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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24>日 천태종 총본산 히에이산의 엔랴쿠지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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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01-24 13:10:00 수정 : 2007-01-24 13: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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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의 후손 ''전교대사'' 최징이 개창
가족묘 고분·도요지에도 신라 흔적 뚜렷
히에이산(848m)은 일본 고대 왕도였던 교토시 동북쪽으로 솟구친 성산(聖山)이다. 이 산에 올라서서 동쪽을 바라보면 바다처럼 펼쳐지는 ‘비와코’라는 일본 최대 호수(면적 672.4㎢)가 시원스럽게 전개된다. 이런 경승지의 산 정상에 자리 잡은 거대한 가람이 명찰 ‘엔랴쿠지(延曆寺)’. 일본 천태종 총본산인 이 사찰은 전교대사(傳敎大師) 최징(最澄·사이초 767∼822)이 처음으로 산 위 한 귀퉁이에다 움집인 암자를 지으면서 창설됐다.
전교대사 최징은 신라인 후손이다. 그는 히에이산 동쪽 산기슭 마을에서 신라인 오토모(大友) 가문 ‘미쓰노오비토 모모에’(三津首百枝 8세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징의 속명은 ‘미쓰노오비토 고야’(三津首廣野). 오우미 땅 ‘사카모토(坂本)’에 자리 잡고 있는 지금의 ‘쇼겐지(生源寺)’라는 사찰 터전이 그의 생가다. 이 지역은 신라인 호족 집단 오토모 가문의 오랜 역사의 본고장이다. 주목되는 사실은 신라인 “오토모 가문에서는 고대로부터 이 고장에서 신라명신(新羅明神)의 신주를 모신 사당을 세우고 대대로 제사를 받들어 왔다”(太政官牒 ‘天台座主記’ 866)는 것. 이러한 발자취가 기록된 866년(정관 8) 7월에는 이미 44년 전에 세상을 떠난 승려 최징에게 세이와천황(858∼876 재위)으로부터 ‘전교대사’의 시호가 내려졌다.

◇근본중당.


신라인 전교대사 최징이 개창한 엔랴쿠지 입구로 들어서면 나지막한 언덕길을 따라서 최징의 성지로 이름난 법당인 ‘근본중당’(根本中堂·일본 국보 건조물)으로 가게 된다. 이 길가에는 천태종을 선전하는 그림 간판(‘조사 어행적 회간판’)들이 줄이어 나그네의 눈길을 끈다. ‘쇼겐지’에서 탄생하는 그림을 보면 그 밑쪽에 최징의 신분을 중국인이라고 쓴 설명문이 있다. “전교대사 최징은 후한(後漢) 효헌제(孝獻帝)의 후손으로서 일본에 귀화한 ‘미쓰노오비토’(三津首) 일족이다”라는 주장이다.
태정관첩 ‘천태좌주기’에 오토모 가문이 신라인으로 명시되어 있는데 언제부터 신라인 ‘미쓰노오비토’(삼진수) 가문이 중국인으로 뒤바뀐 것일까. 문헌을 조사해보니, 9세기 초에 일승충(一乘忠)이 썼다는 ‘에이산대사전’(叡山大師傳)을 18세기 이후에 필사한 ‘에이산대사전’에서 최징을 중국인 후손으로 쓰고 있다. 일승충이 처음으로 전교대사 최징에 관해 기록했을 때는 모름지기 스님을 신라인으로 썼을 것 같다. 태정관첩 ‘천태좌주기’는 9세기 후반인 서기 866년 세이와 천황이 최징 스님에게 전교대사의 시호를 내렸을 당시에 쓰인 관보(官報)이므로 이 고문서 이상 더 정확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세에 ‘에이산대사전’을 필사하던 당시에 역사 왜곡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왜곡된 대목은 다음과 같다.
“히에이산 동쪽 기슭의 사카모토 땅에는 후한의 효헌제 자손으로서 일본에 귀화한 미쓰노오비토 일족이 번영해 왔다. 그 당시인 ‘진고게이운 원년’(서기 767) 8월 18일의 일이다. 사카모토 땅에는 하늘에서 연꽃잎이 떨어져 내리는 축복 된 징조가 나타났고, 때마침 미쓰노오비토 모모에의 집에서는 옥 같은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뒷날 일본 천태종 히에이산의 개조가 된 사이초 성인이었다.”

