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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시네마 logue] ­‘라자르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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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5-17 00:16:33 수정 : 2013-05-17 00: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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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 상처 치유하기… 지혜로운 가르침
한 여성 교장이 침통한 표정으로 학부형들에게 어떤 사정을 설명한다. 분명히 암시되고 있진 않지만 아마 모든 이들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있었나 보다. 부모들은 직접적 언급을 삼가고 선생님들 역시 사건의 핵심을 우회한다. 요약할 수 있는 상황은 한 학급의 담임 선생님이 없어졌다는 것, 그래서 그 반에 새로운 선생님이 필요하다는 정도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사고나 사건에 대해 우회할 줄 모른다. 아이들은 새로운 선생님에게 그들에게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알려준다. 바로, 이전 담임 선생님이 교실에서 자살을 했던 것. 새로 부임한 알제리 출신의 라자르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에게 교실을 바꿀 수 없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그 대답이 무척 진중하다. 다른 반 학생들에게 그 짐을 돌릴 수는 없기에, 빈 교실이 없는 이상 교실을 옮길 수는 없다고 말이다.

결국 아이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공간적으로,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런데 성장이란 게 다 그렇다. 모르는 척 회피하고 넘어간다고 해서 모든 일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반 아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상처, 담임 선생님의 자살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떤 점에서 아이들은 그 고통을 공유하기에 불행한 상황 가운데서도 서로에게 위안이 된다. 적어도 그 고통은 혼자만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알제리인이라는 점에서 짐작되기도 하지만 라자르 선생님에게도 여러 가지 사연이 있다. 그에게도 아이들만큼이나 끔찍한 상처가 있다. 라자르 선생님은 억누르거나 외면하는 심리치료가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상처로부터 놓여나도록 도와준다. 아이들은 서로를 비난하기도 하고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혼란스럽지만 결국 이 혼란 역시도 아이들의 몫이다. 어른들은 그 혼란을 이겨나가도록 도와줄 수 있을 뿐, 집단 최면을 걸어 사고 이전으로 모든 것을 되돌릴 수는 없다. 인간의 기억은 컴퓨터 메모리처럼 그렇게 쉽게 쓰고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결국 폭발적 순간을 거쳐 아이들은 ‘죽음’이라는 사건을 받아들인다. 라자르 선생님은 아이들이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해 충분히 애도할 시간과 공간을 제공한다. 치료라는 명목으로 숨길 게 아니라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 것, 모든 죽음에는 이 애도가 필요하다.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난 후 아이들은 어느 새 성큼 우리 생각보다 웃자란다.

라자르 선생님이 머무는 학교는 멸균상태의 온실이 아니라 지독한 현실 한가운데이다. 영화 속 교사들은 학생들이 화상을 입는 한이 있어도 절대 선크림을 발라 줄 수 없다. 혹독한 세상이 교사와 아이 간의 관계를 그만큼 멀게 했다.

처음부터는 아니겠지만 결국 지금은 그렇게 돼버린 셈이다. 하지만 이 척박한 땅에서도 스승은 존재하고 교육은 이뤄진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처를 지혜롭게 극복하는 법, 그게 바로 라자르 선생님의 가르침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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