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조헌법'' 만들어 실천 쇼토쿠 태자는 서기 602년 백제에서 건너온 학승 관륵(觀勒) 스님을 존경하게 된다. 그 이유는 관륵 스님은 처음으로 왜나라 조정에다 달력의 역법을 가르치며 또한 천문학과 지리학, 그리고 병법인 둔갑방술(遁甲方術)을 펼침으로써 다양한 선진 구다라 학문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구다라 학승 관륵이 현대까지도 일인들에게서 존경받아 온 것을 알 수 있는 발자취가 있다. 1993년 일본의 천문학자 후루카와 기이치로(古川麒一郞) 도쿄천문대 교수는, 그 당시 자신이 발견한 우주의 소행성에다 관륵 스님의 이름 ‘간로쿠’(KANROKU, 관륵)라는 이름을 붙여서 국제천문연맹(IAU)에 등록했다.
관륵 스님에 뒤이어 서기 610년에는 고구려 학승 담징 스님이 왜 왕실로 건너왔다. 쇼토쿠 태자는 그림에 뛰어나며 일본 최초로 종이 만드는 닥나무 제지법을 왜 왕실에다 가르쳐주는 담징 스님을 대하며 경탄했다. 쇼토쿠 태자는 자신의 아버지 요메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담징 스님에게 호류지 사찰 금당의 벽면에 불상을 그려달라고 요청했던 것.
지난날 필자가 발굴한 호류지의 고문서 ‘성예초’(1394∼1427)에는 쇼토쿠 태자가 백제인 핏줄이라는 것 등이 다음처럼 쓰여 있다.
“백제 제26대 성왕은 서거한 뒤에 왜 왕실의 쇼토쿠 태자로 환생했다. 즉 쇼토쿠 태자는 백제 성왕의 화신이다. 또한 호류지의 녹나무 ‘구세관음상’은 백제 제27대 위덕왕이 서거한 부왕을 추모하여 백제 왕실에서 만들어 왜국 왕실로 보내주었던 성왕의 불상이다.”
즉 호류지 팔각전당 몽전(유메도노)의 구세관음상은 백제 성왕의 모습이자 환생한 쇼토쿠 태자의 모습이라는 고증이다. 이와 같은 불교 윤회설이 ‘성예초’에 담겨 있다.
◇홍윤기 한국외대 교수 |
◇호류지의 삼중탑(왼쪽), 성예초(1394∼1427)에는 쇼토쿠 태자가 백제인 핏줄이라는 것과 백제 성왕의 화신이라는 기사가 담겨 있다. |
“공주는 꿈을 꾸자 금빛으로 번쩍이는 승려와 만났다. 이 금빛깔의 승려는 ‘나는 세상을 구해내기를 소원하므로 잠시 공주의 배에 머물고자 하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주는 ‘귀하는 누구신가요?’ 하고 물으니 ‘나는 구세보살이오’라고 대답했다.”(쇼토쿠태자전력)
공주는 자기 배를 금빛 승려에게 내줌으로써 아기를 가졌다. 그리하여 서기 572년(당시는 비타쓰왕 원년) 음력 1월1일 열두 달이라는 긴 임신 기간 끝에 마굿간에서 옥동자를 낳았다는 것. 10개월이 아닌 12개월 만에 한 불교 성인이 태어난 셈이다. 이것은 성모 마리아의 예수 잉태와 똑같은 스토리의 패턴이며,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의 경우는 겨드랑이 밑에서 아기를 낳았다고 했다. 이때 태어난 아기(석가)가 동서남북으로 7발짝씩을 걷고 나자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쳤다고 전한다. 그와 유사하달까 ‘상궁성덕태자전보궐기’에 의하면, 쇼토쿠 태자는 생후 1년2개월 만에 동쪽을 향해 “나무아미타불!” 하고 외치며 합장 재배했고, 그것은 7년간 계속되었다고 전한다.
쇼토쿠 태자의 불교 중흥 업적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평가되는 것은 ‘17조 헌법’이다. 이것은 스이코 여왕 12년(604) 1월 쇼토쿠 태자가 아스카왕실에서 몸소 반포(頒布)했다(일본서기)고 한다. ‘17조 헌법’의 제2조에는 백성들이 ‘삼보’(부처와 불교 교리와 승려)를 받듦으로써 참다운 값진 삶을 누리게 된다고 하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일종의 불교 국가 기본 통치령이다.
이것에 관해 와세다대학의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1873∼1961) 교수는 “그 당시의 정치 제도상 17조 헌법은 쇼토쿠 태자가 지은 것이 아니며 뒷날에 쓰인 것이다”(일본상대사연구·1942)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세이조대학 사학과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 교수는 “헌법 17조는 과연 쇼토쿠 태자가 지은 것일까. 그것을 위작설로 내세운 가장 대표적 학설은 쓰다 소키치 등이나, 최근에 와서는 스이코 여왕 시대의 관사(官司) 제도의 발전상에 비춰볼 때 그와 같은 헌법은 이미 그 당시에 만들어졌다고 본다”(쇼토쿠 태자를 둘러싼 7가지 수수께끼·1977)고 반박했다.
쇼토쿠 태자의 나이 아직 18세인 마굿간왕자 시절의 일이다. 그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거듭 들이닥쳤다. 그의 아내 도지코가 남편인 마굿간왕자와 아기를 배반하고 간부 야마토노아야노 아타이코마(東漢直駒)와 밀통하고 있었다. 야마토노아야노 아타이코마는 조정의 조신으로서 태자의 장인이자 외조부인 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심복이었다. 그 무렵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권세를 휘둘렀다. 그의 말 한마디에 나는 새도 떨어진다고 했다. 이에 불만이 쌓인 것은 스슌왕(崇峻·587∼592 재위)이었다. 스슌왕은 소가노 우마코 대신을 제거할 것을 신하들 앞에서 암시했다. 이를 알아낸 소가노 우마코는 크게 분격했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자신이 천거하여 왕위에 앉힌 스슌왕을 심복 야마토노아야노 아타이코마를 시켜 암살했다. 스슌왕은 쇼토쿠 태자의 숙부이다. 즉 아버지 요메이 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불교 진흥에 앞장섰던 쇼토쿠 태자는 서기 622년 2월 5일 이카루가궁(호류지 경내)에서 타계했다. 구다라인 불교 성인 쇼토쿠 태자는 파란 많다면 많았던 49년간의 길지 못한 생애를 마치고 곧 구다라스(百濟洲)의 시나가노미사사기(磯長陵·지금의 오사카부 다이시초)에 안장되었다. (다음주에 계속).
홍윤기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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