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르바는 카잔차키스가 아닌 나에게, 그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소설 속의 카잔차키스와 흡사하게 오로지 염소처럼 종이만 씹으며 살아온 나날이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룬 것도 없었고, 변변한 글 한편 쓰지 못한 채 주변인처럼 살고 있었다.
이러다 영원히 제대로 된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을지 모른다는 절망감에 얼마나 많은 밤을 뜬눈으로 새웠던가. 나는 그때까지 나 자신이 누구인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그 무엇 하나 결단하지 못했던 암울했던 오랜 나날들이 활동사진처럼 지나갔다. 나는 나 자신을 차근차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들을 막연하게나마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며 마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를 처음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와는 또 다른 해방감, 그리고 드넓게 펼쳐진 대지에 우뚝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내 키 높이를 열심히 재고 있네. 사람의 키 높이란 늘 같은 것이 아니라서 말일세. 인간의 영혼이란 기후, 침묵, 고독 그리고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눈부시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네”라는 구절뿐만 아니라 조르바는 그가 전 생애에 걸쳐 온몸으로 체득한 자유와 만물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내게 사람다운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절실하게 깨닫게 해주었다.
특히 한 사람의 생애를 통하여 몇 사람의 아름다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가도 깨닫게 해주었다. 어느 날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필자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하여 자유와 사랑, 절망과 희망이 진실로 한 인간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어떻게 떠나가는가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전 생애에 걸쳐 추구했던 자유와 사랑, 나도 그것을 온몸으로 실천하면서 살고자 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신정일 문화사학자·‘신택리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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