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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 <82>나라현의 ‘고후쿠지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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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12-17 09:32:16 수정 : 2008-12-17 09: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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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인 세도가가 세운 고대 명찰 중의 명찰
◇고후쿠지 동금당과 오중탑 경관.

그 발자취에 대해 도쿄대학 건축사학과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 등은 “처음에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부인이 세운 야마시나지는 그 후 서기 710년 천도한 새 왕도 헤이제이쿄(平城京, 현재의 글자는 奈良市가 됨, 필자주)로 옮겨서 아들인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 658∼720년)가 지금의 터전에서 고후쿠지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우선 금당(金堂)을 세우고 장육석가상(丈六釋迦像)을 모셨고, 이어 수많은 사람이 불사에 참여해 여러 당우와 탑이 잇대어 들어서며 가람이 커졌다. 더구나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딸 고묘지(光明子, 701∼760년)가 제45대 쇼무천황(聖武, 724∼749년 재위)에게 시집가서 고묘(光明)황후가 되자, 쇼무천황은 동금당(東金堂, 726년)을 세웠고, 고묘황후는 오중탑(730년)과 서금당(西金堂, 734년)을 세웠다. 이와 같이 고후쿠지는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후지와라 가문의 사찰이면서도 국가 관사(官寺)와 동격의 가람으로 융성하며 광대한 터전을 펼쳤던 곳이 지금의 터전(‘국보·중요문화재 안내’ 1963)이라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나라 시대(8세기)에 백제인 후지와라 가문의 세도가 하늘을 찌를듯 기세등등했음을 알 수 있다. 이곳 고후쿠지뿐 아니라 이 가람에서 북쪽으로 약 2km 지점 언덕받이(나라시 가스가노초 160)에는 역시 후지와라 가문의 큰 사당인 ‘가스가타이쇼(春日大社)’도 있어서 나라시 동쪽인 이 고장이야말로 고대 백제인 후지와라 가문의 권세를 미루어 살필 만한 곳이다.

필자가 최근에 고후쿠지를 다시 찾은 것은 지난달 22일이었다. 그 무렵 고후쿠지에서는 ‘2008년 고후쿠지 국보 특별공개 행사’(10월18일∼11월24일)를 하고 있었다. 동금당의 문수보살상(회나무, 93.9cm 13세기경)과 약사삼존상(청동, 본존 270cm 1415년 주조·중요문화재), 국보 목조건물인 오중탑 1층의 석가삼존상, 난엔당(南円堂)의 불공견색관음상(회나무, 372cm 13세기경) 등 이 가람에는 국보 26점과 중요문화재 44점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소장돼 있다.

◇고후쿠지 동금당의 약사삼존상.


후지와라노 가마타리가 백제인 지배자라는 것을 여기서 간략하게 짚어보자. 서기 815년에 일본 왕실에서 편찬한 왕실 족보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을 보면 일본 왕족들 가문(左京皇別) 중의 제18번째 인물로서 후지와라노 가마타리 문중인 가스가노마히토(春日眞人)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가스가노마히토는 일본 제30대 “비다쓰천황의 황자(皇子)인 가스가왕(春日王)의 후손”이라고 돼 있다. 즉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다름 아닌 “백제 왕족 출신 비다쓰천황”(‘신찬성씨록’)의 직계 후손이다. 그러기에 그가 나라 시대에 왕도에서 천하를 주름잡게 되었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저명한 사학자 오와 이와오(大和岩雄)씨는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백제인이다”(‘古事記 天武天皇’ 1980년)라고 밝혀서 주목받았다. 오와 이와오는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아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백제계 귀화인들에게 주어진 왕실 고관 벼슬인 ‘후히토(史)’ 그룹과 관계가 있었다”고도 지적했다.

그가 제30대 ‘비다쓰천황’의 직계 후손이기 때문에 왕실 세도가가 되었다기보다 피투성이의 정치적 권력투쟁에 승리했기 때문에 지배자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즉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서기 645년의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라는 끔찍한 정치개혁에 성공했다. 다이카개신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후지와라노 가마타리 세력이 백제인 소가(蘇我) 가문을 뒤엎어 멸망시키는 데 성공한 고대사의 큰 발자취다. 지금까지 왕실의 외척으로서 왕실 최고 대신 자리를 아들 손자 대대로 세습하면서 천하를 주름잡았던 것이 소가 가문이었다.

