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하나님을 지운 공산주의-이상헌의 사상적 여정과 인간해방의 길] ⑤마르크스가 찿던 인간

관련이슈 참사랑 , 한민족 대서사시

입력 :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hulk19838@segye.com

인쇄 메일 url 공유 - +

구글 선호 매체 등록

인간소외의 뿌리와 인간다움의 근원을 탐구하다

 

인간을 해방하겠다던 사상은 왜 인간의 양심을 억압하는 권력이 됐을까. 그 모순을 이해하려면 마르크스가 처음 던진 질문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역시 고통받는 인간을 구하려 했다. 이상헌은 공산주의의 대안을 세우려면 그 출발점과 잘못된 해법을 함께 짚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주목한 것은 마르크스의 인간소외론(人間疏外論)이었다.

 

카를 마르크스(1818~1883)는 독일 서부 라인란트의 트리어에서 유대계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당시 유대인에게 가해진 직업상의 제약 속에서 개신교로 개종했고, 마르크스도 여섯 살 때 루터교 세례를 받았다. 청소년기에는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주제로 글을 쓸 만큼 기독교 교육을 깊이 받았지만, 본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하면서 헤겔 철학과 청년헤겔학파의 영향을 받아 점차 종교 비판과 유물론으로 기울었다.

 

마르크스는 처음부터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철학과 언론 활동을 거치며 산업자본주의 아래 노동자들이 겪는 빈곤과 소외에 주목했고,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현실의 원인을 사회구조에서 찾기 시작했다. 그는 세계와 역사가 모순과 대립을 통해 발전한다고 본 독일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1770~1831)의 변증법에 영향을 받았고, 신을 인간 본질의 투영으로 해석한 루트비히 포이어바흐(1804~1872)의 유물론을 받아들였다. 여기에 영국의 정치경제학과 프랑스 사회주의를 결합해 자신의 독창적인 공산주의 이론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 출발점에는 자본주의가 빼앗아간 인간다운 삶을 되찾으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독일 출신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카를 마르크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노동과 생산물, 인간관계와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현상을 ‘인간소외’로 설명했다. 존 메이올 촬영·위키미디어 공용
독일 출신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카를 마르크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노동과 생산물, 인간관계와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현상을 ‘인간소외’로 설명했다. 존 메이올 촬영·위키미디어 공용

마르크스는 인간을 파괴하려고 공산주의 사상을 세운 것일까. 이상헌은 마르크스에게 그런 의도가 있었다고 보지 않았다. 마르크스 역시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상헌은 인간이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문제의식만큼은 타당하다고 보았다. 마르크스가 찾으려 했던 것도 잃어버린 인간이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의 오류를 정확하게 비판하려면 마르크스가 인간을 어떻게 이해했고, 인간이 무엇을 잃었다고 보았는지부터 살펴야 했다.

 

소외된 노동자에게서 발견한 인간

 

마르크스가 살았던 19세기의 유럽은 산업혁명의 빛과 그늘이 극명하게 엇갈리던 시대였다. 공장은 쉴 새 없이 상품을 쏟아냈고, 자본가는 부를 축적했지만, 노동자는 장시간 노동과 낮은 임금에 시달렸다. 어린아이와 여성도 생계를 위해 공장으로 내몰렸다. 인간의 노동이 더 많은 부를 생산하는데도 정작 노동자의 삶은 궁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모순을 짚었다.

 

마르크스는 이 현실에서 빈곤 이상의 문제를 들여다보았다.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생산물을 소유하지 못할 뿐 아니라, 노동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 나아가 노동자가 생산한 물건과 부가 오히려 자신을 지배하는 낯선 힘으로 돌아왔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상태를 ‘소외’라고 불렀다.

 

소외란 본래 자신에게 속한 것이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와 낯선 것이 되는 상태를 뜻한다. 노동자가 만든 상품은 그의 손을 떠나 자본가의 소유가 된다. 노동 역시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일이 되고, 함께 일하는 사람은 경쟁자가 된다. 마침내 인간은 자기 뜻대로 살아가지 못한 채, 자기 삶의 주인이라는 느낌마저 잃게 된다.

 

마르크스에게 노동은 먹고살기 위한 수단에 머물지 않았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연을 변화시키고 자신이 생각한 것을 현실에 구현한다. 무엇을 만들 것인지 미리 구상하고, 다른 사람과 협력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노동은 동물의 활동과 다르다고 보았다. 그런 노동이 자본주의에서는 인간을 구속하는 일이 됐다. 노동자는 무엇을 만들고, 왜 만드는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자신이 만든 생산물도 소유하지 못한다. 노동의 목적은 인간의 필요와 행복이 아니라 자본의 증식에 놓이게 됐으며, 노동과 상품 그리고 돈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가 되찾으려 한 본래의 인간은 자유롭게 노동하고 다른 사람과 협력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실현하는 존재였다. 그는 인간을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로 보았다. 개인의 자유와 행복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서로 경쟁하고 빼앗는 관계에서 벗어나 공동체를 위해 일할 때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인간소외의 뿌리를 달리 보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은 기독교가 제기해온 질문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종교도 인간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인간이 타락으로 하나님과 멀어졌으며, 잃어버린 본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마르크스도 인간이 소외됐으며 본래의 인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지금 모습이 온전하지 않다는 진단에서는 서로 만나는 지점이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기독교는 본래 모습을 잃어버린 원인을 설명하는 데서 갈라졌다. 이상헌이 이해한 기독교는 그 원인을 인간의 타락, 곧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서 찾았다. 반면 마르크스는 사유재산제도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찾았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사고, 그 노동으로 만들어진 생산물을 소유함으로써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과 생산물에서 소외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폐지함으로써 노동자가 노동의 주도권과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상헌은 마르크스가 인간소외의 현실을 예리하게 발견했다는 점은 인정했다.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상품에 지배당하고 인간관계가 돈과 이해관계로 바뀌었다는 비판도 가볍게 보지 않았다. 인간이 본래 모습을 잃어버렸으며 그것을 되찾아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문제 제기에는 인간을 구하려는 진지한 고뇌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상헌은 여기서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인간이 본래 모습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려면 먼저 본래의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밝혀야 한다. 무엇이 온전한 인간이고, 무엇이 소외된 인간인지를 판단할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 기준 없이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길을 나서는 것과 같았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이자 노동하는 사회적 존재로 이해했다. 애당초 인간의 본질을 초월적 창조주에게서 찾지 않은 것이다. 바로 여기에 마르크스 인간론의 한계가 있었다. 이상헌이 보기에 인간의 본질을 물질적·사회적 관계 안에서만 찾는다면, 인간이 마땅히 도달해야 할 본래 모습과 가치의 절대적 기준을 세우기 어려웠다. 사회관계가 달라질 때마다 인간의 본질은 물론, 선악의 기준도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본래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

 

이상헌에게 인간의 본래 모습은 인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창조된 존재의 목적은 창조주의 뜻과 분리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된 존재라면, 본래 인간의 기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아야 했다. 인간소외도 단지 노동과 생산물에서 멀어진 상태가 아니라, 사랑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은 상태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인간소외를 발견한 마르크스와 그 소외의 더 깊은 뿌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으려 한 이상헌의 길은 바로 이 지점에서 갈라졌다.


오피니언

포토

'순백의 여신'된 김지원
  • '순백의 여신'된 김지원
  • 리센느 원이 '매력적인 미소'
  • 신민아 '황후의 미소'
  • 한선화 ‘여신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