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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 <80>고대 백제인 숨결 넘치는 명찰 다이마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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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11-18 18:19:15 수정 : 2008-11-18 18: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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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건너간 일본 佛法의 진수
◇다이마데라에 있는 백제인 여승 주조히메상.
오사카의 긴테쓰 아베노바시역에서 전철을 타고 나라땅 아스카(飛鳥)로 찾아가는 오른쪽 길목으로 나지막한 남봉과 여봉의 쌍둥이 봉우리로 이뤄진 니조산(二上山, 고대 호칭은 ‘후타카미야마’)은 명산으로 꼽힌다. 이 니조산 동쪽 기슭에 고대 백제인들의 숨결 넘치는 명찰 다이마데라(當麻寺)가 있기 때문이다. 다이마데라의 금당 본존인 미륵보살상(좌고 219.7cm)은 일본 국보이며 비불이다.

다이마데라는 서기 612년에 백제계인 제31대 요메이왕(用明, 585∼587 재위)의 제3왕자 마로코친왕(麻呂子親王)이 당초 오사카땅 구다라군(百濟郡)에 세운 만보장원(萬寶藏院)을 다시금 그의 손자인 다이마노쿠니미(當麻國見)가 지금의 니조산 기슭으로 옮겨 세운 가람이다. 도쿄대학 건축사학과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는 “다이마노쿠니미가 가람을 니조산 기슭으로 옮긴 것은 니조산이 본래 엔노오즈누의 수도장 터전이라는 연고지로 이름난 곳이기 때문이다. 다이마노쿠니미는 680년에 이곳에서 공사를 착공한 지 5년이 지난 685년에 마침내 금당을 비롯하여 강당과 동탑 및 서탑 등을 완공했으며 사찰 명칭도 다이마데라로 고쳐 불렀다”(‘국보 중요문화재’ 1993)고 말한다. 또 “마로코친왕이 오사카지역 중심지에 만보장원을 세운 것은 친형인 쇼토쿠태자(574∼622)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그 후 다이마노 쿠니미는 꿈에 행자(行者) 엔노오즈누가 나타나 사찰을 옮겨오라고 지시하여 지금의 니조산 기슭으로 이전해 세우며 젠린지(禪林寺)로 개칭했다. 그 후 681년에 미륵불을 만들면서 다이마데라로 다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當麻寺’ 1950)고 말한다.
◇다이마데라의 금당 본존인 미륵보살상.

교토부립대학 사학과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쇼토쿠태자의 친동생 마로코친왕이 구다라군에다 612년에 만보장원을 세울 때 진두 지휘한 것은 스이코 여왕(592∼628 재위)을 등극시킨 우대신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 생년 미상∼626)였다. 사찰 건축에 앞장섰던 소가노우마코는 612년 4월3일에 쇼토쿠태자가 불교를 번창시킨 새로운 불교 ‘17조 헌법’을 직접 써서 그해 3월 구다라군에 세운 만보장원에 갖다주었다”(‘飛鳥の古代を考える’ 1995)고 했다. 그처럼 소가노우마코가 다이마데라 전신인 만보장원 창건에 앞장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도와키 데이지 교수는 그의 저서 ‘아스카’(飛鳥, 도쿄NHK방송협회 발행, 1977)에서 “당초 백제 불교 번창에 앞장선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 생년 미상∼570, 소가노 우마코의 생부)는 백제인 목만치(木滿致)의 후손이다”고 밝혔거니와 최근 우리나라 방송(KBS TV, ‘韓國史傳’ 2008.10.4 방영)에서도 “백제인 목만치의 후손이 소가노우마코”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렇듯 소가 가문의 부자는 각기 조정 최고위 대신으로서 모국 백제의 불교를 일본 왕실에서 포교하는 데 열을 올렸다.

현재 나라땅 아스카 지역을 답사하고 있다는 저명 사학자 우다 노부오(宇田伸夫)는 필자에게 최근 보내온 서신에서 “소가의 가문은 ‘소가백제왕조’(蘇我百濟王朝)였다”고 주장하면서 “곧 ‘소가백제왕조’에 관한 자료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또한 우다 노부오는 “아스카촌에서 작년에 발굴(2007.2.1 국립나라문화재연구소 발표)된 소가 가문의 저택 터전 ‘아마가시노오카’ 유적 동쪽 기슭에 ‘부여궁전’(扶余宮殿)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찰한다”고도 밝혔다.

