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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百濟野 가르는 증아江엔 백제역사 ''유유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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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12-20 12:54:00 수정 : 2006-12-20 12: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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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백제사 삼중탑'' 우뚝 솟은 구다라노 百濟野 들판 ‘백제’가 남아 있는 또 하나의 지역이 나라(奈良) 땅에 있다. 나라(奈良)현의 ‘고료초 구다라’(廣陵町 百濟)가 그곳이다. 18회에 소개한 교토시 동쪽의 ‘히가시오우미시 햐쿠사이지초(東近江市 百濟寺町)와 함께 현존하는 ‘백제’ 행정 지명이다. 이 고장은 본래 구다라노(百濟野), 즉 ‘백제들‘이라는 지명의 광막한 들판이었다. 실은 구다라노 한복판을 가르며 흐르는 지금의 ‘증아강’(曾我川, そががわ)도 본래 ‘백제강’(百濟川, くだらがわ)이라는 이름으로 오랜 역사를 이어왔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구다라가와’라는 백제강 이름을 없애버렸다. 그러나 ‘구다라가와’를 ‘소가가와’로 바꾼다 하여 역사가 변하겠는가.

역사의 실체는 바뀔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듯 ‘백제사 삼중탑’(百濟寺三重塔)이 우뚝 서 있다. 이곳 백제사 삼중탑이 있는 마을에는 ‘구다라간이우편국’(百濟簡易郵便局)이라는 한자 이름을 가진 ‘백제우체국’이 번창했던 옛날을 상징하고 있다.
백제의 옛 가람터전 구다라 삼중탑 앞에 자그마한 ‘구다라데라공원’(百濟寺公園)도 몇년 전 새로 단장돼 나그네 마음을 감싸준다. 오사카 쪽에서 오려면 ‘긴테쓰’(近鐵)라는 전철의 급행편으로 일단 ‘야기’(八木, やぎ)까지 가야 한다. 이 전철역은 나라땅의 ‘시키’(磯城)군에 속한다. 야기역에서 ‘백제사 삼중탑’까지는 택시로 약 20분이 소요된다. 버스는 하루에 몇 편밖에 다니지 않는다.
오늘도 ‘소가가와’는 그 옛날 ‘백제들’ 한복판을 흠뻑 적시면서 남녘으로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소가가와를 서쪽으로 가로지르면 대로변 전주 드높이 ‘구다라’(百濟) 지명의 도로 표지가 부착돼 있다. 그 언저리 터전에 ‘구다라지마에’(百濟寺前, 백제사 앞)라는 명칭의 버스 정류장 터전이 큼직하게 자리 잡고 있다.


◇구다라노(백제들)의 백제사 삼중탑(사진 왼쪽), 백제간이우편국 간판이 보이는 정문.



일본 제30대 왕은 백제인 비다쓰 왕(敏達·572∼585 재위)이다. 그 당시는 민달왕 또는 민달대왕으로 호칭되었던 인물이다. 일본 고대사학의 태두(泰斗)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박사는 그의 자택에 보관 중인 일본왕실 편찬(815년) 가계보(왕족·귀족 1182가문의 성씨 기록)를 직접 필자에게 보여주며 “제30대 비다쓰왕이 백제인이라는 것은 여기 ‘신찬성씨록’에 나와 있다”고 지적했다. (2004년 7월11일)
‘신찬성씨록’은 제50대 간무왕(781∼806 재위)의 제5왕자였던 만다친왕(788∼830) 등이 왕실에서 집필했다. 일본의 관찬역사책 ‘일본서기’(720년 편찬)를 펴보면 비다쓰왕은 이 고장 ‘백제대정’(百濟大井) 땅에 왕궁을 지었다고 돼있다. ‘부상략기’(扶桑略記, 13C경)는 “백제대정궁을 지었다”고 왕궁 이름까지 기록했다. 이 들판 어딘가에 백제 궁궐을 짓고, 큰 우물도 팠던 유적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쳐준다.
역사지리학자 요시타 도고(吉田東伍·1864∼1918) 박사는 명저 ‘대일본지명사서’(大日本地名辭書, 富山房, 1907)에서 “백제대정궁 터전은 야마토국 히로세군(廣瀨郡) 구다라(百濟)”라고 단정했다. 현대의 저명 사학자인 도호쿠대학 사학과 세키 아키라(關晃) 교수도 “야마토국 히로세군 구다라는 지금의 나라현 고료초 구다라(廣陵町百濟)”라고 지적했다.(‘일본서기’ 岩波書店, 1979) 비다쓰왕이 세웠다던 왕궁터전은 백제사 삼중탑 일대 어딘가였을 것이다. 지금부터 벌써 1400여년 전의 옛날 일이기 때문에 그 궁전터가 아직 발견되지는 않았다. 고고학적 규명에 우리도 함께 힘써야 한다.
궁궐터의 발견은 가망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백제인 조메이 왕(舒明·629∼641 재위)의 ‘백제대궁’(百濟大宮) 옛 터전도 1999년 5월 나라현 사쿠라이(櫻井)시의 기비(吉備) 연못터 부근에서 발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홍윤기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 2000) 지금도 기비 연못터 지역 일대에서는 나라국립문화재연구소의 고고학자들이 발굴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사쿠라이시의 기비 연못터는 ‘고료초 구다라’로부터 동남쪽으로 약 8㎞ 지점이다.

◇유유히 흐르는 구다라강 물줄기.



