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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이 시대의 풍류'] '화려한 싱글' 사진작가 백지순이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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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10-24 02:48:19 수정 : 2008-10-24 02:4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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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모양처는 싫다"… 당당하고 자유로운 '현대판 노라'
◇모계사회의 원초적 모성이 미래사회의 대안적 모델이 될 수 있음을 사진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백지순씨. 최근 그는 강릉의 종부와 종가음식을 카메라에 담는 작업을 했다.
42세 싱글라이프 여자 백지순. 사람들은 나를 요약해서 그렇게 인식한다. 조금 알았다 싶으면 나를 두고 또 다른 탐색전을 벌인다. 사진과 결혼했느냐는 질문은 그중에서도 단골메뉴다. 어쩌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사진기만 둘러메면 신이 나고 어느 남자보다 든든하니 어쩌랴. 이젠 운명이라 받아들이고 싶다.

이제 사진은 나의 발언이 됐다. 나의 심상을 즉각적으로 시각화한다. 거기에는 숙련된 기술에 의해서만 성립되는 그림에 대한 열등감이 해소되는 지점이 있다. 그 지점으로부터 나는 사진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어떤 상황에 대해 기록하고 싶은 욕망을 가장 잘 충족시켜 주는 것이 사진이라 생각한다. 어렸을 때 잘 그리고 싶었던 욕구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중학교 때 미술선생님의 아픈 말 한마디가 나를 사진으로 이끌었다. 밑그림은 잘 그리는데 색칠만 하면 왜 그 모양이나는 질책이 가슴에 한이 됐다. 대학 동아리활동에서 접한 카메라는 그런 나의 콤플렉스를 해소해 주었다.

■대학시절 만난 김수남 선생

19년 전의 일이다. 당시는 대학생들이 매일 거리로 나와 민주화 구호를 외치던 때였다. 물론 나도 민주화에 일조하는 사진작업을 하고 싶었다. 헬멧을 쓰고 시위현장에 나갔다. 어느 시점엔가 내가 비슷비슷한 사진만 만들어 내고 있는 모습이 싫어졌다. 대학 마지막 학기에 수강한 ‘김수남 사진’강좌는 나에게 ‘인간’의 앵글에 눈을 뜨게 해주는 계기가 됐다. 내셔널지오그래피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아시아 소수민족 사진을 끝없이 보면서 들은 타민족 문화 이야기들은 분명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단일민족으로 살아온 우리에게 소수민족의 다양한 풍속은 그야말로 문화충격 그 자체였다.

우리와 다른 민족에 대한 호기심은 점점 커져갔다. 졸업 후 김수남 선생의 조수를 자청했다. 아무나 조수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조수가 되기 위해 포트폴리오를 들고 나타난 나에게 김수남 선생은 “여자라서 힘들다”고 했다. 아시아의 오지를 집처럼 드나드는 분이라 이해는 됐지만 여자라서 못한다는 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오기로 버티니 선생은 하는 수 없이 암실 사용을 허락했다. 조수가 된 것이다.

■아시아 모계사회에 앵글을 맞추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환경이나 기아, 전쟁 등 인류가 직면한 문제와 공공의 선을 위한 작업을 하고 싶다. 하지만 한국여자로서 마음 한켠에 넘어서야 할 것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 가정에 여전히 저며 있는 남존여비 사상으로 인한 딸과 아들의 차별, 며느리와 아들의 불평등 대우 등에 대한 문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가정문제를 미시적 세계문제라는 관점에서 모계사회를 그 대안으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에데족 신부가 신랑을 이끌고 신방에 들어가고 있다. 에데족 여성들은 ‘결혼은 남편을 사오는 잔치’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아시아 소수민족의 굿과 민속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김수남 선생의 조수로 일하면서 하게 된 작업도 아시아의 모계사회에 관한 기록이다. 아시아에는 아직도 성과 재산을 어머니에게서 딸로 상속하는 모계사회의 풍속을 가진 소수민족이 있다. 중국의 모쒀족, 베트남의 에데족, 인도네시아의 미낭카바우족 등이다. 그곳의 여자들은 거침이 없고 당당하기에 아름답다. 현모양처가 되기 위한 조신함이 여자의 미덕으로 여겨져 딸이라면 다소곳한 여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기대와 시선으로 가득한 대한민국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다.

