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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절경의 고찰엔 백제 불교 문화가 고스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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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12-13 13:38:00 수정 : 2006-12-13 13: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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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비와코'' 호수 너머 1400년의 명찰 百濟寺 6세기(538년)부터 일본 역사를 빛내준 구다라(백제) 불교 문화의 뚜렷한 발자취를 입증하는 것은 ‘백제사’(百濟寺·구다라데라)라는 이름의 고대 사찰 창건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본 각지에 산재해 온 ‘백제사’라는 명칭의 사찰은 5곳이나 된다. 학자에 따라서는 6∼7곳이 있었다고도 한다. 물론 이 중에는 화재 등으로 붕괴, 장구한 세월 동안 지하에 매장됐다가 주춧돌과 기와, 불상 등이 뒤늦게 발굴되는 곳도 있다.

오사카부 히라카타시(枚方市)의 ‘구다라데라’ 큰 가람 터전은 현재도 발굴이 한창 진행 중이다. 발굴 책임자 우지타 가즈오(宇治田和生·히라카타시문화재연구조사회) 사무국장은 “이곳 제1차 발굴(2005년 1월∼2006년 11월13일) 때 이미 백제식 연꽃무늬 수키와 28점 등 각종 유물이 많이 나왔다”며 “백제사 가람 터전은 758년, 왜왕실의 조신이었던 백제왕남전(百濟王南典) 사후 왜왕실의 형부경(법무장관)이던 백제왕경복(百濟王敬福 698∼766)이 남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했다”(‘枚方市史’)고 전한다.
어째서 일본 각지에는 똑같은 명칭의 ‘백제사’들이 이처럼 여러 곳에서 창건됐을까. 이마이 게이이치(今井啓一) 교수는 연구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귀화인(한국인)들은 일본 선주민들에 비해 단계가 높은 지식과 기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선주민들은 귀화인들이 일본 문화 발달에 공헌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구다라데라’(くだらでら) 명칭이 있는 5곳의 절을 예로 들기로 하자. 구다라데라의 ‘구다라’라고 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백제’라는 국호를 말하는 것. 따라서 그 사찰이 백제국, 혹은 백제계 귀화인과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쉽게 살필 수 있다.”(‘5곳의 백제사’ 1974) 여기서 이마이 교수의 ‘귀화인’이라는 표현은 잘못이며 ‘도래인’으로 써야 한다.
현재도 일본 정부의 행정지명(行政地名)에 ‘백제’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곳이 2곳 있다. 그 대표적인 곳이 교토시 동쪽의 ‘히가시 오우미시 햐쿠사이지초’(東近江市百濟寺町). 우리말로는 ‘백제사정’이다. 일본 최대의 비와코 호수 너머 히가시 오우미시 햐쿠사이지초의 스즈카산(鈴鹿山) 등성이에 우뚝 서 있는 유서 깊은 백제사 때문에 행정지명조차 ‘백제사정’이다. 이 사찰의 명칭은 ‘샤카산(석가산) 햐쿠사이지’(百濟寺)로 부르고 있다. 일본에서는 백제사를 일컬어 어느 곳에서나 ‘구다라데라’라고 하는데 유독 이 사찰만은 ‘백제사’라는 한자어를 그냥 소리 나는 대로 읽어 ‘햐쿠사이지’로 부르고 있다.

◇‘가을 비단을 수놓는다’(秋錦繡)는 ‘추금수’ 단풍 절경을 보여주는 ‘백제사’의 가을(왼쪽), 승방이 300개소나 있었다는 대가람 ‘백제사승방삼백유래기’ 현판과 대가람 배치도.


이 사찰에 관한 각종 옛 문헌을 보면 본래는 ‘구다라데라’로 호칭했다. 그 후 1144년부터 ‘햐쿠사이지’로 고쳐 읽었다. “이 사찰이 천태종(天台宗)이 되면서부터 ‘구다라데라’를 ‘햐쿠사이지’로 개칭하게 되었다”(‘백제사삼백방유래기’)고 한다.
이 백제사는 “쇼토쿠태자(성덕태자 574∼622)의 청원으로 백제인들을 위해 616년 백제국의 명찰 ‘용운사’(龍雲寺)를 본떠서 창건했다”(‘百濟寺寺傳’)고 전한다. 본당으로 향하는 길고 긴 고색 짙은 돌층계에 올라서면 ‘인왕문’이 떡 버티고 서 있다. 인왕문 양쪽 벽면에는 1m가 넘는 커다란 짚신이 좌우 한 짝씩 걸려 있어 흡사 아득한 옛날 백제 고승이 신고 왔던 짚신 문화의 발자취를 그리는 듯하다.
이 고찰은 백제에서 나라땅 아스카 왕실에 와 있던 백제 학승 혜총(惠聰) 스님이 주지로 있었던 유서 깊은 백제 명찰이다. 이마이 게이이치 교수는 “이 사찰 ‘사전’(寺傳)에 의하면 백제 명승 혜총과 도흔(道欣), 관륵(觀勒) 등이 쇼토쿠태자의 간청으로 이 산에 입주하였다고 한다. 또한 ‘담해온고록’(淡海溫故錄)에는 백제국의 왕자가 왜나라 왕실에 건너왔을 당시 이 사찰에 머물게 하였으며, 백제왕자는 그의 권속들과 함께 이 사찰에 눌러 살게 돼 이때부터 백제사라고 호칭하게 됐다고 한다. 따라서 이곳 오우미국(近江國)의 백제사는 이 고장에 터를 잡은 백제인 집단의 성지(聖地)로 보아도 좋을 것”(‘오우미 백제사’)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이마이 교수는 이 사찰 사전에서 “고구려 학승 혜자(惠慈) 스님이 창건에 참가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다”고 단정했다. 혜자 스님은 595년 고구려로부터 왜왕실로 건너왔다가 615년 고구려로 귀국했다.(‘일본서기’ ‘부상략기’ 등) 이곳 햐쿠사이지 사찰의 ‘햐쿠사이지 사전’에는 현재까지 혜자 스님의 백제사 창건설을 기술하고 있어 시정이 필요하다. ‘태자전고금목록초’(12세기)에 보면 사찰의 한자어 표기를 ‘구다라데라’(俱多羅寺)로도 쓰고 있어 이채롭다.
비와코 호수 일대 명승 ‘오우미 3경’의 하나로 칭송받는 유서 깊은 이 사찰은 일본에 현존하는 대표적인 ‘백제사’다. 특히 가을철 단풍이 절경이라서 ‘가을 비단을 수놓는다’(秋錦繡)고 일본 각지에 널리 알려진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경내의 바윗골 계곡을 타고 유리알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정원 ‘기켄인’(喜見院の庭園)은 백제사 교보 스님이 “사시사철 백화가 난만하다”고 자랑할 정도다. 산기슭에선 “원망대(遠望臺)에 오르면 호수가 펼쳐지는 드넓은 평야가 눈앞에 장관을 이루고, 더구나 서쪽으로 880㎞ 앞쪽에는 도래인의 모국(母國)인 ‘백제국’을 그릴 수 있다”(일본어 ‘백제사’ 안내문)는 글도 만날 수 있어 잠시 나그네 마음에 향수를 어리게도 한다.

