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문을 나설때 떠오른 한 단어는 팬픽이었다. 제인 오스틴의 팬들이 만들어낸 그의 인생과 사랑에 관한 픽션 ‘비커밍 제인’. 영국 로맨스소설의 대가인 제인 오스틴은 스무 살 때 만난 첫사랑과 어긋난 후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마흔한 살에 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의 개인사에 대해선 대체로 남아 있는 기록들이 없는 편이다.
‘오만과 편견’ ‘센스 앤 센서빌리티’ ‘설득’ 등 그의 소설 속 여자들은 언제나 현실과 이상, 돈과 사랑, 조건과 열정 사이에서 갈등하고 성숙해지며, 마침내 행복을 얻는다.
딸에게 부잣집 혼처를 강요하는 생활력 강한(?) 모친과 반대로 지극히 평면적이며 색깔없는 아버지, 딸과 어머니 사이의 충돌과 다툼까지… 매번 다르게 변주될 뿐, 오스틴의 소설들을 관통하는 이야기의 원형은 언제나 한 가지. 즉, 현실과 사랑 사이에서 선택을 내려야 하는 여자들의 고민이다. 18세기에 쓰여진 오스틴의 소설들이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사랑 받고 있는 건 여자들의 고민이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다. 시공을 초월해 폭넓은 팬을 거느린 작가 제인 오스틴. 영화 ‘비커밍 제인’은 연애소설의 마스터인 그 자신의 사랑 이야기는 어떠했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시작되었다.
영화 속 제인 오스틴은 시골마을 가난한 성직자의 딸이다. 꽉 찬 나이가 됐지만, 부잣집 마나님이 되기보단 글쟁이가 되고픈 발랄한 아가씨. 귀족 가문의 위즐리를 제쳐두고 런던에서 온 법학도 톰 리프로이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어머니로부터 안락한 삶이 보장된 위즐리와의 결혼을 종용받는 제인. 이제, 그의 소설 속 여자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제인도 조건과 사랑 앞에서 깊은 고민에 빠진다.
젊은 법학도 톰 리프로이는 ‘오만과 편견’의 미스터 다시 같은 느낌이고, 제인은 리디아의 캐릭터와 여러모로 비슷하다. 감독 스스로 제인 오스틴의 팬이라고 밝혔다고는 하지만, 제인 오스틴이 스스로 창조해낸 소설 속 주인공들과 닮은꼴의 사랑을 하고 닮은 꼴의 인생을 살았다는 내용은 다소 뻔하다. ‘비커밍 제인’이 왜 ‘비커밍 제인 오스틴’이 될 수 없는지 그 한계가 분명해 보인다. 그의 소설 속 캐릭터들을 짜깁기해놓은 것에 불과한 영화 한 편을 오스틴의 인생과 사랑이라 비약하기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사한 브리티시 악센트와 예쁜 영국식 정원, 앤 해서웨이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여성에게 유머는 많을수록 좋지만 재치는 안 된다. 그것은 가장 위험한 재능일 수도 있다.” 영화 속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 누구보다도 더 위험한 재능을 지녔던 한 여자를 만나기 위해 주말엔 서점에 들러 보면 어떨까? 그의 위험한 재능과 사랑에 빠지기엔 두 시간으론 부족하니까.
김정아 /이노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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