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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49>나라 명사찰 사이다이지 西大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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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08-22 16:40:00 수정 : 2007-08-22 1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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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화가가 그린 日국보 ''십이천화상'' 보관 일본 나라시 서쪽에는 고대 백제인의 명찰 사이다이지(西大寺)가 위치해 있다. 동쪽에 있는 도다이지(東大寺)와 더불어 동서에 각기 양립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사찰은 764년 백제 계열의 쇼토쿠 여왕(764∼770 재위)이 국가의 번창과 평화를 기원하느라 7자(尺) 금동 사천왕상을 만들도록 명하면서 왕립 사찰로 조성됐다(‘西大寺由緖’).

백제인 사찰 건축가들이 765년부터 짓기 시작해 780년까지 15년에 걸쳐 완성했다. 완공 당시에는 금당을 비롯하여 동서 양쪽의 거대한 당탑 등 모두 110여개 불당 건조물이 있었으나 몇 차례에 걸친 화재로 상당수 당원(堂院)이 불탔다.
동탑 자리 등 큰 기단과 주춧돌들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 웅장했던 지난날의 영광을 소리없이 보여주고 있다. 또 이 사찰에는 본존 석가여래입상과 백제인 행기대정승(668∼749)의 목조 행기보살좌상 등 국보급 중요문화재가 가득하다.
사이다이지 가람은 일본의 진언율종총본산(眞言律宗總本山)이기도 하다. 고대 일본의 대표적인 화가들의 발자취가 담긴 열두 폭 비단천의 ‘국보 불화’ ‘십이천화상’(十二天畵像)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우리는 고대 일본에서 활약한 한국인 화가들을 과연 몇 명이나 알고 있을까. 기껏해야 610년 고구려에서 왜왕실로 건너가 나라(奈良)의 호류지(法隆寺, 법륭사)의 ‘금당벽화’를 그린 담징스님 혹은 나라 아스카(飛鳥)의 ‘다카마쓰즈카’(高松塚, 고송총) 고분 속의 ‘고구려 귀인 벽화’ 등을 그린 고구려인 화가 황문화사(黃文畵師) 정도일 것이다. 참고로 다카마쓰즈카 고분 벽화는 14일 현재 곰팡이로 인한 부식 등으로 벽면을 분할해 떼는 해체작업이 한창이다. 이 벽화는 해체 뒤 나라국립박물관으로 이전, 보관될 예정이다.
고대 일본에서 활약한 한국인 화가들은 여러 명이다. 사이다이지 가람의 12폭으로 그려진 12명의 신상(神像) 그림인 일본 국보 ‘견본저색 십이천상폭’(絹本著色十二天像幅)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도쿄대학의 와쓰지 데쓰로(1889∼1960) 교수는 그의 명저 ‘고사순례’(古寺巡禮, 1947)에서 “이 그림은 헤이안시대 초기 것으로 화가는 구다라노 가와나리(百濟河成, 782∼852)거나 고세노 가나오카(巨勢金剛, 9세기)와 같은 당대 거장들의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구다라노 가와나리는 백제 계열이며 고세노 가나오카는 신라 계열의 화가였다. 그는 또 명화 ‘십이천상폭’을 논하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일본의 국보급 불화 ''십이천화상''은 한국계 화가가 8∼9세기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헤이안 초기 화가 구다라노 가와나리, 고세노 가나오카는 사실적인 경향으로 유명하지만, 그 사실(寫實)은 모름지기 선(線)을 가지고 이룬 것이리라. 구다라노 가와나리와 고세노 가나오카가 헤이안 시대(794∼1192) 전반기 일본화(日本畵)의 대성자(大成者)임과 동시에 일본화 운명을 결정시킨 대가로 봐야 한다.” 한국인 출신의 두 화가는 9세기 일본화 발전의 전면에 서서 대성한 대표적인 화가라는 찬사인 셈이다.
구다라노 가와나리는 헤이안시대 전기의 화가인 동시에 조정의 고관으로서 “활도 잘 쏘고 무용(武勇)에도 탁월했다”고 사료는 전한다. “특히 구다라노 가와나리는 그림 솜씨가 출중하여 종종 왕실의 어전에 불리어나가 그림을 그렸는데, 산수초목(山水草木)의 그림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다고 칭송받았다”(‘인명사전’ 三省堂, 1978)는 것. 일제 치하 일본 문부성(교육부) 편찬 ‘국어’ 교과서에는 구다라노 가와나리의 뛰어난 그림 솜씨의 일화가 전하는 교과목이 있을 정도였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그린 그림의 명칭들이 후대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탐구해 내야 할 과제라고 본다.
한편으로 신라계 고세노 가나오카는 880년 석가모니를 위해서 ‘선철 72제자상’(先哲七十二弟子像)을 그린 것으로 역시 대화백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그는 ‘선철 72제자상’을 비롯해 ‘하연병풍화’(賀宴屛風畵, 885), ‘홍유상’(鴻儒像, 888) 등으로도 유명하다. 구다라노 가와나리가 산수화의 거장인 데 비해 그는 인물화의 명인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사찰내 금당(왼쪽)과 화재로 소실된 동탑의 자리가 웅장했던 과거 영광을 증명하고 있다.

