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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 <72>일본 차문화의 명인 센노 리큐는 조선인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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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07-23 03:44:24 수정 : 2008-07-23 03:4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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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다완이 없었다면 日 茶道도 없었을 것이다"
◇차의 명인 센노 리큐의 흉상
일본은 오늘날 차문화가 성한 곳 중의 하나다. 일본의 차문화를 발전시킨 차의 명인으로 손꼽히는 인물이 16세기의 센노 리큐(千利久, 1522∼1591)다. 일본에서 센노 리큐를 모르고는 차를 논할 수 없다. 그러한 센노 리큐가 차의 명인이자 성인(聖人)으로 등장한 배경에는 이름난 무장들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차를 마시는 방인 차실(茶の間)을 따진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차실은 교토의 긴가쿠지(銀閣寺, 이하 은각사, 본래 명칭은 慈照寺, 지쇼지) 경내에 있는 도닌자이(同仁齋)라는 곳이다. 연못이 아름답게 꾸며진 은각사 정원 북쪽에 있는 도큐도(東求堂, 일본 국보 건물) 안에 있는 것으로 일본에서 유명한 차실이다. 도닌자이 차실은 다다미(약 1m×2m) 4장 반의 자그마한 방이다. 일본 차실은 다다미 4장 반 크기가 표준이다.

은각사(일본 국보 2층 건물)는 일본 최초의 무사(쇼군) 정권이었던 무로마치 막부 시대(1336∼1573)의 제8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 1435∼1490)가 1482년에 지은 산장이다. 그의 사후에는 사찰로 바뀌었다.

은각사의 도닌자이는 무로마치 막부의 마지막인 제15대 장군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 1537∼1597)가 만들었다. 그는 다도의 명인이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어린 나이에 출가해 나라 땅 고후쿠지(興福寺)의 승려가 됐다. 그는 불도를 닦으며 지냈으나 1566년에 환속해 무사정권에 참여하게 된다. 그후 1568년 10월에는 무장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의 중용으로 무사정권의 최고위직인 정이대장군이 됐다. 무로마치 막부의 지배자가 된 셈이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오다 노부나가와 더불어 다도에 심취했다. 그러한 심취와 노력으로 다도의 일가견을 이룰 수 있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 등의 뒤를 이은 것은 조선을 침략한 전국시대의 무장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였다.

다도에 미치다시피 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차실과 다구들을 황금으로 장식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은 조선 정복 외에도 다른 배경이 있었다. 그가 고려의 훌륭한 차사발인 다완이 몹시 탐나 조선 도공들을 납치하기 위해 침략했다는 것도 통설의 하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당시 천하에 이름을 떨치던 차의 명인(名人) 센노 리큐에게 다도를 배우면서도 센노 리큐가 가진 명품 고려다완(오늘날의 일본국보 명품들)도 욕심이 나서 강제로 빼앗았다. 그러나 일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의 불화 끝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약자인 센노 리큐를 무고하게 단죄했다. 센노 리큐를 강제로 자살까지 시켰다. 목을 잘라 이치조모도리하시 다리 난간에 매달기까지 했다. 일설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센노 리큐의 딸을 측실로 원했으나 거절당한 앙갚음이라고도 한다.

고려다완은 대부분 지금의 일본 국보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다완 연구가 가토 요시이치로(加藤義一郞) 교수는 “고려다완을 빼놓고는 다완의 우수성을 논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조선의 다완은 다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조선의 다완이 없었다면 오늘과 같은 일본 다도가 생길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의 다완 역시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의 다완은 이른바 다완의 본종(本種)이다. 이것은 당연히 다른 다완과는 뚜렷하게 구분해서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다완강좌③ ‘일본미술공예’ 1951.5)고 역설했다. 
◇고려다완 ‘오고려심산로’(奧高麗深山路)  ◇고라이자에몬(高麗左衛門)이 만든 명품 하기다완

고려다완은 일본 역사상 최고 보물이다. 센노 리큐가 애용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센노 리큐의 소장품으로 알려진 명품은 ‘리큐 도토야’(利久ととや)를 비롯하여 ‘고라이 시오케’(高麗しおけ) 등 고려다완이 가장 유명하다. 고라이 시오케는 에도 막부의 제3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 1604∼1651)가 센노 리큐 사후에 입수해 자신이 보존했다. 차후에 막부의 다이묘(지방 장관)였던 마에다 도시쓰네(前田利常, 1593∼1658)가 물려받아 가보로 후손에 전해 오늘에 이른 보물이다.

