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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훈의 연극家 사람들] 작품성 있는 연극이 전해주는 기쁨과 고통

입력 : 2011-10-25 10:29:10 수정 : 2011-10-25 10:2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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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과 명동예술극장의 첫 공동작업, 연극 '벌'
고연옥·김광보 콤비의 2기 출범, 국립극단 '지하생활자들'

작품성 있는 연극 한 편을 보고 나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한줄로 정의 내리기 힘든 '울림'같은 게 느껴진다. 심오한 주제를 일부로 안기기보다 관객들 머리와 가슴을 부드럽게 '퉁' 쳐주는 그 느낌이 참 좋다. 그런데 분명 작품성 있는 연극임에도 온전히 감동을 느끼기 어렵게 작품을 만들어 놓은 경우를 몇몇 보게 된다. 관객의 보폭을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치게 앞서가는 연극이 바로 그 경우이다.

최근 명동예술극장과 국립극단 무대에 오른 2편의 연극, 배삼식 작 김동현 연출의 연극 '벌'과 고연옥 작 김광보 연출의 연극 '지하 생활자들'은 가히 마음편한 연극은 아니었다. 분명 안 봤으면 후회할만한 연극이다. 그럼에도 약간의 고통은 뒤따랐다. 불연속적인 내러티브의 끈을 잡고 싶어하는 한국 관객 특유의 기질이 발휘되어 머리를 굴리면서 극을 감상해야 했기 때문이다. 에너지 넘치는 배우들에게 1차적으로 기가 뺏긴데다, 불친절한 작품해독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극을 보고 나면 다소의 피로감이 몰려온다.
 

명동예술극장 연극 '벌'
■ [리뷰] 연극 벌

연극 [벌]은 상처 주고 상처 받은 모든 생명의 치유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이 무너뜨린 자연 속에서 전염병(낭충봉아부패병)에 걸린 벌의 아픔과 저마다 통증을 느끼는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며 극은 진행된다.

관객과 무대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을 뚫고 나온 내레이터(이봉련 서미영)의 ‘벌’에 관한 정보를 전하며 극은 코믹한 템포로 운을 뗐다. 암에 걸린 여자의 몸 위로, 길 잃은 벌들이 내려 앉으면서 극은 환상과 현실을 오고간다. 현실에서 환상으로 넘어온 막간극에서 ‘벌’에 대한 이야기는 무용이 가미된 움직임으로 무대에 불러냈다.

그 결과 무대엔 현실적인 키스 장면과 벌들이 꿀을 모으는 환상적인 장면이 동시에 그려졌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객석의 반응은 엇갈리기 시작됐다. 현실의 이야기에 살을 보태는 장치로 볼 수 있는 환상적 벌 군무를 이해하지 못한 관객들은 갑작스런 남녀의 사랑행위에 당황했기 때문이다.

사실, 전체적인 연극의 색채는 ‘생명과 소멸’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 본질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배삼식 작가의 전작 ‘히얀앵두’의 분위기도 언뜻 묻어나오지만 그만큼의 감동은 없다. 왜? 전작의 다양한 캐릭터들이 극 속에 필요한 이유가 분명했다면, 이번엔 각 인물들의 존재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주제 역시 하나로 쉽게 모아지지 않는다.

‘하얀앵두’의 주요한 소품이 ‘삽엽충 화석’이라면 ‘벌의 주요 소품은 화석의 일종인 ’호박‘이다. 삼엽충 화석이 권오평-하영란-곽지복 손으로 순환하며 돌아가는 구조로 이야기를 전개해 소멸과 탄생의 순환을 관객들이 바로 알아차릴 수 있게 했다면, ’벌‘에 등장하는 ’호박‘은 급하게 메시지를 주입시키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호박 속에 꿀벌이, 꿀벌의 몸에 묻은 수천만년 전의 꽃가루도 함께 결정을 이룰 확률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입니다”라는 설명과 후반 대사를 통해 우주적 질서와 실존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 감지된다. 다만 자연스럽게 가슴을 치지 않고 정해진 틀 안에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는 점은 아쉽다.

