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기 한국외대 교수 |
시텐노지의 드높은 오중탑은 특히 장관이다. 이 절은 백제시대 3번째 왕도였던 부여땅 군수리 절터와 건축 양식이 똑같다. 즉 군수리 절터처럼 사찰의 중문과 오중탑 및 금당을 남북 일직선으로 하여 사방은 회랑을 네모로 빙 두르고 있다. 이 시텐노지는 쇼토쿠태자(574∼622)가 발원하여 593년에 백제 건축가 유씨(柳氏)에 의해서 웅장하게 일어섰다. 명공 유씨에게는 쇼토쿠태자의 생부인 요메이왕(585∼587 재위)이 생존 당시 곤고(金剛·금강)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四天王寺緣起’·11세기경 성립). 그 때문에 유씨 가문은 뒷날 오사카의 건축 전문회사인 ‘곤고구미(金剛組)’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사세가 기울어 올해 초에 회사문을 닫았다는 소식도 들린다.
시텐노지는 불교의 수호신 지국천을 비롯한 사천왕으로 부르는 4신을 받들기 위해 쇼토쿠태자가 세웠다. 12세의 독실한 불자였던 홍안 소년 마구간왕자(뒷날의 쇼토쿠태자). 이 소년은 불교에 목숨을 걸겠다고 하리만큼 열정적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587년 7월 조정의 불교 반대파를 무찌르는 전쟁터에 몸소 참전했다.
왕실의 조신인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출생년 미상∼587) 대련(大連·그 당시 소가노 우마코 대신 다음의 벼슬)이 이끄는 이들 배불파는 급기야 왕실 전복을 모의하고 군사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른바 국신파(國神派)로서 고대부터 하늘 신을 받드는 신도 수호 세력이었다. 즉 구다라로부터 왜국 왕실로 불교가 들어와 날로 번창하자 모노노베노 모리야 등 일당은 그들의 지지 세력이 계속하여 약화하자 호시탐탐 불교 박멸을 획책하기에 이르렀다.
◇쇼토쿠태자의 위폐를 모신 시텐노지의 성령원. |
그 때문에 모노노베노 모리야 일당은 불교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인 585년 3월30일, 소가노 우마코 대신이 자기 저택 동쪽에 손수 세운 불전을 기습하여 함부로 불을 지르고 불탑도 쓰러뜨렸다. 그들은 백제에서 584년에 보내준 미륵 석불을 불타는 불당에서 끌어내어 저 멀리 구다라스의 호리에(掘江·지금의 오사카 시내 니시쿠의 작은 강) 강물에 던져버렸다. 말하자면 구다라 불교가 정착하기까지 수난도 뒤따랐던 것.
모노노베노 모리야 일당 배불 모반 세력을 무찌르기 위한 장정 길에 나선 나이 어린 마구간왕자. 그는 참전 길에 숲을 지나가다가 붉나무(옻나무과)를 잘라서 ‘사천왕상’을 만들어 높이 받들면서 무릎 꿇고 사천왕에게 맹세하기를 “만약에 이번 전쟁에서 제가 적과 싸워 승리하게 해주신다면 반드시 사천왕님들을 받드는 절과 탑을 세우겠나이다”라고 다짐했다. 이때 총사령관인 소가노 우마코 대신도 “사천왕님들께서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 주신다면 절과 탑을 세우고 삼보(불, 법, 승)를 널리 위하겠습니다”라고 역시 굳게 맹세했다(일본서기).
배불 세력들의 모반은 요메이왕이 587년 4월 초에 병상에 누워서 신음할 때 발생하고 있었다. 어린 마구간왕자는 옷을 입은 채 병석의 부왕 앞에서 부처님에게 분향하면서 쾌유를 기원하는 등 효성스럽게 여러 밤을 꼬박 새웠다. 요메이왕은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짐은 삼보에 귀의하려고 하오. 경들은 의논하도록 하시오”라고 명했다. 군신들은 조정에 입궐해서 논의하게 되었다. 이때 조신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과 나카토미노 가쓰미(中臣勝海·생년 미상∼587)는 감히 요메이왕에게 불교를 반대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우리나라 국신에게 등을 돌리고 남의 나라 신인 부처를 믿나이까? 도대체 전부터 그 까닭을 모를 일이옵니다”라고 반항했다.
이때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보칙을 내리신 대로 따라서 도와드리도록 해야 합니다. 다른 계책은 용납하지 못하겠소”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때 백제에서 왜나라로 건너온 도요쿠니 법사(豊國法師)가 조정으로 안내되어 들어왔다. 쓰쿠바대학의 나가다 노리오 교수는 “도요쿠니는 한국을 가리키며, 한국을 보배의 나라인 재보국(財寶國)으로 부른 데서 생긴 표현이 도요쿠니이다”(中田祝夫注 ‘靈異記’·1995)라고 해설했다.
