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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즈베’에 새겨진 러시아 침략 [박영순의 커피 언어]

입력 : 2022-07-23 19:00:00 수정 : 2022-07-22 18:4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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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열치열’에 걸맞은 커피를 고르라면, 단연 ‘제즈베’이다.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마시고 있는 방식으로, 오스만튀르크가 16세기 초 아라비아반도를 지배하면서 시작한 것이니 그 전통이 500년에 달한다. 덕분에 2013년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우크라이나 군인을 위한 제즈베. 여기에 에스프레소 더블샷을 추가해 마시며 병사들은 싸우고 있다. 바딤 그라노브스키 제공

제즈베는 숯을 의미하는데, 꺼진 재가 아니라 불이 이글이글하게 핀 잉걸불이다. 이 방식이 추운 지방이 아니라 뜨거운 사막의 베두인에게서 비롯된 것은 아이러니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커피음용문화를 잘 살펴보면 냉대에서 온대, 열대로 갈수록 커피 맛이 진해진다. 신맛이 줄어들고 쓴맛이 두드러진다.

날씨가 뜨거울수록 몸이 처지고 정신이 혼몽해지는 경우가 잦아지는데, 커피의 각성 및 에너지 부스터 효과가 이를 보완해주기 때문이다. 국가적으로 보면 스웨덴-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위에서 적도에 다가갈수록 커피가 진해지고 산미도 옅어진다. 같은 이탈리아라도 밀라노-제노바-피렌체-로마의 순으로 내려가면서 커피를 더욱 진하게 볶고, 나폴리까지 가면 카페인이 많이 들어 있는 로부스타 품종을 블렌딩해 마신다.

전통 제즈베는 아랫면이 넓고 위로 갈수록 좁다. 커피를 밀가루처럼 가늘게 갈아 수차례 끓여내는 과정에서, 이런 모양을 해야 커피가 끓어 넘치지 않고 거품이 내부 벽에서 안쪽으로 순환할 수 있다. 베두인들로서는 뜨거운 모래에 닿는 면이 넓을수록 커피를 끓이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런스’에서 베두인들이 사막을 건너는 장면을 보면, 왜 커피가 필요했는지를 알 수 있다. 오아시스의 간격이 긴 구간은 이글거리는 태양을 피해 밤에 이동해야 하는데, 이때 졸아 일행에서 떨어지면 목숨을 잃게 된다. 뒤늦게 잠에서 깨어나면 가는 길에 태양을 사막 한가운데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보기만 해도 숨 가쁜 사막에서 정신을 일깨우는 카페인은 찬물을 끼얹듯 몽롱함을 시원하게 씻어주었다.

시대가 바뀌어 요즘 제즈베 세계대회도 열려 특유의 향미를 묘사하고 즐기는 문화도 빠르게 형성되고 있다. 에스프레소나 드립 커피처럼 구체적인 속성을 시처럼 묘사하는 것과 다르게 단맛·신맛·쓴맛의 균형감과 촉감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를 평가해 우수함을 가린다. 여기에 카르다몸, 계피, 아니스, 정향을 넣어 이차적인 맛의 창작성을 겨루기도 한다. 바야흐로 제즈베 테이스팅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즈베의 본질은 커피의 약효를 농축시키는 데 있다. 이슬람 신비주의자인 수피교도들에게 커피가 벗이 될 수 있던 것은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요긴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커피는 입맛을 떨어뜨려 식욕을 억제해 주었고, 명상 중에 잠들지 않도록 수행자의 정신을 꽉 붙들어 주었다.

그 전승을 계승했다고 봐야 할 것인지, 우크라이나에서는 바딤 그라노브스키라는 43세의 카페 주인이 전선으로 떠난 단골손님의 요청을 받고 무료로 ‘세상에서 가장 센 커피’를 만들어 보내고 있다. 갈수록 강한 카페인을 요구하는 병사들이 늘면서 그는 제즈베에 에스프레소 더블샷을 섞은 신메뉴를 만들어 C레이션처럼 군인들에게 보내고 있다. 러시아의 이번 침략은 커피 문화사에 ‘우크라이나 군인을 위한 제즈베 퓨전 커피’로 새겨지게 됐다.


박영순 커피인문학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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