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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35>나라땅 東大寺와 비로자나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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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04-25 11:23:00 수정 : 2007-04-25 11: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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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신라 고승 3명이 창건세계 최대의 금동불상 모셔 일본 나라(奈良)땅의 옛 왕도, 나라시 소시초 동쪽 ‘가스가산’ 언덕에는 고대 한국 불교의 발자취가 뚜렷하다. 바로 도다이지(東大寺, 일본철도 JR나라역 동북쪽 약 1.5㎞)에 있는 세계 최대 금동불상 ‘비로자나대불’(높이 1619㎝)이다. 752년 4월9일 도다이지는 고대 한국인들의 손으로 우뚝 일어섰다. 구체적으론 고대 백제인을 주축으로 신라인과 고구려인들이 뜻을 모아 남긴 결실이다. 그 대표적인 세 분의 성인(聖人)은 구다라인(백제인) 행기(行基·668∼749) 큰스님과 양변(良弁·689∼773) 큰스님, 신라인 심상대덕(審祥大德·8세기) 큰스님이다.(‘동대사요록’ 1106 도다이지 관정 스님 편찬)


도쿄대 건축사학과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는 8세기 중엽 일본 최초의 ‘화엄종’ 총본산 사찰이 된 도다이지 가람 건설의 발자취를 상세히 쓰고 있다.
“이 사찰은 비로자나대불을 본존으로 삼았다. 당시 신라인 학승 심상대덕에 의해 비로소 화엄경(華嚴經)이 일본에 널리 보급돼 도다이지 건설의 바탕이 됐다. 본래 도다이지가 건조되기 전인 733년경부터 이 터전에는 양변 승려의 곤슈지(金鐘寺)가 서 있었으며, 심상대덕이 그곳에 와 740년 10월8일부터 처음으로 화엄경 등을 강설(講說)했다. 강설이 끝난 것은 742년이다. 도다이지의 본존 불상인 비로자나대불이 완성 개안된 것은 752년 4월9일이며 이때 일단 가람의 건설이 완료된 것으로 본다.”(‘국보, 중요문화재 안내’ 1963)
◇신라사당인 ‘가라쿠니신사’. 신라 학승 심상대덕 성인의 신주를 모신 사당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규슈대 불교사학과 다무라 엔쵸(田村圓澄) 교수는 자신의 저서(‘古代朝鮮と日本佛敎’ 1985)에서 심상대덕에 의해 비로자나대불을 본존으로 모셨다고 밝히면서도 심상대덕을 신라 승려가 아닌 일본 승려라고 내세웠다. 그러나 오사카시립대 사학과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郞) 교수는 “심상대덕은 나라의 다이안지(大安寺)에 초청된 신라 학승”이라고 밝혔다.(‘奈良’ 吉川弘文館, 1985) 그 근거는 심상대덕에 관한 일본 고대 불교 전기(傳記) 서적 ‘신라학생대안사심상대덕기’(新羅學生大安寺審祥大德記)로, 이 서적은 심상대덕이 신라 학승임을 결정적으로 밝히고 있다.
양변 스님은 나라땅에서 백제 스님 의연승정(義淵僧正·728년 열반) 문하에서 수학해 큰 승려가 된 분이다. 양변 스님은 당초 나라의 가스가산(春日山) 기슭에 암자를 짓고 자신의 속명인 ‘금종’을 따서 곤슈지라고 불렀다. 이 곤슈지의 터가 현재 도다이지 경내에 있는 ‘이월당’(二月堂) 자리이다. 양변 스님이 다이안지에 와 있던 신라 학승 심상대덕을 모셔다 만든 강원(講院) 자리는 그 이웃에 있는 지금의 ‘삼월당’(三月堂)이다. 심상대덕은 신라 부석사 의상대사(義湘大師·625∼702)의 제자였다고 본다. 심상대덕은 화엄종을 펴기 위해 일본 다이안지로 건너갔던 학승이다. 심상대덕에 의해 신라 화엄종의 ‘비로자나부처님’이 된 도다이지의 거대한 금동불상을 건조한 지도자는 백제인 고승 행기 스님이다. 일제 강점기 초기에 오사카대 사학과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薰) 교수는 “쇼무천황(성무왕·724∼749 재위)이 행기 스님에게 비로자나대불을 만드는 데 협조해 주기를 간청했다”(‘行基’ 吉川弘文館, 1917)고 썼다.
◇16m가 넘는 비로자나대불.

