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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日백제왕족 위한 사찰 세워 성지로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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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12-27 23:49:00 수정 : 2006-12-27 23: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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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구다라스 百濟洲 의 백제사 사적공원 옛 구다라스(百濟洲) 지역인 오사카 땅에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백제사 옛 터전’이 보존된 곳이 있다. 오사카부 히라카타(枚方)시 니시노(西之)초 나카노미야(中宮) 1-68 절터다. 이곳은 오사카부가 직접 관할하는 ‘구다라데라(百濟寺) 사적공원이다. 이곳에선 현재 유물 발굴이 한창이다. 수백 년 된 낙락장송으로 둘러싸여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이 사적공원은 언덕 지대에 위치해 히라카타 시내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전망도 좋다. 저 멀리 북쪽으로는 샤카타케(釋迦岳)의 산봉우리가 아득히 보인다. 또 동쪽으로는 ‘나가오노다이’ 고지도 시야에 뚜렷이 들어온다.

나가오노다이에는 5세기 말의 백제 오경박사 ‘왕인묘’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지역은 백제 계열의 닌토쿠왕(5∼6세기, 천황으로 불린 것은 670년 이후부터)에서 간무왕(8∼9세기)대에 이르기까지, 백제인 왕족들의 속살 깊은 연고지다. 쇼무왕(724∼749 재위)은 조칙을 내려 구다라스의 이곳에 백제 왕족들을 위한 사찰을 세웠다.
“조정(왜나라)의 중신이던 백제왕남전(百濟王南典)이 서거하자 쇼무왕은 애통하며 사묘(祠廟)와 백제사를 세우도록 조칙을 내림으로써 일본 왕실이 관장하는 새로운 성지가 됐다.”(히라카타시교육위원회 ‘백제왕씨와 특별사적 백제사적’)
백제사 사적공원에는 고대의 거대한 가람 터의 주춧돌들이 각기 제자리에 잘 보존돼 금당을 비롯한 동탑과 서탑, 중문과 남문, 금당 뒤의 강당과 식당 터까지 자세히 살필 수 있다. 이와 같은 가람 배치는 신라의 감은사(感恩寺) 터전을 방불케 한다. 이 터전은 160만㎡나 되는 큰 가람의 옛 터전으로서 가마쿠라 시대(1192∼1333) 등 두 번의 화마로 소실된 채 오늘에 이르는 유서 깊은 곳이다.
일본정부(문화청)는 이 백제사 사적공원 터를 1952년 3월 일본 최초의 ‘특별사적’으로 지정했다. “오사카부 지역의 특별사적은 백제사 사적공원과 오사카성(城) 두 곳뿐”(‘백제왕씨와 특별사적 백제사적’)이라고도 한다. 이곳을 찾을 때마다 필자는 가까운 시일 안에 한국인의 손으로 백제사를 그 옛날의 대가람으로 크게 복원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백제사 사적공원 어귀.


이 고장은 백제 왕족들의 성지로, 그들의 구다라스 본거지였을 뿐 아니라 백제 왕실 교육장관이던 왕인과 그 일족들과도 연고가 깊었다. 그러기에 왕인 묘지도 이곳에서 불과 3㎞ 남짓한 나가오노다이에 마련됐다.
백제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입증하는 고고학적인 발자취가 지난해 공개돼 큰 관심을 모았다. 그것은 인근 지역인 “‘나시즈쿠리 유적’에서 5세기 백제 ‘베틀’ 부품이 발굴된 일이다”(黑須亞希子, ‘나시즈쿠리 유적 출토 목제품에 관하여’ 2005). 이 사실은 지난해 6월 히라카타시교육위 다카노 마사루(高野勝) 위원장이 필자에게 ‘발굴 논문’과 함께 서신으로 알려줘 필자가 현지 답사까지 한 바 있다.
백제사 사적공원은 오사카 시내의 교바시역에서 한 시간쯤 게이한 본선(京板本線) 전철을 탄 뒤 히라카타역에서 내리면 가깝다. 전철역 남쪽 출구로 나와 나가오역(長尾驛)으로 가는 1번선 버스를 타면 된다. 이 버스로 약 10분 거리의 언덕인 ‘나카노미야’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면 백제사 사적공원이 널찍하게 펼쳐진다.
고대 백제인들이 5세기 중엽 상륙한 곳이 구다라스 터전인 난바(難波·나니와) 나루터, 즉 ‘난파진’이었다. 이 백제왕신사가 자리 잡은 오사카부의 히라카타시 역시 구다라스 땅인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고대 백제인들은 약 2000년 전인 야요이 시대(BC 3세기∼AD 3세기)에 기타큐슈 땅으로 건너왔다. 기타큐슈는 한국 남해안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최남단의 큰 섬이다. 기타큐슈 섬을 장악한 백제인들의 제2 진출지는 일본 열도의 안쪽 바다 깊숙이 구석진 바닷가 구다라스 벌판이었다. 백제인들은 기타큐슈로부터 대형 선박들을 띄워 동진(東進)했다. 오늘의 ‘세도나이카이(瀨戶內海)’라는 일본열도의 안쪽 바다다.

◇가람의 ‘서탑’ 터전.



