“시간에 맞춰 공항에 가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는 잊어버린 것이지요.” 그의 고백에서 주말이나 명절 때 막히던 차가 일시에 풀려 안도했던 기억들이 불거져 나왔다. “아, 사고 때문이었네, 그래서 막혔구나.” 운전을 하는 이들이라면 이런 말들을 제법 했을 것이다. 몰린 차량 때문이 아니라, 사고 때문에 특정 지역에서만 차가 막혔다는 사실을 기뻐했던 말들 말이다. ‘나’의 불편이 줄어든다면, 무의식 중에 다른 사람의 불행을 용납하는 것은 어떤 심리일까.

하 교수는 이러한 태도는 “지친 도시인들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라며 “속 깊이 내면을 들여다보고 스스로 위로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외래 진료와 각종 강연으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그를 이달 중순 서울 시내에서 만났다. 도시인의 심리를 파악하기 위해 그가 사용하는 방법은 현미경식 접근법.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을 아우르는 현미경 접근법으로 도시 곳곳을 들여다보는 게 중요해요. 그래야 제대로 처방전도 쓸 수 있거든요.”

도시인은 고독하다. 일사불란하고 활기차게 움직이는 도시인의 모임에서도 그는 고독이라는 키워드를 끄집어낸다. 모임을 활기차게 이끄는 리더일수록 혼자서는 고독해 한다. ‘전문가의 현미경’은 미세한 부분까지 찾아낸다. 그의 비유가 설득력이 있다.

“북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떼는 삼각형 대열을 유지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입니다. 기러기떼의 삼각형 대열이 그들의 본성인 것은 사실이지요. 하지만, 맨 앞에 날아가는 기러기의 고독, 중간에 처져서 허덕이는 기러기의 우울함,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 전전긍긍하는 젊은 기러기의 충동성을 우리는 놓치지요. 이런 모습을 망원경으로 파악할 수는 없어요. 하나하나 살펴봐야 그 내밀함을 알 수 있지요.”

고독해서일까. 이를 피하기 위해서인지 현대인들은 우울증이나 인터넷 중독을 심하게 앓는다. 하 교수는 “‘아이들이 인터넷을 오래 하면 중독이다’는 식으로 일반화의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인터넷 중독이 사회적 문제인지에 대한 판단을 쉽게 내릴 수는 없습니다. 인터넷 중독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분명히 ‘세대 차이’ 문제가 도사리고 있어요. 인터넷은 20대 안팎의 현대인이 가장 자주 접하는 매체이지만, 50대 이후 장년에게는 아직 생소한 도구이거든요. 그런데 이를 기성세대의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문제점이 더 많아 보이는 거예요. 세대 간의 대화와 공감이 필요한 부분이지요.”

텔레비전의 경우와 비교하면 이해가 쉽다. 인터넷보다 더 오래 비판을 받았던 게 TV다. TV는 ‘바보 상자’나 ‘가족 간 대화 단절 야기’ 등으로 비판받았지만, 한 세대 이상 걸려 수용 과정을 거쳤다. TV는 차분히 적응 과정을 거칠 수 있었지만, 고작 10년 남짓한 기간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터넷 사용에는 그런 과정 자체가 없었다.

하 교수는 현대 도시인들이 떠밀려서 변신과 욕망을 드러낸다고 설명한다.

“많은 도시인이 욕망과 환상에 사로잡혀 있어요. 많은 여성들이 코를 조금 높이기만 하면 인생이 달라질 거라고 믿고 성형수술을 거듭하고 있어요. 변신과 변화가 자신을 살릴 것이라는 믿음에서 하는 행동이지요. 법을 어겨서라도 욕망을 채우겠다는 이들도 늘고 있어요. 불안한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의 고민이기도 하지만, 동물적 본능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떼인 돈 찾아드립니다’라는 플래카드는 그 정점이지요. 돈이라면 모르는 사람의 복수심을 자극해도 좋다는 생각에서 나온 광고입니다.”

외래 진료가 있는 날이면 그는 하루에 30명 이상의 환자를 대한다. 하 교수에게는 환자를 대하는 철칙이 있다.

“환자가 받아먹어서 체하지 않을 정도만 이야기합니다. 받아먹을 수 있는 수준으로 치료법을 던져놓아야 하는 게 의사의 임무이지요. 제일 힘든 환자는 자신감이 너무 없는 환자예요. 환자가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도 큰 문제이지요.”

