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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 총무의 증언 "공포에 발도 떼지 못했다"

입력 : 2008-10-21 15:54:34 수정 : 2008-10-21 15:5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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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신음.비명 지르며 쓰러져"
"방화살인 피의자 정씨 방엔 `뽑기' 상품 수북"
"공포에 눌려 여기 저기서 쏟아지는 비명을 숨어서 들을 수밖에 없었다. 숨진 이들에게 미안하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D고시원 총무 A씨는 21일 연합뉴스 기자에게 자신이 관리하던 고시원에서 벌어진 방화·흉기난동 참극 당시 느낀 무력감을 이렇게 털어놨다.

A씨는 대학을 다니다가 휴학한 뒤 지난 6월부터 총무를 맡아 고시원을 실질적으로 운영해 온 인물이다.

그는 고시원 입주자 정모(31)씨가 매캐한 연기 속에서 흉기를 마구 휘두르던 35분간의 공포를 이렇게 묘사했다.

"검은 연기 속에서 검은 물체가 불쑥불쑥 나타나 고시원 사람들을 습격했다. 공포 때문에 발을 뗄 수도 없었고 내 방문을 잠그고 있다가 문을 여는 기척이 보이면 창문을 부수고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다."

다음은 A씨의 증언 내용.

◇비명이 끊기지 않은 공포의 35분 = 20일 오전 야간 근무를 마치고 방안에서 쉬고 있는데 8시 46분께 밖에서 `불이야! 불이야!'라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고 소화기를 집으려고 하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검은 연기 속에서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보였다.

고시원 투숙자 서진(20.여.사망)씨가 놀라서 그대로 주저앉고 정씨가 흉기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불이 난 것을 알고 4층에 사는 김양선(여.사망)씨가 계단에서 내려왔다.

`저 사람도 죽을 텐데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공포감에 한 발짝도 뗄 수가 없었다. 너무 놀라서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그고 휴대전화기를 진동으로 바꿨다. 혹시 벨소리를 듣고 괴한이 내가 있는 방으로 찾아올까봐 무서웠다. 그대로 112에 신고했다.

고시원이 방음이 전혀 되지 않아 여기저기서 `악! 악!'하는 비명과 신음이 들렸다. 사람들의 몸이 움직이지 않아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맞은 편 방에 있는 사람이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는데 괴한이 문을 따고 들어가 흉기를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만약 괴한이 내 방문을 따고 들어온다면 아크릴로 된 창문을 깨고 뛰어내려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불이야!'라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마구 뛰어나왔다가 정씨가 휘두르는 흉기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갔다.

나중에 소방대원들이 출동해 장비를 옮기는 소리가 들려서 밖으로 나왔다. 출구에 형사들이 대기하고 있어 괴한이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참극의 현장에서는 정씨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복면 괴한의 정체를 몰랐다. 나중에 형사들이 정씨를 잡아서 나올 때에야 알게 됐다. 서진씨와 김양선씨가 아니었다면, 4층에서 뛰어내려온 사람들이 아니라면 나는 이미 죽었다. 너무 죄송하고 무섭다.

◇살인마로 변신한 정씨의 모습 = 정씨는 털모자(스키모자)와 물안경, 마스크, 상의, 건빵바지, 구두를 온통 검은 색으로 착용하고 있었다.

검은 구두는 군인들이 신는 전투화로 보였다. 허리에는 가스총집이 달린 가죽허리띠가 둘려 있었고 양다리에는 과도 2개가 밖으로 묶여 있었다. 손에 든 흉기가 없어지면 상체를 굽혀 바로 `쌍칼'을 뽑아들 수 있도록 예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에는 헤드 랜턴(머리띠형 전등)을 착용해 검은 연기 속에서도 앞을 잘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검은 연기 속에서 갑자기 검은 물체가 튀어나와 사람들을 하나씩 습격하는 모습에 고시원에 전문 테러리스트가 투입됐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전쟁 애니메이션에서 매복했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캐릭터 같았다.

◇정씨 뽑기ㆍ수집에 편집증세 = 정씨의 방 안을 본 사람은 나밖에 없다. 정씨는 고시원 직원 누구에게도 자기 방을 보여주지 않았다. 소방점검 때도 방 공개를 거부했다.

최근 소방점검 때 방을 몰래 따고 들어갔는데 문을 여는 순간 10초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괴한 모습이었다. 책상 위아래로 인형 뽑기에서 뽑은 인형, 소형자동차, 라이터 등 모든 것들이 첩첩이 쌓여있었다.

방 뒤쪽에는 비교적 큰 인형들 수십개가 쌓여 있었고 매트리스 옆에는 같은 종류의 외계인 인형들이 오와 열을 맞춰 색깔별로 정돈돼 있었다. 방 한쪽에는 매트리스 높이만큼 두루마리 휴지, 사각 휴지, 쓰레기 등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보통 사람의 방은 아니었다. 나중에 내가 점검 때문에 할 수 없이 방을 열고 들어갔다고 얘기하자 자신의 치부가 드러난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고 그 뒤로 나를 미워한 것 같다.

정씨는 뽑기에 미쳐있었다. 어떤 날에는 비가 오는데도 밖에서 3시간 동안 인형을 뽑고 있기도 했다. 뽑기에서 받은 헬리콥터가 있었는데 그걸 얻으려고 20만원을 들이기도 했다. 자기가 일하는 업소의 사장에게 가서 20만원을 들여서 뽑은 것이라고 자랑하고 헐값에 되팔았다고 한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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