백제인들은 난바 나루터 일대를 교두보로 하여 구다라스 땅을 백제인들의 새로운 개척지로 만들었다. 오사카시립대 사학과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郞) 교수는 “시텐노지(四天王寺)가 있는 우에마치(上町) 대지 일대가 난바(나니와) 땅”(‘일본역사’, 1970)이라며 이 터전에 고대 백제인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틀었다고 밝혔다.
이 난파진에서 백제인 오진왕(5세기)의 넷째 왕자 오사자키노미코토가 왕인 박사의 천거로 ‘닌토쿠왕’으로 등극했다.(紀貫之 ‘고금집’ 905) 그러나 천황 호가 아직 없던 시절이니만큼 닌토쿠는 천황이 아니라 왕으로 불린 것이 틀림없다. 그 당시 왕실 교육장관(西文首)이던 왕인은 실제 정무장관이었는데, 오진왕이 서거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왕좌가 비어 있었다. 태자였던 제5왕자 우지노와키이라쓰코가 바로 손위 제4왕자에게 등극을 권유하며 물러앉아 있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일본서기’) 왕인은 이에 오사자키노미코토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고하며 시가를 지었다. 그것이 일본 최초의 ‘와카(和歌)’인 ‘난파진가’(難波津歌)다.(‘고금집’)
“난파진에는/ 피는구나 이 꽃이/ 겨울잠 자고/ 지금은 봄이라고/ 피는구나 이 꽃이”
와카는 일본 전통의 정형시가다. 오늘날 일본의 국시(國詩) 와카는 백제인 왕인이 창시했다. 서정미 넘치는 ‘난파진가’는 그후 왕족과 귀족 자제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와카였다. 누구나 붓글씨를 공부할 때 “왕인의 시를 ‘아버지의 노래’(父歌)라고 부르며 목간에다 베껴 썼다.”(‘고금와카집’ 슌세이본, 1191)고 한다.

◇(사진 왼쪽)조선통신사가 일본어 ‘난파진가’를 한글로 쓴 것(교토박물관), ‘백제사 가람배치도’


백제로부터 종이가 이따금 건너왔다지만 워낙 희귀했기 때문에 그 무렵 종이도 흰 무명천과 마찬가지로 신에게 바치는 폐(幣·누사·가나자와 쇼사부로 ‘광사림’ 1925)로서 제사상에 모셔 올리거나 신구(神具·니기데 등)에다 사용했다. 일본 신사 등에서 지금도 신당 처마 밑에 매다는 시메나와(しめなわ·금줄)에 액막이 삼아 흰 종이조각을 끼우는 것도 그 발자취다. 610년 고구려 학승 담징이 왜 왕실로 건너와서 닥나무로 종이 만드는 제지법을 처음으로 일본에 가르쳤다(‘일본서기’)고는 하지만 종이는 매우 귀해 그 이후에도 오랜 세월 목간과 죽간에 글씨를 썼다.
와세다대 사학과 미즈노 유(水野祐) 교수는 일찍이 “일본의 닌토쿠 왕조는 외래민족 세력의 침입을 바탕으로 일어난 정복 왕조로, 그 지배층은 백제국 왕가와 똑같은 민족 계통에 속한다”(1978)고 단정했다. 또 미즈노 교수는 왕인 박사 권유로 왕위에 등극한 닌토쿠왕이 규슈에서 구다라스의 나니와로 동진해 왔다며 그 이동 배경으로 ‘고구려 광개토왕의 한반도 남하’를 들기도 했다.
백제인 닌토쿠왕은 구다라스의 큰 터전을 다스리면서 ‘가와치왕조(닌토쿠왕조)’를 꽃피웠다고 일본 역사(‘일본서기’ 등)는 기술하고 있다. 이노우에 마사오(井上正雄)는 명저 ‘오사카부전지’(大阪府全志)에서 “이 나니와쓰라는 항구를 본격적으로 건설한 것은 백제인들이었다”고 단언했다. 더구나 닌토쿠왕이 백제인이기 때문에 이 가와치의 나니와를 중심으로 하는 거대한 터전이 ‘구다라스’였으며, 뒷날 다시 “완전하게 ‘구다라군(百濟郡)’이란 명칭으로 행정구역 명명이 이루어졌다”는 것. 미즈노 교수가 최초로 내세운 “닌토쿠왕은 백제인”이라는 주장을 부정하는 학자는 아직 찾아볼 수 없다.
더구나 오사카 땅은 백제의 옛 터전으로 “천황가의 조상이 남조선으로부터 일본에 건너왔다”(‘日本史謎と鍵’ 1976)는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과 조선은 똑같은 민족(同民族)이다…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국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쓰시마해협이 있어서 조선이 동란(신라·백제·고구려의 삼국시대 전쟁)이 일어나고 있을 때 일본은 독립해서 보다 일본적으로 돼 갔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과 마찬가지다”(‘東京新聞’ 1972. 4. 1)라고 진솔하게 역사의 발자취를 밝힌 바 있다.
영국 욕(York) 사람들은 대서양 건너 미국을 개척하던 당시 자신들이 건설한 항구도시를 ‘새로운 욕’, 즉 ‘뉴욕(New York)’이라고 명명했다. 백제인 왕인 박사가 현해탄 건너 구다라스 땅에 건설한 새로운 나루터를 ‘난파진’(나니와쓰)으로 명명한 것과 같은 이치다. 백제인들의 새 터전 마련은 뉴욕 건설에 1000년 앞서는 거사였던 셈이다.
(다음주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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