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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 <77>백제인 위상 보여준 하쿠손(伯孫)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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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10-01 11:33:38 수정 : 2008-10-01 11:3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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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군주 '흙말' 타고 위용 과시
백제선비 설화 역사책에 생생히
◇일본 오사카 야마토강 상류의 다마테산 기슭에 자리한 하카타히코 신사의 정문.
일본 고대사에 커다란 말발굽 소리를 남긴 유명한 인물은 백제 선비 하쿠손(伯孫, 5C)이었다. 하쿠손을 제사지내는 사당 하카타히코(伯太彦) 신사가 오사카의 야마토강 상류 다마테산(玉手山) 산기슭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강물은 그리 멀잖은 곳인 나라시대(710∼784) 백제인 고승 행기(行基, 668∼749) 대승정을 기념하는 행기대교(76회 참조) 쪽으로 오늘도 조용히 흘러내리고 있다.

하카타히코 신사는 오사카부 가시와라(柏原)시의 ‘긴테쓰 오사카선’ 전철 가와치고쿠분(河內國分)역에서 내려 마주보이는 주택가 산길로 약 20분 걸어 오르면 쉽게 눈에 들어오는 ‘다마테산 공원’ 뒤편에서 다시 산길을 올라가야 한다.
◇하카타히코 신사의 편액과 방울.

일본 역사책(‘일본서기’)의 유랴쿠왕(雄略, 456∼479 재위) 9년 7월 조에 보면 다음처럼 흥미롭고도 진귀한 일화가 전한다.

“7월1일의 가와치국(河內國, 고대 오사카 남부 지역, 필자 주) 기록이 있다. 아스카베(飛鳥戶)군에 사는 선비 다나베노 후히토 하쿠손(伯孫)은 후루이치(古市)군의 후미노 오비토 카료(書首加龍)에게 시집 보낸 딸이 있다. 하쿠손은 딸이 아이를 낳았다는 기별을 받고 축하하기 위해 사위의 집에 찾아갔다가 달밤에 집을 향해 돌아오게 됐다. 이치비코 언덕의 오진왕릉(譽田陵, 지금의 오사카부 하비키노시 혼다 지역, 필자 주) 아래쪽에서 하쿠손이 만난 것은 빨간 준마를 탄 사람이었다. 하쿠손은 그 말이 하도 좋아 탐이 나기에 제 말에다 세게 채찍질을 하며 뒤쫓았으나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때 용처럼 날듯 세차게 달리는 준마를 탄 사람은 하쿠손이 제 말을 부러워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말을 세워 바꿔 타자고 했다. 하쿠손은 기뻐서 고맙다는 인사를 나누고 준마를 얻어타고 귀가했다. 집에 돌아가자 마구간에다 말을 매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마구간에 가보니 밤에 타고 왔던 준마는 간 데 없고 붉은 흙말(붉은 점토 흙으로 말이며 동물 등을 만들어 왕릉 수호의 상징으로 죽 세운다, 필자 주)이 한 마리 서 있었다. 하쿠손은 이상한 일이라고 여겨 간밤에 준마를 바꿔 준 오진왕릉 터전으로 다시 가보았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인가. 왕릉에는 흙으로 만들어 세워 둔 흙말들 틈에 본래의 자기 말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쿠손은 어쩔 수 없이 제 말을 다시 타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하카타히코 신사의 부도.

백제인 선비 하쿠손이 다시금 준마를 찾아갔던 오진왕릉의 주인공인 오진왕(應神, 4∼5C)의 실체는 일본 선주민이 아닌 5세기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정복자 백제 곤지왕자라는 것이 장기간에 걸친 일본 사학자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저명 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一郞)씨는 5세기 ‘오진천황은 백제 개로왕의 아들 곤지왕자이다’(‘百濟から渡來した應神天皇’ 2001)라는 제목의 연구서로 구체적으로 주장했다.