다이카개신 당시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본래 이름은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였다. 그는 다이카개신 이후 ‘후지와라’라는 새로운 가문을 만들어 그 첫 조상이 되었다. 일본 역사를 보면 자기 스스로 개명하는 것은 아니며, 왕의 윤허를 받거나 왕으로부터 새 성씨를 내려받는 게(賜姓) 흔한 일이었다. “다이카개신의 공이 있어서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제38대 덴지천황(天智·661∼67년 재위)으로부터 ‘후지와라 조신’(藤原朝臣)의 사성을 받았다”(角川版 ‘일본사사전’ 1976)고 하듯, 그는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로부터 새로운 성을 쓰는 인물이된 셈. 여기 덧붙이자면 그 당시 나라 땅 야마토(大和)조정의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가문은 겐(源), 페이(平), 도(藤), 기쓰(橘) 네 가문이었다. 여기서 ‘도’는 물론 후지와라(藤原) 가문이다.

◇고후쿠지 오중탑 안에 있는 석가삼존상.


특히 6세기 초부터 나라 땅 아스카(飛鳥)의 백제계 왕실에 등장한 소가 가문과 소가 집안을 멸망시킨 7세기 중엽 이후 후지와라 가문을 모르고는 일본 고대 역사를 논할 수 없다. 교토부립대학 사학과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에게 멸망당한 세도 가문 소가씨는 백제 개로왕(455∼475년 재위) 때의 조신이었던 목만치(木滿致)의 후손이다”(‘飛鳥’ 1970)라고 했으며,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아스카 왕실 실권자였던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 ?∼645년)를 암살하고 새로운 왕실 지배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최고 대신(豊浦大臣)이었던 소가노 이루카의 아버지 소가노 에미시(蘇我蝦夷, ?∼645년)는 아들이 후지와라노 가마타리 세력에 암살당하던 와중에 궁지에 몰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여간 두 원수 집안은 백제인 후손들이었다.

개혁을 주도하게 된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5세기부터 왜왕실에서 백제신(百濟神)을 모셔온 구다라노(百濟野) 터전인 셋쓰(攝津, 지금의 오사카 일대) 별장에서 오랫동안 칩거하며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소가 세력이 왕실을 쥐고 흔드는 전횡이 극에 달하자, 드디어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왕실의 나카노오에노오지(中大兄皇子)와 은밀하게 손잡고 소가 가문 제거의 큰칼을 빼들었다.

나카노오에노오지는 다름아닌 제34대 조메이천황(敍明, 629∼641년 재위)의 제1 왕자이다. 조메이천황은 서기 639년에 나라 땅 “구다라가와(百濟川)에다 몸소 ‘구다라궁(百濟宮)과 구다라다이쇼(百濟大寺)를 지었다”(‘일본서기’)는 백제계 천황이다. 그보다 67년 전에 조메이천황의 친조부인 “제30대 비다쓰천황은 572년에 구다라오호루노미야(百濟大井宮)를 지었다”(‘일본서기’)는 것이며, 비다쓰천황은 ‘신찬성씨록’에 ‘백제 왕족’으로 밝혀져 있다. 이 사실을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박사가 필자에게 자택(교토부 가메오카시)에서 직접 시인했다(SBS TV, 박종필 PD 연출 촬영, 2007년 5월4일).

1972년 4월1일자 일본 도쿄신문에다 “조선과 일본은 똑같은 한민족이다”라고 하는 새로운 ‘한일동족설’을 강력하게 주장해 더욱 유명해진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 1909∼1992년)씨도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조선 귀화인”이라고 밝힌 저명 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씨가 지난날 다음과 같이 주장한 것 또한 일본 사학계에서 설득력이 매우 컸다.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본래 ‘나카토미노 가마타리’였던 것을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로 성씨를 바꿨다. 그것을 보더라도 나는 그가 귀화인 계통의 관료였다고 본다. 이름에 ‘다리(足)’가 붙는 것은 조선 도래인 계통에서 많이 볼 수 있다. 7세기경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인명을 보면 거의 다 귀화인 계통의 인물이다.”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개성한 것은 백제 멸망 당시 2만7000명의 백제 원군을 일본 규슈에서 백제 땅으로 보냈던 덴지천황 8년(서기 668년) 10월의 일이었다. 그 때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조정의 최고 대신으로 임명 받았다”(‘新皇正統記’)고도 한다.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지난날 아스카 왕실의 최고 권력자였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626)가 그랬듯이, 대대로 왕실과 자기 자신의 연고 관계를 완벽하게 밀착시키느라 “자기 딸들을 차례로 덴지천황과 덴무천황 그리고 고분천황에게 시집보냄으로써 왕실 외척이 돼 권세를 장악했다”(栗崎瑞雄 ‘枾本人麻呂’ 1981년)고 한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두 누나를 차례로 긴메이천황에게 시집보내 외척으로서 최고 권력자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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