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띳싸니 <모자와 사람>(‘나비’에 수록, 소대명 옮김, 안녕)
어떤 소설은 인물의 행동 때문에, 특별하고 인상적인 공간 때문에, 자꾸만 떠오르는 대사 한 줄 때문에 오래 기억된다.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미얀마 작가 띳싸니의 ‘모자와 사람’의 경우, 개인적으로는 가장 후자에 속한다. 어느 날 나는 세수를 하려고 거울 앞에 섰는데 머리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양곤 시내로 나가서 머리가 다니곤 했던 영화관이나 도서관 등을 가봤지만 머리는 찾지 못했다. 지인들이 모이는 찻집에 가자 그들은 카프카와 실존주의, 래퍼의 음악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에게 “아침부터 사라진 제 머리를 찾아다니고 있어요”라고 말하자 이런 조언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정신과 의사에게 가봐야 할 것 같다, 사례를 할 테니 머리를 찾아달라는 기사를 잡지에 싣는 게 낫겠다, 인공 신체를 연결해주는 부서로 가야 한다, 등등. 고민하다가 나는 잡지사를 찾아갔다.
꼼꼼하고 지혜로워 보이는 편집자가 나에게 물었다. “당신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나요?”라고. 이어 편집자는 덧붙인다. “예를 들어 가방을 주우면 그 안에 돈, 값비싼 금속제품, 면허증, 주민등록증, 중요한 서류 등이 들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세 쪽 정도 분량밖에 안 되는 소설인데도 독자인 나는 여기까지 읽다가 잠시 그 아래 문장을 가렸다. 나라면 이 질문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주인공은 이렇게 대답한다. “제 머릿속에 든 것은 불순종, 미움, 표준에서 벗어남, 그리고 (소리를 낮춰서) 위대함, 그리고, 아 잘난 척하는 것도 들어 있는 것 같아요.”
흥미로운 인물은 정신과 의사도 마찬가지다. 그는 머리가 사라졌다는 나에게 신문을 들이밀고는 제목들을 읽어달라고 하고, 머리가 없는 나는 제목들을 정확하게 읽었다. 그러자 의사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한마디 한다. “머리가 달려 있구먼.” 그렇지 않다고 내가 부정하자 의사가 이번에는 소리는 다 들리냐고 묻는다. “자기 자랑하는 소리” 외에는 다 들린다고 솔직하게 대답하지만 의사에게 만족할 만한 답은 얻지 못하고 돌아섰다.
사실 이 단편은 여기까지가 거의 내용의 전부이다. 주인공이 머리를 찾을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궁금증은 일지 않는다. 대신 주인공이 머리를 찾으려고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사이 나는 계속해서 질문하게 된다.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은 무엇일까? 소설 수업 중에 이 단편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더니 누군가 즉각 대답을 했다. “월드컵이요.” 자못 진지했던 강의실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됐다. 우루과이 전을 앞둔 오후였다.
나는 노트에 써보기로 했다. 지금 내 머릿속에 든 것을 알지 못하면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될 것 같은 불안도 있고 무엇을 원하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후회, 무력감, 무지, 못 읽은 책들, 휴식, 마감을 앞둔 소설. 이렇게 키워드로 꿰어보니 대강 나는 다음과 같은 상태였다. 얼마 전 계간지에 넘긴 단편소설은 더 수정했어야 했는데 그걸 못 한 후회가 크고 그래서 무력감도 밀려왔으며 소설에 무지하다는 점을 다시 깨달았으니 밀린 책들을 읽으면서 쉬다가 마감을 앞둔 새 소설을 쓰고 싶다는. 이 ‘모자와 사람’의 주인공이 찾아간 잡지사 편집장은 정말 괜찮은 사람인가보다. 그가 던진 질문 하나가 독자인 나에게도 이렇게 영향을 끼치고 감정과 상태를 들여다보게 하다니.
머리를 잃어버린 주인공은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자 어머니가 나를 보고 태연히 말씀하신다. “너 하루 종일 어디 갔었니? 모자를 집에 두고 나갔더라.”
이제 독자는 천천히 모자를 쓰는 인물을 그려보게 된다. 환상소설의 특징을 평론가 츠베탄 토도로프는 “독자를 신비의 세계 속으로 미끄러뜨리는 힘”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머리가 사라져도, 몸이 벌레로 변해도 그것은 독자와 작가의 약속이므로 서로 놀라지 않는다. 그리고 독자는 작가가 펼쳐놓은 그 시각적이며 생생한 관념의 세계로 진입해 머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해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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