■떠나기 싫었던 루구호의 모쒀족 마을

중국 윈난성에 루구호수가에는 모쒀족이 모여 산다. 그들은 모계사회의 원형에 가까운 풍습을 갖고 있었다. 남녀는 결혼을 하지 않고 남자가 여자 집에 방문을 하는 ‘아주혼’을 한다. 축제나 여신제에서 젊은이들이 그들의 전통 춤을 추게 되면 남녀가 한 사람씩 손을 잡게 된다. 그때 옆 사람이 마음에 들면 손바닥을 긁어 마음을 드러낸다. 상대도 좋으면 역시 손바닥을 긁어 화답한다. 마음을 확인한 여자가 남자에게 집을 알려주고 서로 암호를 정해 밤에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방문을 한다. 암호를 대면 여자가 문을 열어주고 이들의 교제는 시작된다. 만남이 깊어지면 남자는 선물을 가지고 여자의 집을 방문해 어머니의 허락을 받게 된다. 그때부터 남자는 당당하게 밤마다 여자의 처소에서 밤을 보내고 이튿날 새벽에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아주혼’이다. 
◇중국 모쒀족은 ‘아주혼’이란 결혼풍습에 따라 남자가 밤에 여자의 집을 찾았다가 해가 뜨기 전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오른쪽 침대 곁에 있는 남성이 귀가 채비를 하고 있는 신랑이다.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하며 그곳 여자들과 친해졌다. 김수남 선생은“뒷골목을 알 때가 되면 그곳을 떠날 때가 된 것이다”라고 늘상 말하곤 했다. 나 역시 뒷골목도 잘 알게 되고 사람들과도 친해졌는데 그만 떠날 때가 되었다. 그동안 사귄 친구들에게 이제 돌아가야 한다고 했더니 가지 말라는 것이다. 손짓을 섞어가며 이제 돈도 떨어지고 필름도 다 되었다고 했다. 친구들은 자기들과 함께 노 젓고 말 타면서 돈을 벌면 되니 가지 말라고 한다. 루구호의 관광 수입원인 노 젓기와 말 타기는 남녀 구분 없이 한 집에서 한 명씩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데 번 돈을 모아 똑같이 나눈다. 공동생산 공동분배인 셈이다. 친구들이 함께 노를 젓고 말을 타자는 말은 나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긴다는 의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인간 내면을 소통시키는 그 무엇, 그 순간 그것은 나의 사진작업의 모토가 됐다.

■강릉의 종부와 종가음식

모계사회 작업 이후 강릉 종부와 종가음식이 카메라에 클로즈업됐다. 사라져가는 종부를 기록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찾아왔다. 부계사회에서 맏며느리로, 수십 년을 자신을 이루기보다는 한 가정과 가문의 그늘막이 되어준 존재가 종부가 아닌가. 요즘 대부분 종손은 집안의 얼굴로 잘 교육받고, 잘 교육된 여자를 만나, 괜찮은 연봉의 직업을 얻어 도시에서 거주한다. 그러니 젊은 종부는 그 명맥은 잇겠지만 그 역할에 있어서 어머니 대의 것과는 같을 수 없다. 종가를 유지하고 4대조 제사를 봉사하며 장과 술을 담그며 백여 가지의 식품을 관리하는 종부를 볼 수 있는 시간도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남자들이 시집살이를 하는 베트남의 한 에데족 가족. 가운데 당당히 서 있는 여성(어머니)의 모습이 이채롭다.

종부는 의식주 생활에서 보통 이상의 식견을 갖추어야 했다. 아니 맏며느리 생활을 하다보면 식견이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의식주생활 중에 오늘날까지 가정에서 사람의 손을 타야 하는 것은 식생활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음식의 근간인 된장, 고추장, 간장을 담고 제사에 쓰일 술을 빚으며 백여 가지의 먹을거리를 장만하려면 음식에 관한 대물림된 지혜가 절실히 요구된다.

일 년 동안 종부가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 종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종부와 종가음식이라는 주제로 작업을 하게 된 동기다.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나에겐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다. 음식을 보면 그 지역의 환경과 문화를 짐작할 수 있기에 음식에 관한 관찰은 내게 매우 큰 흥밋거리다.

