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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71> 백제인 형제가 세운 도쿄의 명소 ‘센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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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07-08 18:27:22 수정 : 2008-07-08 18:2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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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심장’에 고이 모셔진 ‘1치8푼의 秘佛’
◇사찰 정문 앞 문전거리 ‘나카미세’ 기념품점.
일본 속 백제인들의 옛 터전 하면, 흔히들 나라(奈良)땅과 오사카 또는 규슈 지방을 연상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실상은 도쿄 등 간토지방에도 고대 백제인들의 연고는 폭넓고 깊게 분포한다.

일본 도쿄 시내의 명찰 중의 명찰 하면 ‘센소지’(淺草寺)다. 일본 전통 인형극계의 지도자인 오자와 유키오(小澤幸雄, 재단법인 ‘すぎのこ文化振興財團) 이사장은 필자에게 “누가 도쿄의 명찰 ‘센소지’를 모른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일본인이 아닐 것이다”고 말했다. 필자가 그에게 관련 문헌을 제시하며 “센소지의 자취는 고대 백제인들이 이룩한 것”이라고 말하자 그도 수긍했다.

“정말 그런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백제가 일본에다 불교를 가르쳐 주고 훌륭한 사찰들을 지어 준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도쿄의 센소지에도 고대 백제인의 눈부신 발자취가 있다는 데 새삼 감동받습니다.”

도쿄의 지하철 ‘긴자선’ 종점인 ‘아사쿠사(淺草)’역에서 내리면, 바로 그곳에서 200m 남짓한 곳에 센소지라는 고찰이 있다. 아사쿠사 지하철 출구 도로변에 ‘가미나리몬’(雷門·번개문)이라는 큰 붓글씨가 담긴 대형 제등이 머리 위로 높게 걸린 게 보인다. 여기서 센소지를 향해 문 안으로 곧장 들어서면, 그곳에 기념품점 거리인 ‘나카미세’(仲見世)가 앞쪽으로 길게 이어진다.

상점 거리 끝쪽에서 사찰 본당으로 향하는 사찰 산문(山門)인 보장문(寶藏門)을 다시 거쳐 본당인 관음당(觀音堂)에 이르게 된다. 이곳 아사쿠사 거리는 400년 전의 ‘에도(江戶)시대’(1603∼1867) 당시 태동했다. 새로운 시가지가 형성된 출발지로도 유명하다. 그러기에 지금부터 반세기 전에 세이조대학의 노다 우타로(野田宇太郞)는 인상에 남는 기록을 남겼다. 

“아사쿠사 지역이 도쿄 굴지의 번화가인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다. 이곳 센소지 본당인 관음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센소지 사찰 일대가 그 옛날 지금의 스미다강(隅田川, 본래는 宮戶川)변의 광활한 들판이었음을 상상하는 것도 나의 자유이다. 또 아득한 고대에 조선반도에서 건너온 귀화인이 이 고장을 개척했다는 것을 상상해 보는 것도 나의 자유이다.”(淺草觀音, 1960)

산호(山號)가 ‘곤류잔’(金龍山)인 센소지의 본당 ‘관음당’ 안에 모셨다는 불상은 백제 ‘관음상’이다. 그러나 아직 누구도 이 관음상을 본 일이 없다는 ‘비불’(秘佛)로 유명하다. 비불이란 왕명 등에 의해서 공개를 금지시킨 귀중하기 그지없다는 비공개 불상이다. 이 관음상은 크기가 사람 손 안에 드는 불과 1치8푼 길이의 지불(持佛)이란다.

◇관음당과 오중탑 전경.
일본 나가노현 나가노(長野)시 모토요시초(元善町)에 있는 일본 최초인 ‘구다라지’(百濟寺, 7세기 초 창건)였던 지금의 명칭 ‘젠코지’(善光寺)의 백제 비불 역시 1치8푼의 지불로 알려져 온다. 아마도 6∼7세기 백제에서는 존귀한 지불의 크기가 1치8푼 길이였던 것 같다. 