◇전교대사 최징의 석조좌상(왼쪽), 고대 신라인들의 ‘백혈(百穴)고분군’.


‘일본서기’(720)에 보면 “오토모노누시(大友主)는 미와노키미(三輪君)가 조상”(스이닌 3년조)이라고 한다. 여기서 가리키는 ‘미와노키미’는 신라신인 대국주신이다. 즉 전교대사 최징은 신라 계열의 후손인 셈이다.
근세며 심지어 현대 일본에 와서조차 고대 일본에서 눈부시게 활약한 한국인들이 예외 없이 중국인으로 뒤바뀌었다. 일본 왕실 역사책 ‘고사기’며 ‘일본서기’에서 ‘백제인 왕인’으로 기록된 왕인 박사를 고마자와(駒澤)대학 와타나베 미쓰오(渡邊三男 1908∼) 교수는 “왕인은 한(漢) 고황제(高皇帝)의 후손”(‘日本の苗字’ 1965)이라고 쓰고, 아스카 시대(592∼710) 왕실 재무장관이었던 신라인 진하승(秦河勝 6∼7세기)을 가리켜 “진나라 시황제의 후손”이라고도 했다. “진나라 시황제의 성씨는 영씨(瀛氏)”(司馬遷 기원전 145∼68 ‘史記’)라고 했으니 진하승이 진시황제 후손이라면 영씨 성이어야 하지 않을까.
현대 사학계에서 전교대사 최징이 신라인이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입증한 것은 도쿄대 사학과의 이노우에 미쓰사타(井上光貞 1917∼1983) 교수. 이노우에 교수는 고대 일본 고승들은 거의 한반도 출신임을 고증하였다. 후학을 위해 여기 굳이 함께 거명해 둔다. “고승들은 조선인 출신으로서 도자(道慈)를 비롯하여 지광(智光) 경준(慶俊) 근조(勤操) 도소(道昭) 의연(義淵) 행기(行基) 양변(良弁) 자훈(慈訓) 호명(護命) 행표(行表) 최징(最澄) 원진(圓珍) 등이다”(‘王仁の後裔氏族と佛敎’ 1943). 이 논문은 이노우에 교수의 도쿄대 사학과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이다. 이 논문에서 왕인 박사는 완벽한 백제인으로 규명돼 있다.

◇전교대사 최징이 생가 ‘쇼겐지’에서 탄생하는 그림(‘조사어행적회간판’).