지난 7월17일 다이마데라의 구스모토 마사다카(楠本正隆) 주지는 “일본의 미륵보살 신앙은 백제로부터 처음 일본에 건너온 것입니다. 미륵보살님은 장차 저 먼 미래 세상에 와서 여래가 된 다음에 중생을 구제하시게 됩니다. 저희 다이마데라의 금당 본존이신 미륵보살상은 여래가 되신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지금부터 1317년 전인 하쿠호 시대(白鳳, 645∼710)인 681년에 흙으로 빚어낸 소상(塑像)이며 일본 국보입니다. 미륵보살상의 소토가 굳어진 다음에 이분의 몸에다 두루 천을 발라붙이고 나서 옻칠까지 한 다음에는 금박으로 소상을 아름답게 마무리한 것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소상이기에 자랑스러운 국보가 된 것이지요. 누가 만든 것인지는 문서 기록이 없어서 알 길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불교가 6세기 때 백제에서 아스카 왕실로 건너왔기 때문에 왕실을 바탕으로 일본은 비로소 불교 국가가 된 것입니다”고 말했다. 
◇ 주조히메가 살았던 다이마데라의 나카노보.

와세다대학 불교미술사 담당 오하시 가즈아키(大橋一章) 교수는 필자에게 “아스카 시대(592∼645) 일본의 불교 사찰 건축이며 온갖 불상 제작은 모두 백제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 후에 그들 백제인들에게서 배운 사람들이 뒷날 계속해서 절을 세우고 불상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다이마데라의 국보인 흙으로 만든 소토(塑土) 미륵불상도 완전하게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고 했다. 그러므로 구스모토 마사다카 주지의 말처럼 하쿠호시대의 미륵여래상이라면 백제인 후손이 직접 만들었거나 백제인 스승 밑에서 배운 사람 중 누군가가 빚어내 만든 셈이다.

다이마데라 사찰에서 가장 인상적인 승려는 예뻤다는 백제인 여승 주조히메의 발자취다. 다이마데라에 전해오는 오랜 기록은 이렇다. “주조히메는 제45대 쇼무천황(聖武, 724∼749 재위) 시대에 우대신 후지와라노토요나리(藤原豊成, 704∼765)의 딸로 태어났다. 후지와라노토요나리 내외는 자식이 없어 관음보살에게 간절히 기원한 끝에 주조히메를 얻게 되었다. 이 여자아이는 불과 4살의 천진한 소녀이면서도 어느 사이엔가 ‘칭찬정토경(稱讚淨土經)’을 밤낮으로 독경하기 시작했다. ‘칭찬정토경’을 어린 주조히메에게 갖다준 것은 흰 여우였다. 그 소녀가 생모를 잃은 것은 5살 때였다. 소녀가 6살 때 후지와라노토요나리의 후실로 들어온 계모는 불경만 외우는 주조히메를 몹시 구박했다. 그러나 마음씨 어진 소녀는 새 어미를 원망하기는커녕 시키는 대로 순종했고, 이 세상 모든 백성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면서 붓글씨로 ‘칭찬정토경’을 베껴쓰기 시작했다. 소녀가 자그마치 1000권의 ‘칭찬정토경’ 사경을 마친 것은 16세 때였다. 이 무렵 주조히메는 서쪽 니조산의 노을 속에 나타난 부처님을 보았다. 그 하늘은 극락정토였다. 소녀는 왕도 나라(奈良)의 저택을 나와 니조산 기슭의 다이마데라로 찾아왔다. 당시 다이마데라 사찰은 여인 금제였다. 그녀는 관음보살의 가호를 믿고 일심으로 독경하면서 입산을 소원했다. 이듬해가 되어서야 주조히메의 서원이 이루어져 이 절의 나카노보(中之坊)에서 머리를 깎게 되었다. 그것이 763년 6월15일이었다. 이때 받은 법명은 호뇨(法如)였다.”(‘當麻寺’)
◇다이마데라의 만다라당.