행기 스님은 어떤 인물인가. 그 무렵 전국에 수많은 신도를 거느린 생불 같은 존재였다. 일본 고대 불교사며 고승전인 ‘원형석서’(‘元亨釋書’ 13세기 초)에 “그는 668년 지금의 일본 오사카부(大阪府) 사카이시(堺市)에서 백제인 왕인박사의 후손으로서, 속성(俗姓) 고지(高志)씨로 태어났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행기 스님은 처음에는 일본 나라지방을 비롯해 전국 각지를 돌면서 포교에 앞장섰던 포교승이었다. 특히 빈민 구제에 진력하면서 잠자리가 없는 부랑인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고 곤궁한 농민을 위해 가뭄에 도랑을 파줬다. 다리를 건설하고 방죽을 만들어 주는 등 관개농업도 이끌었다. “행기 스님이 가는 곳에는 새로운 제자들이 생겨났고, 신도들이 구름떼로 모여들어 설법을 들었다”고 일본 왕실 역사책 ‘속일본기’(‘續日本紀’ 797년 성립)가 전한다. 한때 나라 왕실은 민심 선동자로 오인, 감옥에 잡아들이는 등 스님을 박대했다. 그러나 빈민 구제와 같은 활동이 차츰 바르게 평가돼 쇼무천황의 존경받는 고승이 됐다.
“쇼무천황은 열성적인 화엄 불교의 신도였다. 그는 행기 스님을 일본 최초의 ‘대승정’으로 왕실에 모셨고, 행기 스님 앞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하면서 749년 왕위를 장녀(고켄여왕·749∼758 재위)에게 양위했다.”(홍윤기 ‘행기 큰스님’ 자유문학사, 1996)
도다이지 ‘대불전’이라는 거대한 금당 안에 모셔 있는 높이 16m가 넘는 비로자나대불을 주조할 때 얼마나 많은 재료가 소요됐을까. 행기 스님이 몸소 써낸 ‘조사재목지식기’(造寺材木知識記, 752년 초경)를 참조하면, 대불전 건축과 대불 주조 등에 직·간접으로 참여한 연인원은 당시 일본 전체 인구(500만명)의 약 반수에 달한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특히 이 무렵 비로자나대불의 금동불상을 위해 황금 900량을 시주한 사람은 백제인 백제왕경복(百濟王敬福·698∼766) 태수였다.(‘續日本紀’)
도쿄대 미술사학자 구로카와 마요리(黑川眞賴) 교수는 “불상을 주조하는 데 앞장선 백제인 조불사(造佛師) 국중공마려(國中公麻呂·생년미상∼774)는 백제왕실의 조신 덕솔 벼슬의 국골부(國骨富)의 손자였다”(‘工藝志料’, 1905)고 했다. 또 그 큰 불상을 모신 거대한 목조건물인 ‘대불전’ 전각을 처음 세운 건축가는 신라인 출신의 저명부백세(猪名部百世·이나베노 모모요·8세기)로 보인다. 일본 저명 출판사의 ‘인명사전’(三省堂, 1978)에는 “저명부백세가 대불 주조에 참여했으며, 조불사 국중공마려와 함께 767년 쇼토쿠천황이 도다이지로 납시어 그에게 벼슬 ‘외종오위하’를 몸소 내렸다”는 대목이 보인다. 구로카와 교수는 “저명부 가문은 신라인으로서 일본 역대의 명건축물을 세워 왔다”(‘工藝志料’ 1905)고 밝혔다. 이 점은 향후 연구 과제다. 또 도쿄대 사학과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 교수는 자기 저서(‘奈良朝史’ 早稻田大學出版部, 1907)에서 “그 당시 도다이지 건설 총책임자는 고구려인 출신의 조궁장관(造宮卿)인 고려복신(高麗福信·709∼789)이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도다이지 경내에 주목할 곳이 더 있다. ‘가라쿠니신사’(辛國神社)라는 신라사당이다. 모름지기 이곳은 심상대덕의 신주를 모신 곳으로 본다. 왜냐하면 세 성인의 사당 중 심상대덕의 사당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이마이 게이이치(今井啓一) 교수는 자신의 명저에서 “가라쿠니신사의 ‘신국’(辛國)은 ‘신라’를 가리키는 국가명이다”(‘귀화인 사사’, 1974)라고 했다. 심상대덕의 사당임을 감득(感得)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 역시 향후 연구과제이다.
도다이지 가람은 우리 조상의 옛 터전이다. 그러나 도다이지의 안내책자며 이 사찰 경내 어느 한 곳에도 고대 한국인들이 이 큰 가람을 세우고 세계 최대의 금동불상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사’에 도다이지의 역사를 수록하도록 우리 교육부와 국사 편찬 관계 인사들에게 권고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이 금동불상은 한국인들의 솜씨라는 것이 숨겨진 채 천하에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약 12세기 반이라는 장구한 세월 속에 수난도 많았다. 미나모토 도요무네(源豊宗) 교수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1179년 다이라노 시게히라(平重衡·1156∼1183)가 반란군 진압을 위해 도다이지를 불질렀을 때와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1510∼1577)가 병란을 일으켜 도다이지 대불전을 방화했을 때 불상이 부분적으로 손상됐으나 원형대로 수리 완성했다. 몸체의 하반부는 옛것 그대로다. 무릎에 얹은 좌측 팔 부분의 옷소매처럼 이 불상을 처음 제작했던 당시의 작풍인 사실적이며 빼어나게 아름다운 표현이 지금껏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미술견학’1944)
불상이 워낙 커서 그 얼굴 길이만 하더라도 약 5m, 손바닥 길이는 310㎝이다. 해마다 8월7일 거행되는 연중 행사가 장관이다. 이른바 ‘어신(御身)닦기’라는 대청소 행사다. 약 250명의 승려가 이른 아침부터 대불전 천장에 둥근 볏짚 의자를 새끼줄로 줄줄이 매달고, 거기 걸터앉아 부처님 얼굴을 닦고 귀를 닦고 입술을 닦아낸다. 어신닦기야말로 구경거리여서 해마다 8월7일은 여느 때보다도 관람객들이 붐빈다. 이 대청소를 지켜보면 얼마나 큰 부처님인가가 단박에 실감되니, 그 누구라도 감동받지 않을 수 없다.
◇곤슈지를 세우고 심상대덕을 초청했던 백제승 양변 큰스님의 목조상/◇행기 큰스님의 목조상.

(다음주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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