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32) 조선시대 화폐 이야기

17세기 전란 후유증 극복·국가재건 위해 각종 경제정책 전개
숙종 상평통보 주조 전국에 유통… 광산 개발·상업 발달 촉진
18세기 들어 부익부 빈익빈 현상 초래… 이익 폐전론 주장도

최근 새로 발행할 5만원권 화폐의 주인공 신사임당이 공개되었다. 이르면 5월 중에는 시중에 유통이 된다고 한다. 5만원권은 한국화폐사에서 가장 큰 액수이다. 1973년 1만원이 대졸 초임(4만5000원)의 약 5분의 1이었다고 하니, 5만원의 가치가 예전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수십년간 그 지위를 이어온 1만원권을 몰아내고 중심 화폐로 떠오를 것은 분명하다. 우리 역사에서도 수차례 화폐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조선전기까지는 실제 유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화폐로서 본격적으로 기능을 한 것이 바로 상평통보(常平通寶)이다. 조선후기 숙종 때 만들어져, 조선시대 화폐의 대명사처럼 된 상평통보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1 조선 후기 화폐 주조의 배경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지폐인 저화(楮貨)와 세종대에 만들어진 조선통보, 세조대에 유사시에는 화살촉으로 사용하고 평화시에는 화폐로 사용하는 유엽전(柳葉錢)을 법화로 주조해 유통시켰다.

하지만 대체로 화폐를 사용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여건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쌀이나 포(布)가 화폐의 주요 기능을 하고, 저화나 동전은 화폐로서 큰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경국대전’에는 관리의 녹봉 규정에 쌀과 포와 함께 저화를 지급하는 규정까지 정했지만, 저화가 화폐로서 주요한 기능을 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부터 이러한 흐름에 변화가 찾아왔다. 무엇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전란 이후에 찾아온 조선의 사회·경제적 변화들이 화폐 유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했다. 17세기 전반의 조선사회에서는 전란의 후유증을 조기에 극복하고, 국가 재건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다양한 사회경제정책이 전개되었다. 대동법·호패법·호포법·양역변통·화폐 주조론 등이 이러한 사회경제정책의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 같은 정책들은 농업 중심의 조선사회가 점차 상공업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시대적 상황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거듭되는 자연재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에서도 가뭄이나 홍수에 취약한 산업인 농업 이외에 다른 산업의 육성이 요구되었다.

이처럼 17세기의 조선사회는 자연적·사회적 위기를 극복하면서 국가 재건의 기반을 마련해가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대처하여, 새로운 사회정책과 함께 관료·학자들의 다양한 경세론이 나타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한국조폐공사 화폐박물관에서 모형을 통해 설명한 조선시대 화폐 주조 과정. ‘엽전’이란 용어는 동전이 주전틀에 나뭇잎처럼 매달려 있던 것에서 유래했다.
화폐의 주조와 유통에 대한 논의도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출현하였다. 17세기 화폐의 주조와 유통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인물로는 김신국·김기종·김육 등의 경제관료 학자들과 유형원과 같은 실학자를 들 수 있다. 화폐 유통은 전란과 재난의 위기를 극복하고 국부를 증대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농업경제의 한계에서 벗어나 중상적인 방법으로 국부와 민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될 수 있었다. 17세기 전반 선조대에는 이덕형 등에 의해 동전 주조 논의가 전개되었고, 17세기 중엽 인조·효종대에는 김신국·김육 등에 의해 화폐 유통 논의가 활발해졌다.

현종대에는 전국을 휩쓴 자연재해와 대기근 때문에 화폐 유통에 대한 새로운 구상을 갖지 못하였으나, 17세기 후반 숙종대에는 사회경제적인 변화상을 반영하면서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되기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화폐의 유통에 대해서는 그것이 유발하는 폐단에 대한 논의도 아울러 진행되었지만 시대적 흐름은 화폐의 유통에 있었다.

◇오는 5월부터 유통될 예정인 5만원권 화폐.
#2. 조선시대 1푼은 오늘날 700원, 1냥은 7만원


1678년(숙종 4) 국왕 숙종은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가 모인 자리에서 화폐의 주조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먼저 화폐는 천하에 통행(通行)하는 재화(財貨)인데 오직 우리나라에서는 누차 시행하려고 했으나 행해지지 못했던 것은 동전이 토산(土産)이 아니라는 점과 중국과는 달리 화폐를 유통시키는 분위기가 컸음이 지적되었다.

이어 허적·권대운 같은 대신들이 변화하는 사회상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으로 화폐의 시행을 적극 건의하였고, 숙종은 신하들의 의견을 재차 구했다. 참석한 신하 대부분이 화폐 유통의 필요성에 공감하자 드디어 숙종은 호조, 상평청, 진휼청, 어영청, 사복시, 훈련도감 등의 기관에 명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돈 400문(文)을 은 1냥의 값으로 정하여 시중(市中)에 유통하게 하였다. 따라서 400문이 은 1냥의 가치를 가지게 했으니 은 한 냥은 동전(상평통보)의 4배의 가치를 가지게 되는 셈이었다. 오늘날에는 한국조폐공사에서만 화폐를 만들지만, 조선시대에는 여러 관청에서 화폐를 주조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상평통보‘는 나무처럼 생긴 주전틀에서 동전을 만들어 떼어내는 방식을 취했다. 요즈음도 흔히 쓰이고 있는 ‘엽전’이라는 용어는 동전이 주전틀에 나뭇잎처럼 매달려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상평통보가 주조됨으로써 조선사회는 본격적인 화폐 유통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화폐 단위인 1문은 1푼이라고도 했으며, 10푼이 1전, 10전이 1냥이 되었다. 10냥은 1관으로서 관이 최고 화폐 단위였다.