주조히메의 생부 “후지와라노토요나리는 백제인 왕족”(門脇禎二 ‘飛鳥の古代を考える’ 1995)이거니와 조정의 최고 대신이었던 그 아버지 덕분에 그녀의 입산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여승이 된 주조히메는 이튿날인 6월16일에는 잘라낸 긴 머리카락을 바늘에 꿰어 수틀에서 범자(梵字) 글씨로 ‘아미타·관음·세지’를 자수하며 부처님에게 감사했다. 다시 이튿날인 17일이 되자 정오에 한 늙은 여승이 찾아오더니, “연 잎 줄기를 모아라”고 지시했다. 이때부터 그녀는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해, 야마토(왕도 나라)며 가와치(백제군), 오우미(교토 동쪽 비와코 호수 일대) 등 세 지역의 연못에서 서둘러 연 잎 줄기를 수집했다. 주조히메는 연잎 줄기에서 실을 뽑아 5색으로 물들였다. 22일 저녁 노을 속에 젊은 베 짜는 직녀 아가씨가 찾아왔다. 직녀는 주조히메를 거들어 이 색실로 베를 짜게 했다. 23일 새벽이 되자 1장5척의 큰 만다라를 짜내었다. 이것이 지금의 다이마데라 국보인 철직(綴織) ‘다이마만다라’(當麻曼茶羅)란다. 그런데, “늙은 여승은 이 만다라 앞에 나타나 그림을 설명하더니 젊은 직녀와 함께 둘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 늙은 여승은 아미타여래였고 직녀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 그때부터 주조히메는 사람들에게 현세 정토(現世淨土)라는 극락 세상에 관한 설법을 계속하더니 29세가 된 해 3월14일에 숨을 거두고 저승 극락으로 돌아갔다”(‘當麻寺’)는 것. “현재 다이마데라에서 만다라당에 본존(本尊)으로 모시고 있는 국보 ‘다이마만다라’는 가로 세로 약 4m 크기이고, 화면에 아미타여래와 관음보살, 세지보살을 비롯하여 수많은 불보살과 하늘의 천인이며 누각과 보배 나무 등 극락정토가 수 놓여 있다. 그러나 장장 1300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몹시 낡아 손상이 심하여 비공개로 모시고 있다. 불법의 진수를 설법하고 있는 이 만다라(진리를 간직하고 있다)는 다이마데라의 보배 중의 보배가 아닐 수 없다”고 구스모토 마사다카 주지는 조심스럽게 설명한다.
◇다이마데라가 있는 니조산 전경.

또 한 사람의 고대 백제인으로서 사찰이 있기 전 다이마데라 터전을 일찌감치 자신의 수도장으로 닦았던 인물이 전설 같은 엔노교자 오즈누(役行者小角)라는 도사였다. 하늘을 날아다녔다는 믿기지 않는 전설로 유명한 엔노교자 오즈누는 실제 인물이었다. 일본 고대 산악 신앙의 최초 수행자로서 이른바 일본 슈겐도(修驗道)의 이름 높은 개조(開祖)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추앙받고 있다. 이는 권위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인명사전들도 밝히고 있는 사실이다. 요약하면 “엔노 오즈누는 7세기 후반 야마토의 주술자로서 이름은 엔노키미 오즈누(役君小角), 엔노 우바소쿠(役優婆塞), 엔노교자(役行者) 등이다. 공작주법(孔雀呪法)을 수행해 주술에 뛰어났다. 그의 제자였던 가라쿠니 히로다리가 세상 사람들을 요혹(妖惑)하는 자라고 하면서 스승을 고발하였기 때문에 699년에 엔노오즈누는 왕실에서 멀리 이즈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603년에 신선(神仙)이 되었다고 ‘겐코샤쿠쇼’(元亨釋書)에 그의 전기 기록이 나온다”(삼성판 인명사전·1978)고 했다. 또한 권위 있는 다른 인명사전에도 고대 한국인 제자에게 배반당한 똑같은 내용의 기사와 함께 “한반도 출신의 주술자로서 제자인 가라쿠니 히로다리의 무고로 유배당했다. 엔노오즈누는 일본 수험도의 개조로서 숭배되었다”(角川版 인명사전·1976)고 했다.

슈쿠도쿠대학 불교사학과 다키다 도시하루(龍田壽陽) 교수는 “‘겐코샤쿠쇼’는 일본에 불교가 건너 올 당시부터 가마쿠라 시대(1192∼1333)에 이르는 고승들의 전기와 불교사며 종파 제도에 관한 귀중한 기록이다”고 했으며, 1377년에 저자인 고칸 시렌(虎關師鍊, 1278∼1346)의 문하생들이 목판을 새기는 작업을 완성하여 성립되었다고 한다. ‘겐코샤쿠쇼’는 현재 일본의 ‘100권의 역사 명저’(‘歷史の名著’ 新人物往來社·1975)로서 정평이 있는 고서적임을 아울러 지적해 둔다.

한국외국어대 교수 senshy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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