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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50> 왕인 박사의 詩 ''나니와쓰노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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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08-29 17:13:00 수정 : 2007-08-29 17: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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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토쿠왕에 헌정… 日 정형시 ''와카''의 뿌리 일본 속의 백제 왕인 박사의 본 터전은 오사카 땅인 ‘구다라스’ (백제주)의 ‘나니와’ (難波, ‘난바’로도 부름)라는 나루터 지역이다. 현재오사카중심의번화가인‘난바’ 이다. 일본 오사카부에는 한국인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왕인 박사의사당 ‘다카이시신사’(高石神社, ‘다카시노신사’로도 호칭)가 현존하고 있다.일본 왕실이 제사를 직접 주관하고 관리했던 다카이시신사(‘오사카부 다카이시시 다카시노하마 4-1-19, 궁사 門林晃彦’)가 국가 사당이라는 사실은 일본왕실 고대 문헌(‘神名帳’ 927년 왕실 편찬)에 기록돼 있는데다 사당에 게시된‘유서략기’ 에도 나온다.

다카이시신사의 창건 연도는 650년이며, 1635년에 재건됐다. 왕인 박사의 사당으로서 상세하게 알려진 사항을 보면 “다카이시신사에서는 고지(高志) 가문의 조상인 왕인(王仁)을 제사모셔 온다”(‘和泉名所圖繪’)고 적혀 있다. 오사카부 다카이시시 교육위원회에서 편찬한 ‘다카이시시에 관한 문헌집’(高石市關文獻集, 1960)에도 “고지 가문(高志連)의 조상을 제사모시고 있다는 다카이시신사는 도리어 왕인박사를 제사모시는 사당(祀廟)으로 알려져 온다”고 명기돼 있다.
고지 가문이란 왕인 박사 직계 후손 씨족의 하나로 명문가였다. 고지 가문의 대표적 인물은 나라 도다이지(東大寺)를 창건한 백제인 고승 행기(行基, 668∼749) 대승정이기도 하다. 다카이시시의 명칭도 “본래 왕인 박사 가문인 ‘고시(高志)’에서 고시(高石)라는 도시 이름이 생겼다”고 ‘다카이시시에 관한 문헌집’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지역은 고대 왕인 가문이 후대에 이르기까지 번창했던 곳임을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왕인 박사는 백제인 왕궁 터전 구다라스의 나니와쓰에서 왕실의 애제자인 ‘오사자키’ 왕자(오진왕의 제4왕자)를 ‘닌토쿠왕’(仁德 5세기)으로 추대하는 시 ‘나니와쓰노우타’(難波津歌)를 지었다(紀貫之 ‘古今集’ 912년)고 한다. 에도시대(1603∼1867)의 국학자 에무라 홋카이(江村北海 1713∼1788)는 “오진 천황이 서거한 뒤 왕인이 일본 최초의 와카(和歌)인 ‘나니와쓰노우타’(일명 ‘매화송’)를 지어 새 천황에게 헌정했다. 이 와카는 31문자로 쓴 것이다. 닌토쿠 천황은 나니와쓰로 천도했다. 혹자가 말하기를 왕인은 이미 일본에 귀화한 지 오랜 세월이어서 우리나라 언어에 능숙하여 와카를 짓기에 이르렀다”(‘日本詩史’ 1771, 목판본)고 밝혀, 오늘날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전통 정형시 와카의 효시가 왕인 박사의 ‘나니와쓰노우타’임을 확인시켰다.
◇일본 신사의 입구를 지키는 개 형상의 ‘고마이누’(고구려의 개).