고려다완이라는 명칭이 일본 문헌에 나타난 것은 1554년(‘茶具備討集’)의 일이다. 물론 고려다완은 고려시대 것이 으뜸이다.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도자기 명품들을 만들었다.

“일본 도자기의 창시자가 된 이삼평(李參平)의 아리타야키(有田燒), 박평의(朴平意)의 나와시로가와야키(苗垈川燒)의 창시, 조선도공 아가노기조(上野喜藏, 조선 이름 尊階)의 다카다야키(高田燒) 창시가 눈에 띈다. 조선도공 김해(金海)와 그의 아들 김화(金和)가 사쓰마야키(薩摩燒)를 발전시켰다.”(崔德壽, ‘일본에서의 조선다완’)
◇작은 차실인 ‘다이안’ 입구의 니지리구치

호세이대학 총장 출신의 다니가와 데쓰조(谷川徹三)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일본의 도자기는 조선을 떼어놓으려 하여도 떼어놓을 수 없다. 모모야마(桃山, 1582∼1600) 시대의 도자기(茶陶)라 하더라도 가라쓰야키(唐津燒)며 하기야키(萩燒)는 조선계이다. 라쿠다완도 그 초대 도공 조지로(長次郞)는 조선에서 건너왔다고 하는 설이 예전부터 있었다. 더구나 이에 관해서는 조지로의 아버지가 조선 사람으로서 아메야(あめ屋)로 불린 기와사(瓦師)였고 어머니는 일본인이라는 것이 유력한 통설이다. 여하간 일본 독자적인 라쿠다완을 만들 때 센노 리큐가 지도했다고 하더라도 조선의 피가 들어가 있다. 조지로 초기 다완은 생김새가 고모카이형(熊川型)과 똑같은 형태다. 고모카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조선에 있고, 초기의 가라쓰야키나 하기야키에는 고모카이형의 다완이 많다.”(‘須惠器から茶器へ’ 1974)

최근 후지이 아에라는 여성이 임진왜란 당시 끌려간 조선도공의 망향시가 새겨진 하기다완을 서울의 국립박물관에 기증한다는 데서 화제가 됐다.

차가 백제에서 불교와 더불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고 본다. 그러기에 센노 리큐가 차를 다리는 뜨거운 물에다 불가(佛家)의 선(禪)을 도입시킨 명인이라는 것은 그에 대한 후세의 칭송이다. 센노 리큐의 다도를 집약해 ‘와비차’(侘び茶)라고 찬양하는 것이 일본 다도의 표현 양식이다. 그야말로 고적한 초막집 자그마한 방에서 정성껏 차를 다려 손님을 소박하고 정중하게 접대하는 참선의 정신 세계를 일컫는 말이다.

항구 도시 오사카의 부유한 도매상 센 요헤에의 아들로 태어난 센노 리큐는 어려서부터 다인으로 이름난 기타무키 도친(北向道陳)과 다케노 조오(武野紹鷗) 밑에서 다도를 배워 대성했다.
◇몹시 어두운 ‘다이안’ 내부의 족자 ‘묘키’라는 한자어

사학자 미요시 사타지(三善貞司)는 “다성(茶聖)으로 칭송받고 있는 센노 리큐에 관한 전기는 1만권에 이를 정도”(‘茶聖千利休’ 2007)라고 찬양한다.