또 고세노 가나오카의 아들 고세노 긴타다(巨勢公忠, 10세기) 역시 대화가로서 949년 무라카미왕(村上, 946∼967 재위)의 요청으로 8첩 병풍 그림인 ‘곤원록’(坤元錄)을 그려 명성을 떨쳤다. 고세노 긴타다는 그림을 그리면 자기 이름을 반드시 그림 뒷면에다 써서 왜나라에서 최초로 그림에다 서명을 시작한 한국인 화가로도 이름이 높다.
고대 한국으로부터 일본의 고대 야마토 지방에 건너가서 호족 세력을 이룬 가문 중 고세노 가나오카 등 ‘고세’씨는 어디에 삶의 터전을 잡았을까. 그곳은 현재 나라현의 ‘고세시’(御所市)의 ‘고세’(古瀨) 지역 일대이다. 한자어의 이두식 명칭으로 모두 ‘고세’ 가문을 가리키는 고대 신라인 호족 고세(巨勢, 거세)씨 터전의 지명이다. 이 고세시의 소가강(曾我川, 고대에는 명칭이 百濟川이었으나 20세기 초 일제가 개칭했다) 상류에 가면 그곳에는 고세사(居世寺)의 옛 가람 유적이 있다.
‘거세’의 한자어 ‘거세/居世’는 일본어로 ‘고세’로 읽는다. 그러니까 ‘고세시’의 ‘고세/御所’며 ‘고세/古瀨’ 그리고 거세씨의 ‘고세/巨勢’는 모두가 ‘거세/居世’의 일본어 발음인 ‘고세’이다. 옛날부터 일본에서는 한자어를 차용해서 고대 한국의 이두식으로 한자의 음만 똑같으면 음을 갖다 맞춰 여러 가지 한자를 차자(借字)로 썼다. 이는 도쿄대 국문학 교수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1882∼1944) 교수가 인정한 바이다(‘향가 및 이두 연구’ 1929). 이후 일본 역사학자들에게서 공론화됐다.
◇사이다이지의 본존 석가여래입상.(왼쪽)◇사이다이지를 알리는 간판.

고세시는 현재 옛날의 초석만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고세사는 거세씨 가문의 사찰로 씨사(氏寺)였으며, 모름지기 신라 박혁거세 임금을 위한 사찰로 추정된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근년에 고세시의 미야야마(宮山) 고분에서 4세기 말∼5세기 초 가야(伽倻)토기가 발견된 일(‘讀賣新聞’ 1998. 12.4)이다. 이 지역이 고대 신라 도래인들의 중심지의 하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고대의 한반도에서 제작된 이 토기는 정교한 선형도질(船形陶質) 토기의 일부인데, 뱃머리에 설치하는 견판(堅板)과 현측판(舷側板) 부분(높이 6.2㎝, 너비 5.6㎝, 두께 1.7㎝)이 나타나 있다. 미야야마 고분은 야마토의 호족 가쓰라기(葛城) 가문의 가쓰라기노 소쓰히코(葛城襲津彦, 5세기)의 묘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고대 일본의 ‘백제기’(百濟記)의 사치히코로 기록돼 있어 가야토기 발견과 함께 주목할 부분이다.
고세노 가나오카 가문은 고대에 신라로부터 야마토 지방에 이주해와서 살던 큰 세력가였다. 고세씨 가문이 신라인이라고 하는 뿌리는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로부터 논하게 된다. 일본의 사학자며 언어학자였던 고쿠가쿠인대학 가나자와 쇼사브로(金澤庄三郞, 1872∼1967) 교수는 20세기 초 한국어와 일본어가 똑같은 언어 계열이라고 하는 ‘일한양국어동계론’(日韓兩國語同系論, 1902)의 저자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가나자와 박사는 이 저서에서 “고세(巨勢) 가문은 박혁거세의 거세(巨世)라는 존칭에서 생긴 것”이라고 논술했다.
야마토(大和) 지방이란 지금의 일본 나라현(奈良縣) 일대로, 2세기를 전후해 한국인이 이 지역에 집단 거주하면서 각 지역을 지배하는 호족으로 군림했다. 그들은 뒷날 신라인 대화가 고세노 가나오카의 ‘고세’(巨勢) 가문을 비롯하여 ‘헤구리’(平群) 가문, ‘가쓰라기’(葛城) 가문, ‘소가’(蘇我) 가문, ‘와니’(和珥) 가문 등이다. 교토대학의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5세기 중엽부터는 ‘가쓰라기’를 비롯해 ‘헤구리’ 가문 등이 먼저 조정의 대신 자리에 앉았다. 그 후 고세노 오히토(巨勢男人, ?∼529) 대신의 뒤를 이어서,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 ?∼570)가 대신이 되고, 소가씨가 조정에서 확고한 지위를 만들어갔다”(‘歸化人’, 1965)는 것.
소가 대신 가문은 백제 계열 도래인들의 불교집단 세력화에 성공함으로써 신라계 고세노 오히토의 최고장관 대신 자리가 백제계 소가노 이나메 대신 쪽으로 기울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596년에 백제에서 모셔온 건축가들에 의해 야마토의 ‘아스카’ 땅에 일본 최초의 칠당가람 아스카노데라(飛鳥寺, 法興寺)가 섰고, 607년에는 나라의 호류지(法隆寺)가 잇대어 섰다. 다시금 백제 불교의 거센 파장은 마침내 나라땅 동쪽에 일본 최대의 사찰 도다이지(東大寺)를 748년에 세웠으며, 이어서 765년에는 도다이지에 버금가는 나라땅 서쪽의 사이다이지(西大寺) 가람까지 건조한 것. 오늘의 사이다이지는 일본 왕실의 백제 불교 전성기의 큰 발자취이다. (다음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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