센소지의 관음당 앞마당 대형 향로에는 꾸준하게 향이 피어 오르고 있다. 이 향로 앞에는 백제 불상 ‘관음님’에게 참배온 이들이 간절한 소망을 빌었다. 이들은 향을 피우며 두 손을 이용해 향의 연기를 머리와 몸으로 당겨대고 있었다. 어느 사찰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광경이지만, 세계적인 대도시로 각광받고 있는 도쿄 한복판의 사찰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 일본인이 인생의 행복과 취직, 입학, 건강을 기원하러 찾아들고 있다. 이러한 센소지로 언제 누가 어디서 비불인 백제 불상 ‘관음상’을 모셔 왔다는 것인가.

◇명화 ‘눈 속의 센소지’(1858년).
이 사찰의 ‘본존연기’(本尊緣起)에는 불상을 모신 인물이 7세기 백제인 “히노쿠마노 하마나리(淺前浜成)와 히노쿠마노 다케나리(淺前武成) 형제”라고 한다. 이 두 백제인 형제는 지금의 아사쿠사에 자리 잡고 살면서 스미다강에 나가 물고기를 잡았다. 스이코 여왕 36년(서기 628년) 3월18일 아침에는 물고기를 잡지 못했다. 대신 이 형제의 그물에 걸린 것은 관음불상이었다. 히노쿠마 형제는 관음상을 건지자 몹시 두려운 나머지 어사(魚肆)를 고쳐 새로운 불당을 만들었다. 이곳에 관음불상을 봉안해 모시고 예불하게 됐다. 정식으로 센소지가 건립된 것은 고토쿠왕(孝德, 645∼654 재위) 원년이다.

그와 같이 똑같은 어부 형제 이야기를 내용으로 센소지의 발자취를 전해 주는 책자로 유명한 것은 사이토 유키오(齋藤幸雄)의 ‘강호명소도회’(江戶名所圖會, 1836)라는 지지(地誌)다. 이 책자는 도쿄 지방의 예전 명소와 고적 등을 그림과 함께 역사 기술로 상세하게 풀이했다. 에도시대의 저명한 고고학자였던 도리이 류조(鳥居龍藏·1870∼1874) 박사도 히노쿠마노 하마나리 형제의 존재를 인정했다.

“히노쿠마는 사카노우에 다무라마로(坂上田村痲呂·758∼811)와 똑같은 가문의 일족이다. 아야히토(漢人, 백제인, 필자주)들은 예부터 간토지방에 이주해 와서 살았다. 본국에서 살 때나 일본에 이주하여 온 뒤에도 불교를 신앙했으며 자그마한 지불을 갖고 있었다. 그러한 소불상을 귀화인들이 모셨으며, 이 소불상이 센소지의 기반이 됐다. 그곳이 번창해 오늘의 센소지가 이루어진 것이다. 아사쿠사에는 히노쿠마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살면서 사찰의 법회 때 참여했다. 한편으로는 승려가 절을 이끌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히노쿠마 사람들이 법회를 담당해 왔다.”(‘武藏野及其周圍’)

이 사찰은 그동안 네 번의 화재(1378년, 1535년, 1631년, 1945년)를 겪었다. 현재의 관음당은 1958년 재건된 건물이다.

도리이 류조 박사가 지적한 사카노우에 다무라마로 장군은 일본 제50대 간무왕(781∼806 재위) 당시 총애받은 백제인으로 정이대장군을 지낸 조정의 최고위 인물이다. 관련 기록들도 남아 있다.

“다무라마로의 직계 조상은 오진왕 20년 9월, 백제에서 건너온 백제 왕족 아치노오미(阿知使主)였다.”(‘續群書類從’ 1822)

“야마토노 아야노 아타히(倭漢直)의 조상인 아치노오미는 백제에서 건너올 때, 그의 아들 쓰카노오미(都加使主)와 함께 그가 거느리던 17현(縣)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일본서기’)

