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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⑥ 스이코 여왕과 옥충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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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09-06 16:35:00 수정 : 2006-09-06 16: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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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왕족'' 자긍심으로 아스카문화 꽃피워 일본 고대 나라 지방의 아스카(飛鳥) 땅에서 백제 불교를 꽃피운 주인공은 백제 여성인 제33대 스이코 여왕(椎古 592∼628년 재위)이다. 일본 ‘아스카 문화’라는 것은 스이코 여왕 시대의 백제 불교 문화를 일컫는다. 스이코 여왕은 제32대 스슌왕(崇峻 587∼592년 재위)이 죽은 직후, 조정의 최고 대신이며 외삼촌인 소아마자(蘇我馬子 ?∼626년)의 천거로 왕위를 계승했다.


◇홍윤기 한국외대 교수


그는 용모가 단정했으며 매사에 어긋남 없는 야무진 여성이었다(‘일본서기’). 18세 때 제30대 비다쓰왕(敏達 572∼585년 재위)과 결혼했다. 비다쓰왕은 다름 아닌 스이코 여왕의 한핏줄로서, 생모만 다른 친오빠다. 그는 근친결혼을 했다. 일본 왕실사에서 근친혼은 예사였다. 그가 34세 때 남편이자 오라비인 비다쓰왕이 병사했다.
스이코 여왕은 등극하자 넉달 만에 소아마자 대신과 협의하여 태자를 책봉했다. 태자는 그의 죽은 친오라비 요메이왕(用明 585∼587년 재위)의 제2왕자였던 쇼토쿠 태자(聖德 574∼622년)이다. 갓 스물의 청년 쇼토쿠 태자는 효성이 지극했다.

그는 백제에서 왜 왕실로 건너온 학승 혜총(惠聰)과 고구려 학승 혜자(惠慈)를 스승으로 모시고 어린 소년 시절부터 법흥사(法興寺·아스카데라)에서 성실하게 불경을 공부해온 돈독한 불자였다. 그렇기에 장차 고모 스이코 여왕을 크게 보필하며 구다라 불교 문화 창달에 최선을 다하게 된다. 여기서 고증하자면 스이코 여왕이 백제 왕족이라는 근거는 일본 왕실문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815년)에서 살피게 된다. ‘신찬성씨록’에는 제30대 “비다쓰왕은 백제 왕족이다”라는 기록이 들어가 있다. 그의 부군이자 친오라비인 비다쓰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스이코 여왕도 어김없는 백제 여성이다.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1927∼ ) 교토대학 사학과 명예교수는 일본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국보급인 고대 ‘신찬성씨록’을 자택 서재에 보관하고 있다. 우에다 교수는 그 책을 직접 필자에게 보여주면서 “비다쓰 천황은 백제 왕족입니다”라고 확언했다(2004년 7월11일). 이 자리에는 우에다 교수의 애제자인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토산업대학 일본문화연구소장·교토시역사자료관장 겸직) 교수도 배석해 있었다.