‘나니와쓰노우타’는 우리나라의 향찰, 이두와 같이 일본말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으로 왕족과 귀족 자제들은 이 와카를 붓글씨로 쓰면서 글공부를 하는 교본으로 삼으며 일종의 ‘부가(父歌)’인 아버지의 노래라고 찬양했다(앞, ‘고금집’). 닌토쿠왕이 나니와쓰(난바)에다 지은 언덕 위의 새 왕궁은 ‘다카쓰노미야(高津宮)’로 명명했는데, 이는 나니와쓰 나루터 방향을 널리 굽어보며 백제로부터 계속 뱃편으로 들어오는 구다라(백제) 사람들과 그들의 나니와쓰 생활 현장을 살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닌토쿠왕은 “높은 궁전에서 아래쪽 민가의 지붕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오르는지 지켜보다가 연기가 오르지 않자 3년 동안 조세를 면제”(‘일본서기’)한 어진 정치가로 알려졌는데, 이는 모름지기 왕인 박사의 유교적인 가르침이 아니었나 싶다. 왕인 박사 최초의 와카를 ‘아버지의 노래’로 모든 이가 배운 것도 그러한 맥락으로 보여진다.
이 같은 왕인의 발자취는 훗날 땅속에서 계속해 발굴되고 있는, ‘나니와쓰노우타’를 붓글씨로 쓴 ‘목간(나무쪽)’들로 증명되기도 한다. 1998년 8월에는 일본 시코쿠의 도쿠시마시(德島市 國府町)의 ‘간논지(觀音寺)’ 유적지에서 왕인 박사의 ‘나니와쓰노우타’ 목간이 발견돼 일본 학계가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그 해 11월4일, 도쿠시마매장문화센터는 왕인 박사의 “만요가나(한국 향찰, 이두와 같은 한자어 표기법) 한자 글씨로 쓴 와카의 목간이 발굴되었다”고 발표했다. 와카 목간 발굴에 참여했던 교토교육대(고대사 담당) 아이다 아쓰무(相田 翠) 교수는 그 무렵 필자에게 “이 목간 글씨를 쓴 것은 7세기 후반의 관리들이 왕인의 ‘나니와쓰노우타’를 공부하느라 붓글씨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발굴된 목간들 중에는 ‘국부(國府)’의 장관을 가리키는 ‘국수’(國守)라고 쓰인 목간 등 8점이 함께 나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목간에는 일본어 가타카나 글씨 중 한 개의 글자(‘ツ’)가 나타나고 있어서 일본의 ‘가나’ 글씨 등장 시기 등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다카이시신사 본전의 큰 방울들.(위)◇다카이시신사 본전 신전막.

우리나라 고대 향찰 표기는 “신라만이 아니고 백제에서도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6세기대 4면 목간에서 향찰 표기가 나타난 것을 발견했다”(한국목간학회 학술대회. 2007년 1월10일)고 김영욱 서울시립대 교수(국문과)가 발표했다. 그러고 보면 왕인이 5세기 일본에서 향찰과 이두 방식의 한자 응용으로 일본 최초의 와카를 읊은 것도 백제에서의 표기 방식을 준하여 고대 일본어로 쓴 것임이 추찰된다. 우리나라로부터 일본에 향찰이며 이두가 전해진 데 대해 가와사키 신지(川崎眞治) 교수는 “한자를 가지고 조선어를 기록한 이두식 표기법은 일본어의 한자식 표기법인 만요가나와 똑같은 것이었다고 말하기보다는 조선 쪽의 것이 스승격이고, 일본 만요가나는 제자 격이었다”(‘混血の神神’, 1975)고 지적했다.
왕인 박사의 ‘나니와쓰노우타’가 붓글씨로 발견된 것은 나라 땅 호류지(法隆寺)의 5중탑 천정의 낙서에서였다. 5중탑을 해체하여 복원 작업하던 중에 낙서들이 천정이며 벽면에서 다량 발견됐다. 호류지 5중탑은 금당과 함께 나라 땅에 와 있던 백제 건축가들이 607년에 준공한 건축물이다(關野貞, ‘法隆寺金堂塔婆中門非再建論’ 1905). 도쿄국립문화재연구소 구노 다케시(久野健) 박사는 호류지 5중탑 천정의 ‘나니와쓰노우타’ 붓글씨 낙서의 주체에 관한 연구에서 “대체로 7∼8세기의 미술 공예를 담당했던 제작자들은 도래인 내지는 도래인들의 자손들이었다는 것은 상식이 됐다. ‘나니와쓰노우타’ 낙서 앞부분을 판독한 것은 후쿠야마 도시오(福山敏雄) 박사였다”(‘白鳳の美術’ 1978)고 밝히면서, 도래인이란 곧 한국인이라고 지적했다. 7세기 초 이미 왕인의 와카가 일본 내 백제인들에게 널리 애송되고 있었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다카이시신사에 게시돼 있는 ‘유서략기’.

