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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 <73>오사카 기타구다라 지역 구다라 샤리손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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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08-06 04:01:05 수정 : 2008-08-06 0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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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백제인의 숨결이 물결치는 곳
◇샤리손쇼지의 ‘백제왕족 젠코 추모비’ 큰 비석.
서기 646년부터 옛날 행정지명 ‘구다라고우리’(百濟郡)였던 곳의 기타구다라(北百濟) 지역이 지금의 오사카 시내 중심인 이쿠노구와 덴노지구, 히가시나리구, 주오구 등 일대 큰 터전이다. 이 고장 중심지의 한 시내버스 정류장에는 ‘구다라(百濟)’라는 커다란 전광대(약 5m)가 우뚝 서 있어서 나그네의 눈길을 끈다. 또한 이 고장 각 정류장 행선지 안내판에도 이르는 곳마다 영락없이 ‘구다라’ 이름들이 또렷또렷하다. 지난날 이곳에는 노면 전차가 다녔으며, 그 당시 전차 정류장 명칭 역시 ‘구다라’였다고 한다.

그러기에 이 지역이 그 옛날 백제인들의 오랜 역사의 중심지며, 아직도 백제인의 숨결이 고스란히 물결치는 곳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고대로부터 일찌감치 일본인으로 국적이 바뀐 지 오래다. 굳이 캐묻지 않아도 필자에게 직접 “저는 고대 백제인의 후손입니다”라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실제로 이 고장 사람들을 만나보면 일본 이름과 함께 한국 성명의 명함을 내민다. 또한 듣자니 1940년대 이후 일본으로 이주한 재일동포도 40만명 넘게 살고 있단다. 고대의 백제 인연 탓인지 오사카의 이쿠노구와 덴노지구 등 일대에는 재일동포 10만명 이상이 살고 있다. 취직이며 결혼 등 국적문제로 한국인 3세와 4세들이 겪는 어려움 탓으로 일본 귀화도 해마다 크게 느는 추세란다.

‘구다라’ 버스정류장에서 북쪽으로 2km 남짓한 곳에 지금 그 옛날의 ‘구다라지(百濟寺)’ 옛 터전이 자리하고 있다. 명칭은 ‘샤리손쇼지(舍利尊勝寺)’다. 지난달 오사카의 ‘미나미구다라소학교’에 찾아갔을 때 교장(니시무라 지에코·西村千惠子)이 직접 필자에게 “미나리구다라 지역에는 그 옛날 백제인의 명찰 터전이 있답니다. 샤리손쇼지는 백제인들의 구다라지입니다. 다음에 오사카에 오시면 직접 안내하여 드리겠습니다”라고 가르쳐준 곳이다. 이 샤리손쇼지는 고대의 구다라지이며 사리사 또는 백제왕족이었던 오와케왕(大別王)의 오와케오지(大別王寺)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알려진다.

현재의 명칭 샤리손쇼지는 지금 주택가로 된 터전 한복판에 비교적 넓은 경내를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고대에는 구다라노(百濟野)라는 백제 들판에 큼직하게 자리잡았던 가람이었다. 이 지역에 관해서 사학자 마키무라 후미히(牧村史陽)는 “지금의 이쿠노구 지역은 본래 구다라노라는 지명으로 부르던 들녘이며, 현재의 히라노강(平野川)은 처음에 구다라강(百濟川)이었다. 샤리지(舍利寺)를 구다라지로 불렀듯이, 4∼5세기 이후에 백제로부터 백제인들이 대거 이주하여 왔기 때문에 그들 집단이 이 지역까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田村の歷史’ 1973)고 했다. 또한 오사카의 이쿠노구와 덴노지구 일대가 들판이었다는 일본 신문의 ‘구다라노’ 특집 기사에서 향토사학자 니시마타 미노루는 “나라(奈良, 710∼784) 시대에 이 일대는 구다라노라고 불렀던 들판이었다. 나라라는 말의 어원은 한글로서 국가(國家)라는 의미이다. 이 고장은 도래인들이 토지를 개척하여 이 일대의 원형을 만들었다”(松井宏員 ‘每日新聞’ 2007년 7월6일)고 했다.
◇‘난가쿠산(南岳山) 샤리손쇼지’라는 편액.

‘난가쿠산(南岳山) 샤리손쇼지’라는 편액이 있는 산문 앞 오른쪽에는 이 사찰의 오가와 요시아키(小川善明) 주지가 직접 쓴 ‘사전(寺傳)’이 적힌 연혁판이 세워져 있다.
◇오사카 시내 한 버스정류장에 있는 ‘구다라(百濟)’라는 커다란 전광대.

6세기 말엽 이 고장에는 불심이 돈독한 백제인 부호 이쿠노장자(生野長者)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열세 살짜리 말 못하는 사내아이가 있었다. 서기 593년에 이 고장에서 서쪽으로 매우 가까운 ‘아라하카’ 땅에서는 나이 아직 19세 소년 쇼토쿠태자(574∼622)가 시덴노지(四天王寺)를 세우고 있었다. 쇼토쿠태자는 그 농아 소년의 딱한 사정을 듣자 그 아이에게 찾아와서, “이 사람은 전생에 너에게 부처님 사리 3과를 맡겨둔 것이 있으니 지금 곧 그것들을 내게 돌려다오”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아이는 갑자기 소리 내어 엉엉 울면서 사리 3과를 목 속에서 입 밖으로 내놓으며 “감사합니다” 하고 첫 말문을 열었다. 이에 이쿠노장자 내외는 기뻐 눈물을 흘리면서 이곳에다 부처님을 위해 구다라지를 지었다고 한다. 즉 쇼토쿠태자와의 연고설이다.