나라국립문화재연구소의 고고학자들은 앞서 1997년 2월27일 ‘백제대사’(百濟大寺) 유적을 발굴, ‘일본서기’의 기록을 뒷받침했다. 발굴된 백제대사의 금당 받침대는 남북의 길이가 약 27m이고, 동서의 길이는 약 36m이다. 규슈대 불교사학과 다무라 엔초(田村圓澄) 교수는 “아스카(592∼645)시대의 사찰 중에서 유일하게 사찰터를 알 길이 없었던 백제대사의 옛 터전을 발견한 것은 일본불교사 연구에 획기적인 성과”라고 찬양했다.
‘일본서기’의 조메이왕 당시 왕이 신하들에게 조칙을 내려 백제강 동서 양쪽 기슭에다 각기 백제대궁과 백제대사 등을 짓도록 명했다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11년 7월에 조칙을 내려 ‘금년에 대궁(백제궁)과 대사(백제사)를 만든다’고 밝혔다. 백제강 기슭을 궁터로 삼았다. 서쪽 백성들은 대궁을 만들고 동쪽 백성들은 대사를 지었다. 12월14일 백제강 기슭에 9중탑을 세웠다. 10월 백제궁으로 이사했다. 13년 10월9일 왕은 백제궁에서 붕어했다. 18일 궁의 북쪽에 빈소를 만들었다. 이것을 ‘백제의 대빈’이라고 한다.”(일본서기)
일본 역사상 최초로 572년 백제강이 흐르는 터전에 ‘백제궁’을 지었던 친조부 비다쓰왕을 본떠서 그의 친손자인 조메이왕도 640년 역시 백제강 서쪽에 백제궁을 짓고 백제강 동쪽에는 백제대사를 세워 백제궁에서 살다 서거했다. 후인들은 백제 왕국의 3년상인 ‘백제 대빈’으로 국상을 치렀다. 3년상은 ‘일본서기’에 조메이왕의 비였으며 여왕으로 등극했던 교코쿠왕(642∼645 재위)이 여왕 2년 9월6일 남편 조메이왕을 ‘오시사카릉’에 안장시킨 기록이 남아 있어 사실로 확인된다.
조메이왕도 비다쓰왕처럼 백제대궁과 백제대사 등을 건설했다는 것은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 세이조대 사학과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 교수가 “조메이왕은 당대에 구다라(백제)대왕으로 호칭되었을 것으로 본다”(‘신찬성씨록의 연구 연구편’, 1970)고 지적한 것을 거듭 가슴 속에 새겨보고 싶다. 다음은 ‘일본서기’의 조메이왕 7년 7월7일 기록이다.


◇‘백제사’ 게시판. 조메이왕이 639년 12월 백제강 강변에 백제대사와 구중탑을 세웠다는 ‘일본서기’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조정에서 백제 손님에게 향응을 베풀었다. 이달에 이상한 연꽃이 ‘쓰루기못’(劍池)에 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개의 줄기에 두 송이의 꽃이 함께 피어 있다.”
왜나라의 모국인 백제와 나라땅 백제인 왕실이 서로 쌍둥이 나라이고 형제 국가인 것을 상징하는 이적이 아닐까. 이 ‘쓰루기 못’ 즉 ‘검지’는 지금도 옛날 그대로 나라의 아스카 지역에 있다. 지금은 명칭이 바뀌어 ‘이시카와 못’(石川池)이다. 이시카와 지역은 비다쓰왕 당시 백제 귀족들이 살던 터전이다. 특히 소아마자 대신이 자신의 저택을 사찰로 개축한 이시카와정사(石川精舍)가 있던 터전으로도 유명하다. 교코쿠왕(여왕)은 비다쓰왕의 증손녀였다. 남편인 조메이왕의 조카딸이었다. 이 당시는 왕실의 근친 결혼이 크게 성했다. 비다쓰왕도 배다른 친누이동생(뒷날의 스이코여왕)을 비로 삼았다. 일본 역사의 이런 발자취는 5세기부터 백제인들이 왜나라를 지배한 역사의 흐름을 뚜렷이 보여준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관광안내 책자들이 이런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하다. 백제뿐 아니라 신라와 고구려 사적들도 마찬가지. 이를 보다 못한 일본 역사학자가 냉정하게 비판하는 것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백제들 백제삼중탑에 관해서 사학자 미즈노 아키요시(水野明善) 교수는 자신의 연구론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마이니치신문사에서 발간한 ‘국보중요문화재안내’는 백제사 삼중탑을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 야마토의 들판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유일한 탑이 백제삼중탑(중요문화재)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 옛날 백제 도래인들과 떼려야 떼어 놓을 수 없는 백제사 삼중탑이 무참하게도 묵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고대조선 도래인을 살피며―학문 수준과 상식’, 1973)
‘국보중요문화재안내’의 공동 저자인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1912∼) 교수는 도쿄대 건축학과 출신으로 특히 일본 고대 사찰 건축 연구로 손꼽히는 건축미술사학자이다. 마치다 고이치(町田甲一·1916∼) 교수 또한 도쿄대 미술사학과 출신이며 도쿄교육대 미술사학 교수로서 이름이 높다.
그런 저명 학자들이 공동 편찬한 책에 어째서 꼭 들어 있어야 할 ‘백제사 삼중탑’ 항목 자체가 송두리째 빠져 있는 것일까. 이 백제사 삼중탑이 일본 정부가 지정한 국가 중요문화재가 된 것은 1906년(메이지 39년)의 일이기도 하다.
(다음주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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