물론 이와 같은 주장은 이미 도쿄대학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日本 家の起源’ 1967)와 와세다대학 사학과 미즈노 유(水野 祐) 교수(‘日本古代の 國家形成’ 1978) 등이 내세웠었다. 또한 오사카시립대학 사학과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郞) 교수는 오진왕이 지금의 오사카인 그 옛날의 “난바(難波)에서 새로운 신왕조를 수립했다”(‘應神王朝論序說’ 1964)고 단정한 것도 주목된다. 더 구체적인 것은 교토대학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가 “오진(應神)과 닌토쿠(仁德) 부자(父子)왕은 난바에 왕도를 정했으며, 특히 오진왕이 가와치(河內, 오사카 남부 지역) 지방에서 국가를 일으키면서, 4세기 후반에 가와치왕조(河內王朝)가 섰다”(‘日本古代國家成立史の硏究’ 1959)고 했다. 이 주장은 오사카 난바 지역으로 수많은 고대 백제인이 건너온 고대 일본 진출의 발자취를 가장 먼저 규명한 귀중한 연구이기도 하다.

바로 그와 같은 오사카 남부 지역에 오진왕과 닌토쿠 부자왕의 거대한 왕릉들이 지금까지 있으며, 이 지역 일대에 살던 백제인 선비 하쿠손과 가용의 설화가 8세기 초의 일본 역사책에 상세하게 기술되었다는 것은 더욱 우리를 주목시킨다. 하쿠손은 백제 귀족 다나베씨 가문의 인물이며, 그들 다나베씨 후손들의 흔적은 일본 고대 역사서 여러 곳에 널리 알려지고 있을 만큼의 명문이다.

“다나베씨의 조상은 닌토쿠천황 시대에 백제에서 귀화한 시스미(思須美)와 와도쿠(和德) 사이에 태어난 자손들이다”(‘弘仁私記’ 812년 성립)

이들 다나베 가문은 오사카 난바 일대에서 닌토쿠왕 시대 이래로 번창하였기에 그들의 성씨로 이루어진 행정 지명들이 실제로 오늘에도 널리 이어져 오고 있을 정도다. 이를테면 오사카시 히가시스미요시구 안에는 다나베 마치를 비롯해 기타다나베 마치와 히가시다나베 마치, 미나미다나베 마치 등이 광역을 이루고 있다. 물론 이 지역은 646년부터 생긴 고대의 행정 지명이 구다라군(百濟郡)의 미나미구다라향(南百濟鄕)이었다.(‘大阪府全志’ 1922)

하쿠손의 사위 “후비노 오비토 카료는 후루이치(古市)군에 살던 선비로 왕인의 후손이다.”(‘古市史籍’ 9세기) 박사 왕인의 후손들은 후루이치의 왕인 사당인 사이린지(西琳寺) 일대에서 여러 가문으로 나뉘어 조정과 지방 관서의 문관을 비롯하여 왕실의 말 사육과 관장 등 여러 가지 벼슬을 산 것으로 일본 역사에 잘 알려진다. 하쿠손이 후비노 오비토카료를 사위로 맞은 것도 고대 백제 귀족 간의 연고로 보면 좋을 것 같다.

하쿠손의 말과 오진왕의 왕릉 흙말의 설화가 역사에 크게 실렸다는 것은 백제왕실과 왜왕실과 연관해 결코 예사로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일본사에서 말의 발자취는 백제의 아직기(阿直岐) 왕자가 오진왕 때, 암수 두 마리의 준마를 이끌고 난바의 왜 왕실로 건너가는 데서 일본의 말역사가 시작된다(‘일본서기’). 그뿐 아니라 곧 이어서 아직기 왕자가 백제의 유능한 젊은 학자 왕인 박사를 오진왕에게 천거해 백제로부터 난바의 왜 왕실로 초청해 왕자들의 스승으로 왕실에서 살게 했다. 왕인의 밑에서 글을 배운 제4왕자가 뒷날 왕인의 천거로 아버지 오진왕을 계승한 닌토쿠왕(5C)으로 등극했다.