◇‘아사쿠사신사’(淺草神社) 본전.
현재 나라현 아스카의 히노쿠마 지역에는 유서 깊은 13층 석탑과 더불어 아치노오미의 사당인 ‘오미아시신사’(於美阿志神社)가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금당’ 등의 주춧돌만 남아 있지만 그 터전은 고대 백제 왕족의 고장이다. 최근에는 백제 지배자의 거대한 무덤(마유미칸스즈카 고분)을 일본 고고학자들이 공표하기도 했을 정도다. 백제 도래인 히노쿠마 형제의 이름이 이 고장의 행정 지명 ‘히노쿠마’가 되었으며, 사카노우에 다무라마로 장군도 히노쿠마 형제 가문의 후손이다. 도쿄 아사쿠사의 센소지와 나란히 좌측으로 자리하는 유명한 사당은 다름아닌 ‘아사쿠사신사’이기도 하다. 신사 명칭은 ‘센소’가 아닌 ‘아사쿠사’로 읽는다는 것을 지적해 둔다. 센소지가 백제 관음불상을 비불로 모신 사찰인 반면에, 그 옆에 있는 이 아사쿠사신사는 센소지를 세운 히노쿠마 형제의 신주와 또한 이 두 형제를 직접 거느렸다는 한반도 도래인 하지노오미 나카토모(土師臣中知)의 신주까지 합쳐 세 사람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드려 오는 사당이기도 하다.

이 아사쿠사신사의 제사(祭祀) 축제인 ‘마쓰리’(祭)는 일본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3대 마쓰리’의 하나로 꼽혀 온다. 마쓰리의 명칭은 도쿄의 ‘산자마쓰리’(三社祭)라는 이름의 대축제이다. 해마다 5월16일부터 18일까지 3일간 아사쿠사신사의 ‘산자마쓰리’는 ‘미코시’라는 신주를 모신 가마를 가마꾼들이 떠받들고 사자춤 등을 추면서 온 거리를 떠들썩하게 누벼댄다. 그런데 이 제사 축제를 산자마쓰리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다. 즉 세 사람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라는 데서이고, 당초 이 신사의 명칭은 ‘산자묘진’(三社名神)이었기에 ‘산자마쓰리’로 불려 온다. 지금처럼 사당 이름을 아사쿠사신사로 바꾼 것은 1873년부터라는 게 관계자의 말이다.

이 아사쿠사신사를 좌측으로 끼고 있는 기다란 도로는 ‘우마미치도리’(馬道通り)로 불린다. 그 옛날 이 고장에 커다란 말목장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이 고장에서 말목장을 경영했던 것은 다름아닌 히노쿠마노 하마나리와 다케나리 형제였다. 10세기 초의 일본 고대 왕실 문서에 보면, 병부성(兵部省)의 각지 마우(馬牛) 담당관 중에 무사시국(현재의 도쿄 지방)의 마목(馬牧)이 있다. 이 문헌에 따르자면 ‘무사시국의 히노쿠마 마목’이 있었다는 것이 입증된다. 그러므로 히노쿠마 형제는 고대 백제인 터전 아스카의 히노쿠마로부터 멀리 도쿄 지방으로 이주해 말목장을 경영했다는 기록이다. 물론 말은 5세기 이전에 백제로부터 왜왕실로 최초의 마필 한 쌍이 보내진 것(‘일본서기’)이며, 역시 백제인들이 말목장을 경영한 것을 추찰케 한다. 이에 관해 노다 우타로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히노쿠마 형제가 야마토(나라 지방)에서 무사시(도쿄 지방)로 소중하게 가지고 온 것은 자그마한 조선의 불상이었다. 차츰 무사시 일대에도 귀화인 주민(백제인, 필자 주)이 많아지게 되자 그와 동시에 불교가 민간신앙으로서 확장되고, 개인의 신앙으로서 히노쿠마 가문이 집안에서 모시고 있던 불상을 신앙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됐다. 그 결과 히노쿠마 형제는 말목장을 경영하는 한편으로 자그마한 불당을 세우게 됐고, 사람들이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 후 히노쿠마 하마나리며 다케나리가 세상을 떠난 뒤에 아사쿠사의 말목장과 더불어 관음보살 신앙이 드디어 성하면서 히노쿠마 집안에서는 이윽고 말목장보다는 절을 잘 이어가는 일을 가업으로 삼게 된 것이다.”(淺草觀音’)

물론 ‘강물에서 관음불상을 그물로 건졌다’는 것은 신앙심을 고조시키려 꾸며낸 예전 설화일 것이다.

한국외국어대 교수

senshy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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