◇공개하지 않는 비불(秘佛)인 높이 27㎝의 소형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왼쪽), 1m가 넘는 대형 짚신이 걸려 있는 백제사 인왕문.


백제사의 본존인 ‘목조십일면관음상’은 “쇼토쿠태자가 손수 파서 만든 것”이라고 하지만 이를 입증하는 문헌적 고증은 아직 없다. 그러나 이 사찰 터 땅속에서 불에 탄 채 발굴된 도금 벗겨진 불상이 있어 주목받고 있다. 고대로부터 이 사찰에 소중하게 보존되며 공개하지 않는 비불(秘佛)인 높이 27㎝의 소형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그것이다. 이 불상에 대해 미술사학자 구노 다케시 교수는 “이 불상은 도래인 불공에 의해 7세기 말쯤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백봉미술’ 1978)고 했다. 그러나 어쩌면 고대 백제 혹은 신라로부터 건너온 불상인지도 모른다. 형태상 이런 형식의 반가사유상은 백제와 신라로부터 6세기 후반부터 왜왕실로 건너왔기 때문이다. 이는 앞으로 전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고대 백제 왕족들이 세웠던 이 백제사 가람의 역사는 전쟁의 상처가 깊었던 장중한 터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옛날 자그마치 승방 300을 헤아렸다는 이 백제사 대가람은 일본 무장들이 군웅할거하던 ‘전국시대’(1467∼1568)에 왜장 오다 노부나가(1534∼1582)에 의해 완전히 불타버린 참담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무장 오다 노부나가는 거대한 가람 백제사를 불질렀을까. 무장들이 난립해 패권을 다투던 1572년 가을, 백제사 승려들은 오다 노부나가 세력을 배척하고 무장 사자키 요시하루의 군대를 물심 양면으로 지원했다. 승방마다 사자키 군사의 처자들을 수용했으며 많은 군량미도 원조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오다 노부나가의 군사들은 백제사를 공격, 사흘 만에 300의 대승방과 모든 법당을 잿더미로 만들고 말았다. 이에 명찰 백제사는 사람은 물론 그림자조차 얼씬 못하는 폐사로 전락했다. 그 후 1650년에 이르러 오늘날의 모습인 본당과 인왕문 산문이 다시 들어서게 됐고, 불에 타버린 채 폐허가 된 수많던 법당과 승방 터는 울창한 숲 깊숙이 안겨버렸다고 한다.(‘백제사 사전’)
여기서 하나 더 밝혀둘 것이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관광 안내 책자들은 의도적으로 비와코 호수 동쪽 3경의 하나로 이름난 ‘백제사’에 관해 다루지 않고 슬그머니 빼버리고 있다는 것. 이에 대해 미즈노 아키요시(水野明善) 교수는 다음같이 지적한다. “일본교통공사가 발행하는 여행 안내서로 가장 널리 보급되고 있는 총 1600쪽이나 되는 ‘전국여행안내’(1970년 10월 초쇄) 책자는 한국 관련 항목을 감쪽같이 빼버렸다. 오우미의 호수 동쪽 3경의 사찰인 사이묘지(西明寺)와 공고린지(金剛輪寺) 항목은 다루고 있으면서 3경의 당자인 햐쿠사이지(百濟寺)는 전혀 소개하지 않고 있는 것. 백제사에 관해서는 마이니치신문사 발행 ‘국보·중요문화재 안내’(오타 히로타로·마치다 고이치 공동 집필) 역시 마찬가지로 취급하지 않고 있다.”(‘古代朝鮮渡來人をめぐつて’ 1972)
‘국보·중요문화재 안내’의 집필자는 도쿄대 공학과 교수 오타 히로타로와 도쿄교육대 미술과 교수 마치다 고이치이다. 이 책에서도 두 사람은 사이묘지와 공고린지 항목은 다루고 있으나 햐쿠사이지는 외면했다.
일본 행정지명의 다른 또 한 곳의 ‘백제’는 현재 ‘백제3중탑’이 서 있는 나라현의 ‘고료초구다라’(廣陵町百濟)이다.
(다음주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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