아직기 왕자에 의해 시작된 왜 왕실의 말사육과 승마 풍습은 8세기부터는 조정의 좌마료(左馬寮)와 우마료(右馬寮)에 속한 마사부(馬飼部)를 백제인 관리들이 관장했다. 그들은 주로 왕인의 직계 후손으로, 조정으로부터 새로운 관직명의 사성(賜姓)인 성씨까지 받은 것이 우마노후미(馬史)씨와 우마노오비토(馬首)씨라는 가문을 이었다.

이들의 성씨는 나중에 다케오(武生)씨로 바뀐다. 이들은 주로 후비노 오비토카료가 살던 후루이치(古市)군 일대에 살았는데 이 고장의 군수였던 후루이치(古市)라는 인물의 경우 그의 발자취는 다음과 같다. “후루이치(古市) 촌주(村主)는 백제국 용왕(庸王)의 후예이다”(‘新撰姓氏錄’ 왜왕실 편찬 족보, 815년)라고 하는 왕인의 후손이었다. 현재의 이 지역 하비키노시의 행정 지명 후루이치(古市)도 고대 왕인의 후손 이름 ‘후루이치’ 그대로이다.

백제인 선비 하쿠손이 왕인의 후손을 사위로 맞아 손자를 얻게 되자 축하의 잔치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진왕릉의 흙말을 탔다고 하는 이 신비한 사건은 곧 왕도가 있었던 고대 난바 등 오사카 지방에서의 백제인들의 위세를 잘 드러내 준다. 고대에 일반 백성이 감히 말을 타고 왕릉을 넘나들지 못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비록 꾸며 쓴 역사 기사라고 하더라도 어찌 절대군주의 왕릉을 수호하는 흙말을 한 선비가 감히 탈 수 있었다는 것인가. 그것은 따져볼 것도 없이 대담하고도 놀라운 내용이다. 그런 방자하고도 무례하기 그지없는 승마 행위가 역사책에 기재될 수 있었다는 그 자체만으로서도 당시의 다나베 하쿠손 가문의 당당하였던 위상을 추찰시킨다.

그것을 입증시키는 것이 일본 왕실에서 만든 왕실법도(‘延喜式’ 927년 성립)에 하쿠손의 사당 하카다히코 신사가 왕실 관장의 사당으로 등재돼 있다는 점이다. 왕실 제사 등을 기록한 고대 사료(‘神祇志料’)에도 “하카타히코 신사와 하카타히메(伯太姬) 신사에서는 다나베노 후히토 하쿠손과 그의 처를 제사지냈다”고 썼을 정도다. 그러하기에 그가 활약했던 옛 터전에 자리해 오늘까지도 1400년의 긴 역사를 우리에게 고스란히 되새겨 주고 있다.

금세 하쿠손의 말발굽 소리라도 들릴 것 같은 하카다히코 신사의 언덕 바로 밑에는 커다란 석관의 뚜껑이 잘 전시되고 있다. 하쿠손의 관으로 추정되는 대나무를 세로 방향으로 반을 쪼갠 모양의 관뚜껑(割竹形石棺蓋)은 그 길이 세로 256.5cm, 가로 90cm, 높이 47.7cm의 육중하고도 훌륭한 조각품으로서, 관련 학자들도 고분시대(4∼7C) 것으로 보고 있다. 관속의 주인이 누구든 간에 다마테산 고분군의 제3호에서 출토된 이 응회암(凝灰岩)으로 만들어진 관뚜껑의 주인공이 지체 높은 인물이었다고 본다. 이 일대 고분은 모두 난바와 오사카 지역으로 건너왔던 도래인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현재 35기의 고분이 보존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쿠손의 처의 사당인 하카다히메 신사도 이곳에서 남쪽 약 2㎞ 아래에 있다. 그것으로 보더라도 역사의 일화가 실릴 만큼 출중했던 백제 귀족 다나베 가문 하쿠손의 드높았던 지위를 아울러 연상시킨다.

한국외국어대 교수 senshy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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