◇7세기 초에 고구려 사자춤 등 무악의 명인 미마지가 제자들을 가르친 돌 무대인 무대강. |
마구간왕자는 크게 기뻐하며 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더니 “삼보의 묘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이설(異說)을 허망되이 생각하면서 사견(私見)을 좇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제 머리를 제 손으로 두드리면서 “전하의 성덕을 입어서, 삼보는 크게 일어나 번창할 것입니다” 하니, 이 말을 들은 모노노베노 모야 대련은 거칠게 흘겨보면서 대뜸 노발대발했다. 마구간왕자는 좌우를 살피면서 의젓하게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인과(因果)의 이치를 몰라. 이제 지도자로서 망할 것이니, 오호 슬프도다”라고 말하며 탄식했다. 이때 군신들도 수군대며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 등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들 말했다(‘쇼토쿠태자전력’·992년 성립).
일이 여기에 이르자 군신들은 요메이왕에게 거역하는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 일당을 제거할 것을 신중하게 논의하게 되었다. 이미 그 자리를 멀리 떠난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 일파는 반란을 꾀하기 위해서 벌써 군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제 나라 안에서는 전쟁이 벌어질 급박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 시기에 아스키에 살던 백제인 사마달등(司馬達等·6∼7세기)의 아들인 불공(佛供) 사마다스나(司馬多須奈·6∼7세기)는 병상의 요메이왕이 쾌유하도록 부처님에게 기원하기 위해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사마다스나는 아스카 땅에 새로운 사찰인 사카다지(坂田寺)를 세우며 장육불상(丈六佛像)을 만들기 시작했다(中井眞孝, ‘佛敎の受容 公傳と私田 司馬氏三代’·1981). 그 보람도 없이 요메이왕은 4월9일 붕어했다(일본서기). 향년 41세(신황정통기)로 알려지고 있다.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그의 본거지인 구다라스의 아도(阿都·현재 오사카부의 야오시·八尾市) 땅으로 몰려가서 계속 반란군의 군사를 크게 모았다. 나카토미노 가쓰미도 전처럼 모노노베 대련을 곁에서 열심히 도왔다. 그러나 “나카토미노 가쓰미는 음모를 꾀하고 다니다가 쇼토쿠태자의 사인(舍人·호위관) 도미노 이치히(迹見赤)에 의해서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의 집에 다녀오던 길에 화살에 사살되었다”(일본서기). 도미노 이치히는 명궁이었다.
◇시텐노지 오중탑과 회랑. |
요메이왕이 승하한 지 두 달째 되던 6월7일,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조카딸 가시키야 공주(뒷날의 스이코여왕)에게 청원해서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을 등에 업고 왕위 찬탈을 획책하던 왕실의 모반자였던 아나호베노(穴穗部) 왕자를 주살했다. 이로써 훼불 난동을 부리던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의 큰 날개 하나는 완전히 꺾였다. 드디어 소가노 우마코 대신과 나라를 지키려는 왕자들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반군 거점을 향해 진군하게 되었다. 이들 왕자 속에는 어린 마구간왕자도 끼어 있었다.
대신 소가노 우마코가 이끄는 토벌군들은 반란군 모노노베노 모리야 일당을 섬멸하기 위해 반란군의 터전 아도로 쳐들어 갔다. 그러나 반란군의 반격이 워낙 거세어 3번이나 후퇴하는 고전을 치러야만 했다. 모노노베노 모리야 반란군은 짚단으로 드높게 성을 쌓고 완강히 버텼다. 그러나 모노노베노 모리야도 끝내 도미노 이치히(쇼토쿠태자의 사인)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마침내 반란군은 격파되었고 산지사방으로 도망친 자들은 저마다 성씨를 바꾸어 숨어 살게 되었다(태자전보궐기). 538년 백제 제26대 성왕이 왜나라로 전파한 불교는 이때부터 비로소 서서히 융성하게 되었다.
쇼토쿠태자가 사천왕을 위해 건설한 구다라스의 시텐노지 대가람. 이 사찰에서는 해마다 4월22일 창건자 쇼토쿠태자를 위령하는 ‘성령회 무악 개법요’를 거행한다. 불교춤과 음악인 무악 행사는 경내의 대형 돌로 만든 ‘무대강’에서 거행된다. 무대강이야말로 612년에 백제로부터 왜 왕실로 건너온 백제의 음악 무용가인 미마지(未麻之·6∼7세기)에 의해 고구려 사자춤과 탈춤이 전수된 유서 깊은 역사의 터전이기도 하다. 고구려에 가서 사자춤과 음악을 배웠던 명인 미마지는 왜 왕실에서 스이코여왕과 쇼토쿠태자며 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큰 환대를 받았다. 그뿐 아니고 왕실 터전 ‘사쿠리이’에서 백제인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다시 구다라스의 시텐노지로 초청되어 자리를 옮겨 가서 역시 이 가람에서도 제자들을 키우기 위한 무대강이 사찰 경내에 훌륭하게 건설되었던 것이다.
(다음주에 계속)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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