사학자 이마이 게이치(今井啓一) 교수는 “이쿠노장자는 백제왕족 젠코(善光)의 후손 왕족이었다고 본다”(‘歸化人と社寺’ 1974)고 했으며, “이 사찰은 구다라지 터전에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불당들이 모두 불타서 황폐됐다. 그 이전에는 절터 정면에 금당인 젠코당(善光堂)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경내에는 금당(大悲殿)과 300년 된 ‘백제왕족 젠코 찬양비’ 큰 비석이 젠코를 추모하듯 우뚝 솟아 있다. 이쿠노구(生野區) 명칭도 백제왕족의 성씨가 그 본이다.

사학자 후지자와 카즈오(藤澤一夫) 교수는 지금의 샤리손쇼지 터전을 백제 제26대 성왕의 왕자며 사신이었던 오와케왕이 지은 옛터로 보고 있다. 오와케왕의 실체가 백제 제27대 위덕왕(554∼598 재위)이 아닌가 추찰하고도 있어 주목되고 있다.

그러나 “비다쓰천황(敏達 572∼585 재위) 6년(577년) 11월에 백제국왕(위덕왕)은 환사(還使)인 오와케왕을 비롯하여 경론책 몇 권과 율사(律師), 선사(禪師), 비구니, 주금사, 조불공(造佛工) 6명을 보내더니 드디어 난바의 오와케오지에 살게 하였다”라는 ‘일본서기’ 기사로 볼 때는 연대차가 커서 오와케왕은 위덕왕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왜곡이 심해서 두 인물 관계는 앞으로 중요한 연구 과제이다. 그런데 ‘일본서기’ 긴메이 17년 1월조에 보면 “백제 혜왕자가 왜왕실에서 백제로 귀국할 당시 1000명의 용사를 호위로 거느려서 보냈다”라고 돼 있다. 혜왕자는 위덕왕의 동생이며 역시 성왕의 왕자이다. 백제의 일개 왕자가 왜왕실로부터 백제로 귀국하는 길에 1000명의 용사가 호위해주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일본왕이 백제인이기에 모국의 왕자를 이렇듯 극진하게 호위했음을 시사한다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더구나 중요한 사실은 긴메이왕의 둘째 왕자인 “시호 비다쓰는 백제왕족이다”(‘新撰姓氏錄’ 815)라는 기사는 비다쓰왕의 친아버지 긴메이왕은 백제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샤리손쇼지 본당 외관.

교토대학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박사는 필자에게 직접 가문의 오랜 가전인 ‘신찬성씨록’을 펼쳐보이며 “비다쓰천황은 백제왕족이라는 기록입니다”(홍윤기 ‘백제-일본왕실 혈연 실체 발굴’ 新東亞 2008년 4월호)라고 확언했다. 필자는 긴메이왕은 백제의 성왕임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막내 아들 혜왕자가 일본 왕실에 찾아와서 1년간 살다 백제로 돌아가던 길에 1000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호위병들을 붙여주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샤리손쇼지 본당 불상.

도쿄대 건축사학과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는 “쇼토쿠태자가 난바의 아라하카에다 시덴노지를 짓게 된 것은 국신 신봉자로서 극단적으로 불교를 배척하던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 ?∼587)라는 조정의 반역자가 된 고관을 무찌르고 불교를 중흥하게 된 큰 기념이다”(‘국보·중요문화재’ 1963)고 했다. 시덴노지는 쇼토쿠태자가 백제에서 초빙해온 유씨(柳氏) 등 건축가 3명에 의해서 절이 섰다(‘四天王寺緣起’ 11C 성립). 다쿠쇼쿠대학의 노무라 스즈무(野村進) 교수는 “그 당시 시덴노지를 세운 이들의 조직체 ‘공고구미(金剛組)’라는 건축회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체이다”(‘千年?いて來ました’, 2007년 12월8일 NHK TV방송)라고 주장했다. 여하간 오사카 땅 구다라고우리 터전에서 6세기 말에 백제인 건축가들에 의해 큰 가람 시덴노지와 구다라지가 세워졌다.
◇이쿠노장자의 사당 이쿠.

샤리손쇼지가 본래 구다라지였다는 중요한 기사는 일본의 가장 오래된 승전(僧傳) ‘일본영이기’(日本靈異記, 822년경 저작)에 다음 기사로서 알려진다. “승려 의각은 본래 백제인으로서 나라가 망하자 사이메이 천황 당시 일본으로 건너와 난바의 구다라지에서 살았다. 의각 법사는 키가 7척이며 불교학이 깊었고 늘 ‘반야심경’을 염송했다. 그 무렵 그 절에는 승려 혜의(惠義)가 살았는데, 그가 밤중에 등불도 없는 의각 법사의 방 안에서 불빛이 밝게 새어 나오기에 들여다보니 경을 외우는 의각 법사의 입에서 빛이 훤하게 비쳐 나오고 있었다”. 이런 기록은 난바 구다라지에는 백제 고승이 건너왔던 것을 살피게도 해준다. 오사카의 역사 고서에 “폐(廢)구다라지는 덴노지 동쪽, 예전 구다라고우리에 있었다”(‘攝津志’)고 했다. 현재의 샤리손쇼지는 바로 덴노지 동쪽이다.

한국외국어대 교수 senshy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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