■새해 첫날부터 여자가

김수남 선생의 수십년지기인 강릉의 황루시 교수(민속학)는 작업에 큰 후원자다. 강릉에서 종가를 소개받기까지는 그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강릉시 노암동에 열두대문집이라는 별호가 있는 ‘김윤기가옥’도 그의 소개로 작업이 가능했다. 열두대문집을 찾던 날 마침 종부는 메주를 띄우고 있었다. 1차 작업을 끝내고 설에 와서 차례지내는 것도 촬영하겠다고 하고 돌아왔는데 정작 설 며칠 전 전화가 왔다. 촬영이 어렵다는 것이다. 지난번 방문 때 혹시나 무슨 결례를 한 것은 아닌가 고민을 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난감해 예정보다 일찍 강릉으로 내려 갔다. 열두대문댁의 종부인 심순옥씨를 직접 만났다. 바깥 어르신께서 새해 첫날부터 객이 드나드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첫 손님으로 여자가 오면 재수가 없다던 나라가 아니었나. 새해 벽두부터 여자가 촬영하겠다고 온다하니 그리 반길 일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종부에게 바깥 어르신이 좋아하시는 것이 무언지 알려달라고 해서 시내에 나가 전병을 사서 그 다음날 다시 찾아 갔다. 그 정성이 통했는지 끝내 촬영 허락을 받아 냈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가라는 속담이 왜 생겼는지를 실감했다.

■여자들이 지내는 제사, 신사임당제

심순옥 종부는 사회활동도 열심이다. 강릉 예림회에서 한때 회장을 맡은 인연으로 열두대문집의 동채를 예림회의 조리공간으로 사용토록 했다.

강릉 예림회는 사라져가는 전통 생활문화를 지키기 위하여 강릉에 소재한 전통가옥에 사는 집안의 딸과 며느리를 중심으로 구성된 단체다. 선교장을 지켜온 14대 종부이자 관동대 가정과 교수였던 성기희 선생도 기금으로 1백만원을 기부할 만큼 애정과 열정을 쏟은 단체다.

예림회에선 아주 이색적이고 재미있는 제사 하나를 주관하고 있다. 오죽헌에는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의 위해를 모셔놓고 초기에는 율곡제사만 지냈다. 이를 지켜본 예림회 회원들이 아들의 제사만 지내고 어머니 제사는 지내지 않는다는 것의 불합리성을 제기했다. 더구나 위패까지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예림회 회원들이 직접 나서서 제사를 지내자는 것이었다. 올해로 7회째인 신사임당 얼선양제는 그렇게 시작됐다.

■또 다른 작업 싱글우먼

나의 카메라 앵글은 자연스럽게 현모양처로 살기보다는 자아실현을 위해 공부나 일을 선택한 여자 싱글에 관한 작업으로 이어졌다. ‘싱글우먼’들의 이야기다. 정작 당사자들은 자아실현을 위한 당당한 싱글이 아니라 인연을 만나지 못해 결혼을 못한 싱글이라고 하지만 그녀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이 있다. 인생이 매 순간의 크고 작은 선택으로 이어져 있다면 그녀들은 결혼을 위한 결혼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다. 결국 사회적 결혼 적령기에 자아를 구현하는 방법을 선택한 셈이다.

성직자나 노예를 제외하고는 결혼에 의해서만 사회생활이 가능했던 중세의 봉건사회를 지나 1879년 헨리 입센의 소설에서는 노라가 집을 뛰쳐나온다. 아직도 노라가 귀가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노라가 요즘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애초에 가정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그런 결과물들을 오는 12월10일∼23일까지 갤러리 아트비트(02-722-8749)에서 보여 줄 작정이다.

나는 확신한다. 여인천하가 미래사회의 대안적 모델이 될 것이라고. 10여년간 아시아지역 모계사회 사진작업을 해오면서 내린 결론이다. 할머니와 어머니 중심의 모성은 그 어느 결집체보다 강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단단한 새의 둥지처럼 부부가 헤어지는 경우에도 아이들은 집을 옮길 필요가 없다. 이혼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 등 정신적 고통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중국 모계사회 출신인 한 수필가도 ‘모계사회 대안론’을 제시하고 있을 정도다. 모성만이 세계를 품을 수 있다. 여성시대 만만세다.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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