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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의 불로 세상이란 벌에 들불을…

입력 : 2009-01-16 18:14:55 수정 : 2009-01-16 18: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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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현씨 세번째 소설집‘이상한 만곡을…’ 민경현(43·사진)씨가 세 번째 소설집 ‘이상한 만곡(彎曲)을 걸어간 사내’(실천문학사)를 펴냈다. 타협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예술관을 펼쳐가는 특유의 저돌적 글쓰기가 이번 소설집에서도 유감없이 펼쳐진다.

표제작을 비롯해 모두 8편이 실려 있거니와, 이 중에서도 첫머리에 수록된 ‘복화술 듣는 저녁’은 그가 꾸준히 다루어 온 그림 그리는 사람들 이야기를 통해 예술의 궁극을 탐하는 이른바 예술가소설 유형이다.

“어디건 먼지가 쌓인 고요한 곳이면 마음 편히 화구가방을 내려놓고 스케치북 위에 스러지는 목탄처럼 혼신을 비벼대며 창작에 몰두”하는 ‘서(徐)’라는 인물이나, “아침이 되어 재와 그을음만 남은, 밤사이 불 피운 흔적에서 나는 그런 구수하고도 아련한 냄새 같은 것”을 풍기는, “필경은 무언가를 뒤흔들고 불태우고 또 번지게 하는 힘”을 지닌 ‘이석’ 같은 인물들이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노스탤지어”로 수묵과 채색의 세계를 넘나들며 소설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만복사 트릴로지’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예술가, 그중에서도 글을 쓰는 이들의 욕망을 드러낸다. 글쓰기에 임하는 작가 자신의 심상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듯한 이런 대목은 어떤가.

“실로 설잠의 가슴엔 오래전부터 문장이 불타고 있었다. 아마도 그 불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누군가의 가슴에서 계속 타오르던 불이었을 것이다. 그 불씨가 전해지고 전해져 결국 그에까지 이르렀을 터였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 불타는 문장이란 대괴(大塊·우주)가 스스로 지펴서 처음 문자를 고안한 인간에 전한 불씨일 거였다.”(202쪽)

설잠은 최초의 고대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지은 김시습의 다른 이름이다. 금오신화에 수록된 5편의 소설 중 ‘만복사저포기’의 뼈대에 상상력을 덧붙인 민경현은 짐짓 설잠의 입을 빌려 “가슴의 불로 세상이란 벌에 들불을 놓고 싶었다”고 진술한다. 이런 갈망은 소설집 도처에서 다양하게 드러난다.

“내 가슴에 물결치던 것은 육욕의 흥분이 아니라 그 뜨거움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안타까움이었다. 그때 다시 산이 울었다.”(61쪽, ‘서북능선’)

알지 못하지만 알 것 같고, 잡힐 것 같지만 잡지 못하는 그 무엇, 그 대상에 한 발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서려는 몸부림이야말로 무릇 모든 예술가의 안타까움일 터이다. 이런 안타까움은 경험을 기억할 수 없는 ‘기명장애(記銘障碍)’ 사내를 등장시켜 시간의 고리 위에서 곡예하게 만드는 표제작에서도 질감은 다르지만 새롭게 변주된다. 이 사내의 고민은 시간이라는 우주적인 미스터리에까지 닿아 있으니 작가 민경현의 가슴에 이는 불은 웬만해선 꺼지기 어려울 것 같다.

조용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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