조선후기 1냥의 구매력은 어느 정도가 될까? 1냥의 현재적 가치를 알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당시나 지금이나 똑같이 쓰이는 물품을 통해 비교해 보는 일일 것이다. 우리가 매일 먹는 쌀은 가장 적합한 비교 품목이다. 조선시대에는 상정가라고 해서 국가에서 정한 공식적인 물품 가격이 있는데 쌀 1섬은 5냥이었다. 조선시대의 쌀 1섬은 지금의 쌀 144㎏ 정도가 된다. 2009년 현재 쌀 20㎏의 소매가격이 대략 5만원 정도이니 조선시대의 1섬은 현재의 화폐로 36만원 정도가 된다. 따라서 조선시대 1냥은 7만원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최소의 화폐 단위인 1푼은 지금의 700원 정도의 가치를 띠고 있는 셈이다. 요즈음도 동냥하는 사람들이 ‘한 푼 줍쇼’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이 또한 조선의 화폐 단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동냥하는 사람이 ‘한 냥 줍쇼’라고 한다면 이것은 동냥이 아니라 거의 강도 수준이 아니었을까?

◇상평통보를 주조한 호조를 묘사한 조선시대 그림.
#3. 상평통보가 널리 유통된 까닭은?


상평통보의 유통 초기에 백성들은 조그만 동전으로 쌀이나 옷을 과연 살 수 있을지를 두려워하여 그 유통에 소극적이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동전을 가져오는 자에게 직접 명목 가치에 해당하는 현물을 바꾸어 주는가 하면, 중앙 관리를 각 지방에 파견하여 동전 사용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부가 직영하는 시범 주점과 음식점을 설치하여 화폐 유통의 편리함을 널리 홍보했다. 세금을 화폐로 받는가 하면, 한성부·의금부 등에서는 죄인의 보석금도 현물 대신에 동전으로 받으면서 화폐 유통을 촉진시켜 나갔다.

그러나 무엇보다 숙종대에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되게 된 배경에는 국가의 화폐 유통에 대한 의지와 함께 조선후기 농업 사회가 서서히 상공업 사회로 전환하는 시대적 상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즉 조선후기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은 이전까지 화폐의 기능을 하였던 쌀이나 옷감보다는 그 편리성 때문에 금속 화폐의 필요성을 대두시켰으며, 점차 세금과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하는 조세의 금납제(金納制)가 시행됨으로써 화폐의 유통은 보다 촉진되었다. 마치 오늘날 현금보다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것이 훨씬 편리한 것과 유사한 기능을 한 것이다. 한편 국가의 입장에서도 농업 경제만으로는 확보할 수 없는 국가재정을 위한 재원 확보 정책으로 상업과 수공업의 중요성이 대두되었고, 화폐의 유통은 동전의 재료가 되는 광산 개발과 상업의 발달을 촉진하는 효과를 가져 왔다.

그런데 18세기에 이르면 화폐를 유통하지 않고 집에 보관만 하면서 화폐의 품귀 현상이 발생했다. 전황(錢荒)이라 부르는 이 현상으로 화폐가치가 상승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동전을 아무리 많이 주조해도 유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화폐 부족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양반 관료나 지주, 대상인들이 화폐를 고리대 수단으로 활용하거나 축적하였기 때문으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초래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8세기 실학자 이익이 폐전론을 주장했던 것도, 화폐 유통이 가난한 백성에게는 오히려 폐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4. 화폐에 도안된 인물과 그림 찾아보기

5만원권의 주인공 신사임당이 등장하기까지 우리나라 지폐에 그려진 인물들은 모두 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순신, 이황, 이이를 비롯하여 세종대왕까지 모두 이씨였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해방 이후 만들어진 지폐에는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그려져 있었고, 1970년대까지 사용된 500원 지폐의 주인공은 이순신이었다. 또 하나 현재 우리나라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순신을 제외하고 모두 학문으로 명망을 떨친 인물이라는 점이다. 외국의 경우에도 화폐에 그려진 인물들은 대부분 그 나라를 상징하는 인물로 세종대왕, 이이, 이황, 신사임당 등이 우리나라 지폐에 그려진 것에서 학문을 중시하는 전통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동전이나 지폐의 그림에도 관심을 가져보자. 동전의 앞면은 액면가가 표시되어 있고 10원짜리에는 다보탑, 50원짜리에는 벼이삭, 100원짜리에는 이순신, 500원짜리에는 학을 그려 넣었다.

또한 지폐에는 그 인물과 연관되는 장소나 물품이 그려져 있다. 1000원권 구권에는 이황을 배향한 도산서원, 신권에는 성균관 명륜당 그림, 5000원권에는 이이가 태어난 외가 오죽헌과 어머니 신사임당의 초충도, 1만원권은 앞면에 세종이 거처했던 용상 뒤의 일월오봉병, 뒷면에는 세종이 발명한 혼천의와 천상열차분야지도가 그려져 있다.

1만원권 구권에는 앞면에 측우기, 뒷면에는 경복궁의 경회루가 그려져 있었다. 이처럼 화폐의 그림들은 주인공과 깊은 연고가 있다. 또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각 나라의 화폐에는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압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기회가 되면 세계 여러 나라 화폐의 그림들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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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