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나는 하사관 복무 5년차였는데, 제복에 저당잡힌 청춘을 허비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시를 쓰고 있었다. 누구에게 지도받아 본 적도 없고, 변변한 이론서 한 권 읽은 적도 없었다. 유일한 문학적 창구는 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하는 세 살 터울인 남동생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었다.
“브레히트를 한번 읽어보세요.”
그날, 최근의 내 시를 읽어본 동생이 눈을 빛내며 강력하게 권고했다. 철학과 외국 문학을 전공한 동생이 터득한 폭넓은 감식안과 사유가 부러울 정도여서 나는 곧장 책을 구입하였는데, 바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었다.
부대로 돌아온 나는 그의 시를 낱낱이 곱씹으며 줄을 치며 읽었다. 별반 재미는 없었다. 희극 이론인 서사기법을 적용한 듯 철저히 객관화된 시가 내겐 너무도 생소했다.
그런 어느 날(당시 습작노트를 보니 1988년 8월 30일이다), 일과를 마치고 동네 식당에서 밥을 기다리는 중 건성으로 책을 펼쳤다. 표제작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짤막한 시가 눈에 박힐 듯 들어왔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살아남은 자의 슬픔’ 전문)
뮤즈의 신과 직통으로 연결될 때가 있다면 바로 그 순간을 두고 이름일 것이다. 브레히트가 1944년에 쓴 이 시가 44년 후 지구 반대편에서 번개처럼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내 삶의 과거와 현재를 소용돌이처럼 뒤섞어서는 재구성되어 연출되는 듯, 자전거를 타고 한계령을 넘는 내 모습이 스냅 사진처럼 뇌를 스쳤다. 나는 숟가락 대신 펜을 들었고, 시는 순식간에 씌어졌다.
“한계령 정상, 이젠 내리막이다/ 기하급수로 따라붙은 가속도를 조절하느라/조심조심 브레이크를 잡으면/단풍 설악은 풍랑 일렁이는 바다가 된다”(‘슬픈 바퀴’ 부분)
그 후 나는 브레히트를 꼼꼼하게 사숙하였고, 마침내 그의 서사 기법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그로 인해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감상적이었던 내 시의 균형도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씌어진 시 ‘슬픈 바퀴’가 2년 후 신춘 당선작이 되었으니, 내 어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대함이 남다르지 않겠는가.
한마당에서 출간한 이 시집은 희곡 작가와 이론가로 알려진 브레히트가 시에서도 한 정점에 도달해 있음을 잘 알려주는 책이다. 그의 시는 소외효과를 역설한 서사극 이론이 그대로 적용되는데,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거리를 두고 보고 깨닫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번역은 독일 문학을 전공한 김광규 시인번역도 안성맞춤으로 잘 맞아떨어진다. |
박 윤 규 시인·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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