“센노 리큐의 조부 센 아미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이주해 온 풍부한 교양을 갖춘 문화인이었다고 한다. 센노 리큐의 차실 구조는 조선 민가와 꼭 닮았으며, 다도구(茶道具) 역시 고려 시대 것이 극히 많다는 점도 그런 핏줄기 때문이라고 한다.”(‘茶聖千利休’)

오늘날 일본 국보로 보존된 세 곳의 차실 중에 으뜸은 ‘다이안’(待庵, 이하 대암)이다. 센노 리큐가 손수 초가집을 지어 만든 작은 차실이다. 대암은 일본 교토도카이도 본선철도 야마자키의 오야마자키초(大山崎町)에 있는 묘키안(妙喜庵, 1492∼1501 건립) 암자 터전에 있다.

대암 차실은 일본 국보(1951년 지정)이다. 직접 관람은 15일 전 예약을 통해서 가능하다. 불과 다다미 2장의 좁고 작은 방이다. 차실 입구는 반드시 무릎을 굽히고 몸을 웅그려야만 들어갈 정도로 작은 오두막이다. 그러기에 차실 입구를 일컬어 ‘니지리구치’(무릎걸음 입구)라 부른다. 겨우 네 사람 정도가 무릎을 꿇고 마주앉아 주인이 다려주는 차를 마시는 협소한 공간이다. 바로 여기서 불가의 선정신이 고이 담긴 차를 마신다.

다실 대암 다음으로 일본 국보 다실은 역시 교토의 미쓰안(密庵)이다. 이 미쓰안 다실은 사찰 다이도쿠지 터전에 있고 또 다른 국보 다실은 조안(如庵)이다. 조안은 아이치현(明治村)의 유라쿠엔(有樂苑)에 있다. 
◇묘키안 앞의 JR 야마자키 역사

센노 리큐는 스승 다케노 조오와 함께 차 끓이는 방법을 개혁하면서 사카이(堺, 오사카 남쪽)의 난소지(南宗寺)에 들어가 참선했다. 교토의 디이도쿠지와도 친밀하게 교류하며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때마침 장군 오다 노부나가가 사카이를 자신의 직할지로 삼자 센노 리큐를 다두(茶頭)로 임명했고 뒤이어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큰 신임을 받으며 근무했다. 이때는 왕실에까지 드나들게 되어 오기마치 왕(1560∼86 재위)으로부터 거사(居士)의 뜻인 ‘리큐’를 칙사(勅賜) 받는 영예도 누리게 되었다.

센노 리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황금 차실을 설계하는 한편으로 초가 오두막 소안(草庵) 차실을 창출했다. 라쿠다완도 구워냈으며 와비차의 세계를 완성하는 데 집중했다. 이때 나라에서 3000석의 큰 녹을 받았으며 저택도 훌륭하게 짓고 다인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센노 리큐는 세 여인과 결혼했다. 1524년 첫 결혼한 여성과는 장남(道安)과 딸 셋을 두었다. 첫 부인과 사별한 이듬해인 1578년에 재혼(법명, 宗恩)했다. 둘 사이에는 두 아이(宗林, 宗幻)가 태어났으나 모두 요절했다. 세 번째 처는 신분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 여인과의 사이에는 아들 소게이(宗慶)를 비롯해 5명의 자식이 태어났다. 소게이는 뒷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대의 솜씨는 천하 제일”이라고 칭찬했다는 도예의 달인으로서 라쿠다완의 명수였다.

센노 리큐의 의붓자식인 쇼안(少庵)은 두 번째 부인이 데려온 자식이었다. 쇼안은 계부 리큐의 다도를 계승하여 훌륭한 후계자가 되었다. 쇼안은 은근하고 원만한 성격 덕분에 누구에게나 호감을 샀다. 계부가 자살한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쇼안을 먼 시골로 귀양보냈다. 그후 1598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하자 쇼안은 교토로 돌아와 그동안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몰수당한 의부 센노 리큐의 차실 후신안(不審庵)과 차도구들을 돌려받아 가업을 이었다. 쇼안이 다도로 집안을 다시 일으킨 것을 일컬어 이른바 ‘오모테센게’(表千家)라 일컫는다.

한국외국어대 교수 senshy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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