여기서 왕인 박사의 ‘나니와쓰노우타’에 관하여 한가지 지적할 사항이 있다. 10세기 초 와카학자였던 기노 쓰라유키가 고대의 와카들을 왕명(다이고왕)에 의해 정선하여 게재한 저서 ‘고금집’의 서문(‘가나서’)을 보면 ‘나니와쓰노우타’는 왕인이 일본 고대에 한자어로 쓴 만요가나로 읊은 최초의 와카임을 밝혔기 때문에 후세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이후 근세의 여러 학자들도 왕인의 와카가 그 효시임을 지적했다.
그런데 근년에 일본의 고전문학 출판사에서 간행되는 ‘고금집’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와카집의 가장 중요한 앞부분의 서문(‘가나서’)을 송두리째 빠져 있다. 백제인 왕인으로부터 일본 고대의 와카가 창시되었다는 사실을 생략한 셈이다. 더욱 의아스러운 점은 일본의 현역 시인이며 대학 국문학과 교원인 오오카 신(大岡信) 교수의 애매모호한 처사이다. 그는 왕인의 ‘나니와쓰노우타’를 예시하며 해설한 한 신문 칼럼에서 작자가 엄연히 왕인인데도 ‘작자 불명(讀人しらず)’이라고 썼다(요미우리신문 1998년 11월5일). 여기 참고삼아 부기해 두자면 필자는 일본에서 귀국한 직후인 1997년 2월호 ‘현대문학’(1997년 2월호)에 게재한 ‘일본 와카를 창시한 왕인 박사와 한신가’라는 졸론을 발표하며 “난파진에는 피는구나 이 꽃이 겨울잠 자고 지금은 봄이라고 피는구나 이 꽃이”라고 ‘난파진가’를 번역해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한 바 있다.
◇하고로모역.◇일왕실 관할 신사임을 알리는 석비.◇다카시노하마 역사.(시계방향)

도쿄대학 문학부 우노 세이이치(宇野精一) 교수는 1984년 9월9일, 서독의 함부르크대학 초청 제7차 퇴계국제학술대회에서 “왕인 박사는 일본 문화의 은인”이라고 찬양했다(‘퇴계학보’ 제44집). 우노 교수는 1990년대 줄곧 필자와도 도쿄의 ‘한자연구회’ 회원으로 자주 만나 ‘나니와쓰노우타’를 함께 읊기도 했다. 우노 교수는 “왕인 박사가 백제로부터 일본에 건너오지 않았다면, 고대 일본 문화는 몇백년 이상 뒤졌을 것입니다”고 재차 강조했다.
따져볼 것도 없이 고대 일본에서 왕인 칭송은 심지어 왕실 조정에서도 활발했다. 10세기 중엽 일본 제61대 스자쿠왕(朱雀, 930∼946 재위)은 두드러지게 왕인 박사를 흠모하며 찬양한 인물이다. 필자가 발굴한 고대 문헌(‘日本紀竟宴和歌’ 934년 왕실 편찬)에 따르면 스자쿠왕은 조정의 신하들에게 왕인 박사에 의하여 왜나라로 문자 문화가 전해진 사실을 입증하도록 ‘왕인찬가’를 읊게 했다. 이때 뽑힌 찬가는 왕실의 조신이 지은 “해신의 바다 수많은 흰 파도를 넘고 건너서 여덟 섬 나라에는 글월 전해졌노라”(橘直幹 지음)는 내용의 와카로서, 스자쿠왕이 왕인 박사의 공헌을 얼마나 칭송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왕인 박사의 백제 문화 일본 전파의 업적에 대하여 근년에 가장 설득력 있게 밝힌 것은 도호쿠대학 사학과 세키 아키라(關 晃) 교수의 다음 같은 글이다. “일본 문화가 발생한 것을 밝히는 경우에 반드시 관습처럼 인용하는 글이 있다. 즉 나라 시대
◇홍윤기 한국외대 교수

(奈良 710∼784)의 한시집(漢詩集)인 ‘가이후소(懷風藻)’의 서문에는 왕인이 처음으로 일본에다 글을 가르친 것을 칭송하고 있다. 또한 고대 불교 설화집인 ‘니혼료이키’(日本靈異記)의 서문에도 역시 불교 서적과 유교 서적이 왕인에 의하여 백제로부터 건너왔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歸化人’ 1966)
왕인 박사의 사당 다카이시신사는 오사카의 ‘난바’역에서 떠나는 ‘난카이선’(南海線) 전철로 ‘하고로모’(羽衣)역까지 가서 ‘다카이시선’(高石線) 전철로 갈아타고 종점 ‘다카시노하마’(高師濱)역에서 내리면 그 왼쪽으로 돌아간 대로변에 위치해서 찾아가기 쉽다. (다음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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