◇스이코릉(왼쪽), 스이코여왕 도유라궁 옛터의 건물

또 올해 초에 우에다 교수가 필자에게 보내온 친필 서신(2006년 1월15일자)에서 “일본 ‘신찬성씨록’의 구다라 왕족이란 구다라 의자왕의 핏줄로 이어지는 백제 왕족으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지적했다.
‘일본서기’에 “비다쓰왕은 구다라 오이궁(百濟大井宮)을 지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도 비다쓰왕이 백제 왕족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더구나 비다쓰왕의 친손자인 제34대 조메이왕(舒明 629∼641 재위)은 나라 땅 “구다라강(百濟川) 옆에 구다라궁과 구다라데라를 지었고, 구다라궁에서 살다가 서거했을 때는 ‘구다라대빈(百濟大殯)’으로 장례를 치렀다”(‘일본서기’). ‘구다라대빈’이란 백제 왕실의 3년상 장례로서, 백제 제25대 무령왕(501∼523년 재위)이 백제대빈 3년상 장례를 치른 것이 충남 공주 무령왕릉에서 1971년 7월에 출토된 묘지명에서 살필 수 있다.
일본의 저명한 고대 사학자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 세이조대학 사학과 교수는 “조메이천황은 ‘구다라천황(百濟天皇)’이라고 불리었을 것이다”(‘신찬성씨록연구’ 1970년)라고 연구 발표했다.
이코 여왕 원년(593년) 1월, 아스카 땅에서 한창 건축 중이던 아스카데라 찰주를 세우는 법요 때 만조백관이 모두 백제 옷을 입었고 구경하던 사람들이 기뻐했다”(‘부상략기’ 13세기)고 하는 역사 기록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백제에서 건너온 건축가를 비롯하여 기와박사와 여반박사, 화공 등 수십명이 왜의 선주민 인부 수백명을 거느리고 백제의 불교 문화를 꽃피우던 구다라 왕족들의 야심 찬 아스카데라 건설의 대업을 이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스이코 여왕은 그 아스카데라에 이웃한 도유라궁(豊浦宮)에서 정무를 보살피며 불심을 닦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발자취를 전해주는 것이 오늘의 일본 국보 문화재가 된 훌륭한 2층 목조 불전(佛殿)인 백제 ‘옥충주자(玉蟲廚子·다마무시노즈시)’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옥충주자는 검게 옻칠을 했으며, 세계적인 칠공예 장식 미술품으로 찬양받아 오고 있다.
‘옥충’이란 무지갯빛으로 눈부신 날개를 자랑하는 곤충 ‘비단벌레’를 가리킨다. 옥충주자는 기둥이며 중요한 부분마다 인동당초 문양으로 투시 조각한 금동 장식으로 만들어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금동 금구(金具) 밑에는 비단벌레의 화려한 날개들을 깔아서 정교하게 한 보기 드문 명품이다. 여기에 사용된 비단벌레의 날개는 자그마치 2563장이나 된다. 한 마리 한 마리씩 비단벌레 날개를 펼쳐서 발라 붙인 백제 예술가의 땀 어린 예술혼은 아스카 땅에 건너와 눈부시게 빛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백제 왕실에서 보내준 높이 226.6cm, 정면 너비 114.5cm 크기의 이 옥충주자는 스이코 여왕이 도유라궁에 안치하고 이 불단의 2층 불감(佛龕)에 봉안한 불상을 향해 합장 예불하던 귀중한 구다라 불교 문화재다.
옥충주자의 1층 부분은 수미단(須彌壇)으로서 4면에 각기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설을 그림으로 엮은 밀타회화 그림들로 만들어졌다. 정면인 앞쪽 그림은 불타의 사리를 공양하는 ‘사리공양도’이다. 정면에서 우측으로 돌아간 곳의 그림은 부처가 호랑이에게 제 몸을 던져 먹여 살린다는 ‘사신사호도’다. 또한 정면의 좌측면은 ‘설산동자’의 몸으로 태어난 석가가 바라문으로 수업 중인 장면인 ‘시신문게도(施身聞偈圖)’다. 그리고 뒷면 그림은 불교 세계 한복판에 있어 세상에서 가장 드높다는 수미산을 그려 넣었다.
옥충주자는 현재 나라땅 이카루가의 호류지 사찰 ‘구다라관음당’ 안에 녹나무 구다라관음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이 옥충주자는 스이코 여왕 서거 후에 호류지 사찰로 옮겨간 것이다. 왜 왕실로 옥충주자를 보내준 것은 백제 제27대 위덕왕(554∼598년)이다. 그 당시 처음에는 옥충주자를 가시키야 공주(뒷날의 스이코 여왕)의 모후인 기다시히메(堅鹽媛·조정의 최고 대신인 백제인 소아도목의 딸) 왕후에게 보냈던 것이라고 미국인 동양사학자 페놀로사(E F Fenollosa 1853∼1908년) 교수는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옥충주자와 이상하리만큼 키가 큰 목조관음상(백제관음)은 조선 미술의 위대한 보물이다. 서기 590년경에 백제에서 왕후에게 보내왔다”(‘동아미술사강’ 1912년).
1885년 5월부터 그 당시 일본 정부 궁내성의 나라지방 문화재 조사에 참여했던 도쿄미술학교 오카구라 덴신(岡倉天心·본명 覺三 1862∼1913년) 교수도 옥충주자가 백제에서 건너왔음을 다음처럼 밝혔다.
“아스카 시대 문화재의 백제식 표본에는 호류지 사찰의 허공장보살(백제관음)과 유메도노의 구세관음이 있으며, 옥충주자의 그림(불화)도 백제식이다. 또한 고류지(廣隆寺·교토)에 여의륜(미륵상)이 있다”(‘오카구라 덴신 전집’·‘泰東巧藝史’ 1940년).
옥충주자의 비단벌레 날개 금구 장식 기법은 고대 한국의 특출한 기예라는 것을 기우치 다케오(木內武男) 교수는 다음처럼 밝히기도 했다.
“비단벌레의 날개를 깐 데서 ‘옥충주자’라는 이름이 붙었다. 더구나 비단 벌레를 공예품으로 응용하는 일은 일찍이 조선 삼국시대 당시부터 행해져 왔고, 신라 경주의 금관총에서 출토된 말 안장과 등자, 행엽(杏葉) 등에도 투명한 금구 밑에다 비단벌레 날개를 깔아서 그 색채 효과를 이루었다”(‘日本の考古學·木工, 漆工 1950년). 이렇듯 일찍부터 저명한 학자들이 옥충주자에 대해 백제 문화재라는 것을 고증해 왔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어떤 학자는 옥충주자가 일본서 만든 것이라며 다음처럼 내세웠다.
“옥충주자의 수미단 불화는 채색이 또렷하게 떠오르며, 위층에 만들어진 것은 아스카 시대 불전 건축을 연상시키는 옥충주자의 균재가 잡힌 아름다움이 실로 호류지뿐만이 아니라 일본 고대 공예 미술이 낳은 걸작의 하나이리라”(大西修也 ‘호류지Ⅲ미술’ 1987).
그러나 일본 민예학자로 저명했던 센슈대학(專修大學)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 교수의 다음 견해를 귀담아 보면 또 어떨까.
“일본 국보는 모두 조선의 국보다”(‘朝鮮とその藝術’ 1948).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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