하늘에서 수십개의 꿀이 내려오고 ‘호박’ 보석이 내려오는 장면이 아름답게 연출됐다. “커다란 꿀밤나무 밑에서... ”라는 다정한 동요를 삽입 해 ‘온가희’의 죽음과 ‘김대안’의 슬픔을 더욱 배가시킨 김동현 연출의 위트가 돋보였지만 전체 관객들에게 그 울림이 전해지지 못한 점이 두고 두고 마음에 걸린다. 배삼식 작가와 김동현 연출의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은 예전 그대로이지만 각 캐릭터와 사건에 생명을 더 불어넣어야 관객과의 소통에 성공할 수 있을 듯 보인다. 30일까지 명동예술극장.

국립극단 연극 '지하생활자들'

■ [리뷰] 연극 지하생활자들

지금까지 고연옥·김광보 콤비의 작품이 어떤 면에서 닫혀있고, 일방향적이었다면, ‘지하생활자들’은 2기 출범 선언 첫 작품이자 열린 연극이다. 김광보 연출 특유의 ‘연극적 환상구축’에서 힘을 빼겠다는 것이다. 물론 고연옥 작가가 구축한 내러티브는 이번에도 결코 만만치 않다.

연극 ‘지하생활자들’의 모티브는 ‘뱀 신랑 설화’다. 설화는 뱀신랑을 찾아 지하세계로 찾아간 여인이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린 뱀신랑을 지상으로 데려오기 위해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결국에는 함께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연극은 설화를 바탕으로 하되 구체적 내용은 다르게 전개된다. 
 
작품은 100% 열린 연극이기 보다는 50% 열린 연극이었다. 프로시니엄이 아닌 열린 공간에서 무대가 펼쳐지고 이 곳이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표지판으로 막을 구분해 개별적 막이 연결되는 형태로 진행된다. 배우들의 추임새도 곁들여지지만, 관객들은 극에 절대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머지 50%는 관객과의 소통의 몫으로 남겨놨다. 여기서 관객들의 평이 엇갈렸다. 점핑이 강한 연극 속에서 갈 길을 못 찾은 관객들의 평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상승한다면, 누군가 하락할 수밖에 없는 세상. 작가 고연옥은 상승을 지향하는 이 세상의 밑바닥에서 남들의 상승을 지탱해주는 ‘지하생활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다소 불친절하던 연극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인 ‘도둑’이 등장하면서 보다 몰입도를 높혔다.

그저 먼 발치서 배우들을 구경하게 만든가 싶더니 어느 순간 연극적 정황으로 관객을 끌어들였다. 특히, 뱀비늘 남자를 찾아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던 여자가 엘리베이터를 잘못타서 아래로 미끄러지는 ‘빌딩’ 장면부터 관객들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쾌지나 칭칭나네’의 가락이 바로 떠오를 수 있는 ‘높히 올라도 추락해’의 가사로 메시지에 점점 접근해나갔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워’ ‘인간은 어디에 있어도 똑같아. 변하지 않아’와 같은 대사로 인간의 속성에 대해 압축적으로 전달했다.

'지하생활자들'은 배우들의 승리다. 특히, 뱀비늘 남자 역의 배우 조정근이 보여주는 미세한 표정변화가 일품이다. 어느 순간 지독한 악한의 얼굴을 비추는가 싶더니, 너무도 착해보이고 불쌍해보이는 눈망울로 관객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의 가장 밑바닥 인생들의 색채 그대로였다. 지금까지 김광보 연출이 배우에게 강렬하게 심어놓은 서브 텍스트를 체화해 단단하게 굳어진 캐릭터와는 달랐다. 자연스럽게 관객들이 캐치해나갈 수 있게 캐릭터를 구축해 보다 우호적인 눈빛을 갖게 했기 때문이다.

남동생, 소년역에 이어 어린 창녀의 애인 역할을 한 배우 이철희의 연기도 관객들의 눈길을 시종일관 사로잡았다. 백치미와 쉽게 무너지는 신념을 TV개그콘서트의 ‘애정남’ 최효종이 떠오를만큼 희화적으로 표현해내며 뱀비늘 남자의 어린시절을 유추할 수 있게 했다.

고연옥 작가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인 여인(박지성)에 대해서도 까칠한 눈길을 숨기지 않았다. 즉 ‘아무것도 모르는 여인’이지만 누군가에는 치명적인 존재로 작용할 수 있음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연옥·김광보 콤비의 2기 출범의 첫 맛은 보다 ‘인간적’이었고 ‘연극적’었다. 다만, 보다 강렬한 이미지와 환상에 한 표를 던지는 관객이라면 입맛에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 30일까지 국립극장 소극장 판.

공연칼럼니스트 정다훈(otrcoolp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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