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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생존
아픔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데브라 그래닉 감독의 ‘윈터스 본’은 뼛속 깊이 아프다. 흠씬 두들겨 맞은 순간의 아픔이 아니라 골병이 들어 욱신거리는 아픔이다. 소리조차 내지를 수 없는 통곡과 비명이다.

겨울, 황량함으로 덮인 어느 산간마을. 얼어붙은 빨래 옆에 덩그러니 걸려 있는 추레한 성조기를 유심히 보지 않은 이상, 이곳이 어느 나라인지도 분간이 안 된다. 미국 남부 미주리주 오자크의 어느 마을이란다. 시간의 진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한 공간. 미국에도 이런 곳이 있었던가. 순간,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이미지들을 검색해 보지만, 이런 이미지는 저장돼 있지 않다. 낯설고, 생경하다.

‘윈터스 본’의 공간 창출은 낯섦에만 있지 않다. 이 영화에는 시퀀스와 시퀀스 사이에 상황을 설명하고 설정하는 전경(全景)이 없다. 열일곱 살 소녀, 리 돌리(제니퍼 로런스)의 삶을 향해 바로 돌진한다. 이유 없이 우리는 주인공 소녀의 삶 속으로 직접 빨려 들어간다. 화면은 답답하고 폐쇄적이며 리 돌리의 움직임에 국한돼 있다. 무엇인가에 짓눌린 것 같은 무거운 공간 연출. 이는 어린 나이에 가혹한 삶을 짊어진 한 소녀의 내면 풍경인 셈이다.

‘윈터스 본’은 우리에게 익숙한 장르의 형식을 과감히 벗어던짐으로써 영화의 내면으로 우리의 관심을 이끈다. 사건이 있고, 베일에 가려진 진실이 있으며, 공포와 전율을 선사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영화적 구조에 묻혀 허우적대지 않는다. 세계의 폭력과 위협에 맞서는 열일곱 살 소녀의 고투를 생생히 지켜내기 위한 수단으로 장르를 활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스릴러’, ‘서스펜스’, ‘미스터리’ 등등의 이 영화를 수식하는 몇 가지 장르적 코드를 믿고 영화를 본다면, 금세 배신감이 밀려온다. 장르의 법칙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너무 밋밋한 서사적 결말에 정말 실망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 영화가 이러한 영화적 요소를 전혀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외려 ‘윈터스 본’은 ‘스릴러’의 장르적 외피를 두르고 있으며, ‘미스터리’ 극적 구조와 ‘서스펜스’가 살아 있는 영화다. 다만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고 잠복해 있을 뿐이다. 영화적 구조가 영화적 내용을 묵묵히 뒷받침하는 형식으로만 작용한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엄마와 아직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없는 어린 두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소녀 가장, 리 돌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생존’이다. ‘생존’이 곧 ‘진실’인 셈이다. 그러하기에 마약쟁이 아빠의 생사 여부나 죽음을 둘러싼 진실보다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가족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진실을 파헤치는 미스터리 극적구조보다는 리 돌리의 생존투쟁이라는 영화적 내용이 우선시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윈터스 본’에서 느껴지는 공포와 긴장감은 잔혹함과는 거리가 멀다. 유혈이 낭자한 폭력 장면 하나 없이도 세상의 폭력을 떠안고 살아야 하는 소녀의 일상을 생생하게 담아낸다. 리 돌리에게 엄습하는 폭력과 공포는 스크린 외부에 존재한다. 화면의 배후에 도사리며 화면 속 주인공의 삶을 옥죄기에 더욱 옴짝달싹하기 어렵다. 소녀를 둘러싼 외부의 폭력을 내면의 공포로 형상화해내는 연출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 영화가 언급될 때마다 두루 얘기되는 제니퍼 로런스의 연기력에 관해서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제니퍼 로런스가 아닌, 리 돌리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이러한 재능 있는 배우를 발굴하고 영화 속 인물로 완벽하게 재현해 낸 데브라 그래닉은 이 영화 한 편으로도 기억해야 할 감독 목록에 추가할 만하다. ‘절제의 미학’을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윈터스 본’은 오랜만에 영화미학과 감독의 연출력에 관해 얘기할 만한 영화로 기록될 것이다.

교사·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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