그런 점에서 그는 ‘병원 만능주의’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정신과 영역에서도 환자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것은 간과하기 힘든 진리다. 그렇다면, 언제 병원을 찾아야 할까. 생리적 변화와 집중력 감퇴가 확인될 때다. 수면과 식욕, 성욕에 큰 변화가 있다면 신체나 정신에도 문제가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인지능력과 집중력이 발휘되지 않을 때도 의사의 조언을 구할 적기라고 그는 강조한다.

‘마음의 감기’인 우울증을 피하기 위해서는 평상시에 다양한 취미 생활을 즐길 필요가 있다. 하 교수는 한 달에 50만원 정도를 들여 다양한 책을 구입한다. 책에는 전공 책도 들어있지만, 만화와 편하게 읽는 실용서들도 다수 포함된다. 굳이 시간을 내서 영화관을 찾거나 집에서 옛 영화를 보기도 한다.

도시인의 심리 상태에 관심이 높은 전문가답게 그는 간혹 사회와 경제현상에 대한 예상을 적중하기도 한다. 영상통화가 가능한 휴대전화 사업 전망이 밝지 않다는 예언 적중도 그 중의 하나다.

“현대인이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영상통화 관련 사업이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지요. 우리를 되돌아보면 알 수 있어요. 광장에 나가 적극적으로 발언하지만, 자신만의 공간에 대한 갈증도 간절하거든요. 이 차원에서 광장과 원룸도 동시에 발전하게 됩니다.”

하 교수에게는 꿈이 있다.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좀 더 행복하게 생활하기를 바란다. 그런 사회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세상의 다양한 분야를 접해오고 있다. 하 교수는 1967년 미국에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미국 UCLA에서 영화학을 전공하고 있었으며, 1년 뒤 귀국했다. 영화감독이었던 아버지의 대를 이을 생각은 없었을까.

“영화에 대한 특별한 갈증은 없었어요. 작은아버지(영화감독 하명중)와 사촌들이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이를 특별하게 부러워한 적은 없어요. 저는 오히려 만화에 매력을 느꼈어요. 제 최고의 취미는 만화고, 도서 지출비 최대 지출 분야도 만화일 정도예요.”

인터뷰를 끝내고, 하 교수와 저녁 자리를 같이하면서 출판계 인사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는 전문서평지인 ‘출판저널’과 ‘기획회의’를 구매하고 읽을 때 흥분한다고 고백했다. 그는 “출판사를 열어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고 했지만 “내가 술을 좋아하지만 술집을 열 필요는 없는 것 같다”는 말로 갈망을 접었던 과정을 설명했다.

소통에 관한 한 하 교수는 ‘도사’다. 소통하고 싶은 한국인이라면 일단 상대방의 자존심을 살려줘야 한다. 하 교수는 “한국 사람 대부분은 자신을 평균적 인간보다 낫다고 여긴다”며 “자존심을 지켜줄 때 소통의 길이 열린다”고 설명한다. 가능하다면 체면을 지켜주고, ‘정(情)’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명확한 의사표현으로 대화를 하는 서양인들과 달리, 한국인은 대화를 할 때 체면과 정에 좀 더 의미를 찾기 때문이다.

bali@segye.com

■하지현 교수는

건국대 의과대학 교수. 1967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으며, 1년 뒤부터 서울에서 성장했다. 서울대 의대 졸업 후, 같은 대학에서 박사 학위 취득. 서울대학교병원 신경정신과와 용인정신병원 정신의학연구소에서 근무. 캐나다 토론토 정신분석연구소 연수. 한국정신분석학회 편집위원과 기획이사, 한국정신신체의학회 학술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일상생활과 맞닿은 심리학에 관심을 두고 있다. ‘부부의 속마음’과 ‘비즈니스 심리학’처럼 일반인의 삶에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하고 있다.

●저서

‘도시심리학’ ‘소통의 기술’ ‘관계의 재구성’ ‘당신의 속마음’ ‘통쾌한 비즈니스 심리학’ ‘전래동화 속의 비밀코드’ 등.

●역서

‘커뮤니케이션의 기술’ ‘갈등 해결의 기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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