지금부터 1240년 전인 8세기 후반, 아름답기 그지없는 비와코 호수가의 신라인 호족 오토모 가문의 큰 산마을 사카모토에서 옥동자가 태어난 발자취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전교대사의 아비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산에 올라가서 아들이 태어나기를 기도하게 되었다. 히에이산 왼쪽 기슭인 사당(神宮) 오른쪽에 이르자 홀연히 그윽한 향기가 일대로 번지기 시작했다. 향기의 근원을 찾아내기 위하여 그곳에다 초가집 한 채를 세웠다. 그리고는 7일 동안 모든 죄를 뉘우쳐 참회하려고 기도를 시작했더니 4일째 되던 날 밤 태몽을 꾸고 아들을 얻게 되었다”(‘에이산대사전’).
이 전기에서 사당이란 히에이산 아래 규모가 거대한 ‘히요시대사(日吉大社)’이다. 이 사당의 제신 대국주신이 다름 아닌 ‘신라명신’이다. 도쿄대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는 “히요시대사에서는 미와산 대국주신의 신주를 이곳으로 모셔 왔다”(‘국보중요문화재안내’ 1963)고 밝혔다. 미와산 신산의 대국주신은 여러 곳에서 봉안돼 있으며, 오미와신사(나라 사쿠라이시)에서는 대국주신의 신주를 현재 ‘미와명신’으로도 호칭하고 있다. 히에이산 서쪽 산기슭에 지금도 서 있는 ‘히요시대사’에는 서본궁 본전(일본 국보)과 동본궁 본전(〃) 등 사당 두 채가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서본궁에 모신 신주는 역시 ‘이즈모대사’에서처럼 서쪽(바다 건너 모국 신라)을 바탕으로 하는 신라명신 대국주신을 봉안하고 있고, 동신궁에도 신라신 대산작신(大山昨神)을 모시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 이웃으로는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온조지 사찰 경내)도 현재까지 건재하고 있다.
이 인근이 고대 신라인들의 큰 터전이라고 하는 것을 고증하는 것이 이 지역의 횡혈식(橫穴式) 고분인 ‘백혈고분군(百穴古墳群)’이다. 한국 고대 지석묘처럼 넓적한 바위로 지붕(돔형식)을 얹고 그 밑에 바위로 양 기둥을 세워 현실에 이르는 선도(통로)까지 갖춘 격식 있는 신라인들의 가족묘(2∼3명 매장) 고분군으로 우리를 주목하게 한다.

◇신라인 고승 영충대사가 세운 숭복사 터전이 주춧돌들과 함께 남아 있다.


교토대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가와치(구다라스)의 스에무라(陶邑)와 그 주변 지역은 주목할 만한 스에키 생산지였다. 도래인계 스에키 생산자 집단의 경영은 가와치에서 크게 눈에 띈다”(‘倭國の世界’ 1976)고 지적했다. 또한 와세다대 사학과 미즈노 유(水野裕) 교수도 “도기, 즉 스에키는 신라구이(新羅燒)를 말하는 것으로서 마쓰에(松江)시의 중간 바다에 면한 지역 일대에서 수많은 요지(窯址)가 발견됐으며, 텐표(天平 729∼749) 시대 이전부터 스에키 제작 직업부가 존재하였다는 것이 문헌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도 일치하고 있다”(‘出雲のなかの新羅文化’ 1978)고 스에키가 신라인들의 소산임을 강조했듯, 히에이산 동쪽 기슭 일대가 고분(古墳)시대 신라인들의 거점이었다는 사실이 ‘백혈고분군’에 의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백혈고분군’에서 출토된 스에키 등 오지그릇류와 제사용 불을 지피는 소형 아궁이며 가마솥과 냄비 등도 다수 발굴된 점이다. ‘스에키’는 쇠기(鐵器)라고 하는 한국어에서 생긴 말이다.
더구나 이 고분 지대로부터 불과 200m 정도 거리의 언덕 위쪽에는 서기 667년에 창건했던 ‘소후쿠지 터전(崇福寺趾)’이 주춧돌들과 함께 남아 있다. 이 절터는 신라인 고승 영충대승도(永忠大僧都 8∼9세기)가 신라에서 건너와 있던 절터라는 것도 이 지역의 신라인들과의 깊은 연고를 살피게 하고 있다. 일본 역사에 의하면, “사가 천황(嵯峨天皇 809∼823)은 오우미(近江)의 가라사키(韓崎)에 거동하여 소후쿠지(숭복사)에 들렀을 때, 대승도 영충(永忠) 스님이 차를 달여서 대접했다”(‘類聚國史’ 892)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전교대사 최징 탄생지는 고대 신라인들의 일대 거점이었음을 문헌학뿐 아니라 고고학적인 고분군과 각종 유물들에서도 잘 살필 수 있다.
(다음주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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