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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일 소설가·동서문화발행인 |
이 ‘소타령’은 핍박과 시달림 받는 서민들의 삶을 소의 한평생에 투영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소는 생구(生口)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말에서 식구는 가족을 뜻하고 생구는 한집에 사는 하인이나 종을 말하는데, 소를 생구라 함은 사람대접을 할 만큼 소를 존중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소를 소중히 여기는 까닭은 소가 힘든 일을 도맡아 하며 소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소값이 비싸서 재산으로서도 큰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월 들어 첫 번째 맞은 축일(丑日)을 소날이라 하여, 이 날은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음은 물론이요 쇠죽에 콩을 많이 넣어 소를 잘 먹였다.
우리 선조에게 소는 사람값과 맞먹는 엄청난 ‘재(財)’였다. 그래선지 지리풍수에서 와우형(臥牛形)은 재를 몰아온다고 예언받았고, 소꿈은 예외없이 재수가 좋다는 길몽으로 해석되었다. 소는 재라는 확고한 생각이 불교의 윤회사상과 복합되어 남에게 빚을 갚지 않고 죽으면 후생에 소로 태어난다는 생각도 우리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육당 최남선은 그의 ‘백두산근참기’에서 한국 농가에서 외양간의 위치는 대체로 공통되며 그 공통성에서 한국인의 동물관을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집 구조가 ‘二’자형이나 ‘ㄷ’자형, ‘ㅁ’자형일 경우 외양간은 몸채의 안방과 맞상대되는 위치에 마련돼 있다. 곧 안방과 맞바라보이는 위치에 이 생구를 두고 항상 보살피기 위한 동물관이 이러한 집 구조를 있게 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정월 대보름 명절에는 사람에게 차리는 밥상처럼 밥이며 국이며 나물 등 한상 차려 소를 대접한다. 짐승을 인간처럼 대하는 사상을 애니멀리즘이라고 한다면, 한국인의 동물 자연을 둔 개성은 곧 애니멀리즘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소를 한집안의 가족처럼 여겼기에 소를 인격화한 일화가 많다.
황희가 길을 가다가 두 마리의 소가 밭을 가는 것을 보고 농부에게 묻기를 “어느 소가 밭을 더 잘 가느냐” 하니 농부는 황희 옆으로 다가와서 귓속말로 “이쪽 소가 더 잘 갑니다” 하였다. 황희가 이상히 여겨 “어찌하여 귓속말로 대답하느냐” 물으니, 농부는 “비록 미물일지라도 그 마음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으니 한쪽이 이것을 질투하지 않겠습니까” 했다는 것이다.
경주 관광을 하고 난 ‘대지’의 작가 펄벅에게 무엇이 가장 한국적이더냐고 기자가 물은 적이 있다. 석굴암이나 다보탑으로 대답할 것이라는 기대는 배신당하고 말았다. 황혼의 들판길, 지게에 짐을 가득 지고 소달구지를 몰고 가는 늙은 농부 모습이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이었다고 했다. 미국 농부 같으면 짐을 지고 걷기는커녕 소달구지에 올라타고 소를 몰았을 것이다. 한데 한국 농부가 소의 힘을 덜어주기 위해 짐을 나누어 지고 걷는 인간적 배려가 그토록 이 작가를 매료시킨 것이다.
선조 때 명상(名相) 정탁이 젊었을 때 일이다. 벼슬을 하게 되어 스승인 조식에게 하직인사를 올리자 “내 집에 소 한 마리가 있는데 갈 때 끌고 가게나” 했다. 스승의 집에 소가 없는 것을 뻔히 아는 터라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자 조식이 말했다. “그대가 언어와 의기가 너무 민첩하고 날카로우니 날랜 말과 같다. 말은 넘어지기 쉬운지라 더디고 착실한 것을 참작해야 비로소 멀리 갈 수 있으므로 내가 소 한 마리를 주는 것이네.” 곧 조식이 준 것은 ‘마음의 소’였던 것이다. 정탁은 이 마음의 소를 항상 끌고 다니며 처세하였기로 과분한 정승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한다. 그는 자제들에게 이 마음의 소를 대대로 물려 갖도록 유언했다.
자년(子年)을 보내고 축년(丑年)을 맞으면서 이 마음의 소 한 마리씩을 우리 국민 모두가 나눠 가지길 희망한다.
고정일 소설가·동서문화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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