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랫방망이로 야구하던 소년
라이벌 김응용과 한때 한솥밥
1963년 日 꺾고 함께 亞 정상
37세까지 현역 뛴 왼손 타자
KBO 원년 유일한 생존 감독
실업 롯데 지휘하며 출범 주도
靑서 ‘시선 돌리기용’ 들었지만
프로 연고팀 애향심 키워 뿌듯
레전드 최동원 먼저 알아봐
초교 은사의 손자·경남고 후배
롯데 감독 때 구단 설득 崔 영입
이건희에 ‘삼성 우승의 벽’ 꼽아
타격지도 전문가 된 타격왕
日서 타격 기술·훈련법 배워 와
삼성 맡아 첫 ‘팀 타율 3할’ 달성
지금도 타자 스윙 먼저 살펴봐
1982년 한국 프로야구의 첫 문을 함께 열었던 여섯 감독 가운데 이제 단 한 사람만 생존해 있다. 바로 박영길 전 감독이다. 삼성 서영무, 해태 김동엽, 삼미 박현식, OB 김영덕 감독에 이어 지난 8월 MBC 백인천 전 감독마저 세상을 떠났다.
지난 1일 경기 수원시의 한 요양시설에 머물고 있는 박영길 전 감독은 먼저 간 이들을 헤아렸다. 프로야구 원년 감독 중 혼자 남은 심정을 묻자 “기분이 좀 이상해요”라고 했다. “미안하네”라는 말도 나왔다. 마지막 원년 감독의 회고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는 10여년 전 받았던 직장암 수술의 후유증과 노환이 겹쳐 몸을 돌보기 위해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 몸은 예전 같지 않아도 야구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빨랫방망이로 고무공을 치던 부산 소년의 기억에서 프로야구 창설을 논의하던 자리까지, 한 사람의 삶을 따라가면 한국 야구가 걸어온 길이 펼쳐졌다.
◆빨랫방망이로 야구하던 소년
부산에서는 야구는 동네 놀이였다. 일본이 가까워서 그랬는지 야구의 영향이 다른 지역보다 강했다. 빨랫방망이로 고무공을 때리며 야구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자연스럽게 부산 충무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생기면서 소년의 삶에 들어왔다. 당시 교장이 전설의 투수 최동원의 할아버지 최성원이었다. 반 대항전을 시켜서 잘하는 아이들이 선수로 뽑혔다. “난 투수도 하고 4번 타자도 했지”라고 박 전 감독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수십년 뒤 그 아이는 감독이 돼 은사의 손자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뛰어다닌다. 최동원과의 인연은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도 전에 시작된 셈이다.
◆김응용과 라이벌… 실업야구 시절
경남고를 졸업한 뒤 곧장 야구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공부도 잘했던 그는 서울대에 지원했다 낙방한 일을 털어놓았다. 실업 최강 농업은행의 입단 테스트에서도 떨어졌다. 훗날 한국 야구를 대표할 왼손 타자의 출발선에는 두 번의 낙방이 있었다.
그때 함께 농업은행 문턱을 넘지 못한 청년이 김응용이었다. 경남고 박영길과 부산상고 김응용은 남선전기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이후 각자의 팀으로 흩어졌지만 대표팀에서는 나란히 중심타선을 지켰다. ‘좌영길·우응용.’ 실업야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두 이름이다. 1963년 아시아선수권에서 일본을 꺾고 정상에 오를 때도 함께였다. 경쟁하며 자란 부산의 두 타자가 한국 타선의 기둥이 됐다.
프로야구 감독이 된 뒤에 생긴 김응용과의 추억에는 야구가 고장의 자랑이 되던 풍경도 남아 있다. 박 전 감독은 서울역 부근에서 김응용 전 감독이 운전하는 차를 탔다가 신호위반에 적발됐던 일화를 들려줬다. 김응용을 알아본 경찰이 “우리 감독님”이라고 부르며 경례했다는 것이다. 그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리’라는 말이었다. “아마 광주 출신 경찰이었던가 봐”라며 웃는다. 해태의 승리를 자기 일처럼 여기는 팬의 마음, 야구가 일상의 위안이 된 시대가 됐다고 그때 느꼈다고 말한다.
◆가네다 장훈 백인천… 일본연수에서 배운 것
실업야구 통산 타격왕 6회, 타점왕 3회, 최우수선수(MVP) 4회 수상 등 최고의 선수로 활약했던 박 전 감독은 철저한 체력 관리로 당시로써는 드물게 37세까지 현역으로 활약했다.
은퇴 후에도 배우는 일에는 자존심을 세우지 않았다. 일본으로 연수를 가 타격 기술과 훈련법뿐 아니라 프로구단의 운영 방식까지 눈여겨봤다. 그 시절 이야기에 400승을 거둔 일본프로야구 전설의 투수인 재일동포 가네다 마사이치(한국명 김경홍)를 필두로 장훈과 백인천이 등장했다. 일본 롯데 감독이기도 했던 가네다 감독은 자신이 재일동포이기에 장훈과 백인천을 무척 아꼈다고 박 전 감독은 기억한다. “차별을 많이 당했기에 가네다 감독도 장훈도 독하고 강해질 수밖에 없었지”라고 떠올린다. 박 전 감독은 “장훈은 후배 백인천의 버팀목이었어. 일본 선수들에게 밀리지 않고 후배를 감쌌지”라고 덧붙였다. 박 전 감독의 기억 속에는 화상으로 불편한 오른손으로도 방망이를 휘두르던 장훈의 모습이 선하다. “장훈이도 진짜 한국 사람이야.” 그의 회고에는 낯선 땅에서 버텨낸 야구인들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다.
일본에서 배운 것은 방망이를 움직이는 방법만이 아니었다. 가네다에게서는 승부에 임하는 정신을, 타격 지도자들에게서는 연습과 생각을 연결하는 법을 익혔다. 그는 이번 인터뷰에서도 장훈의 오른손이 어떤 모양으로 방망이를 쥐는지 설명했다. 화상을 입은 손으로도 타격해낸 선수의 몸을 오래 기억하는 것, 그것 역시 평생 타격을 연구한 사람다운 회고였다.
백인천은 훗날 원년 그라운드에서 상대 감독 겸 타자로 다시 만났다. 일본에서 쌓은 기술과 수읽기로 마흔의 나이에 타율 0.412를 기록한 타자였다. 박 전 감독은 “야구에 미친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백인천을 기억했다. 나이를 이겨낸 것은 몸 관리와 타격의 요령, 승부를 향한 집념이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프로야구 출범에 앞장서다
일본에서 보고 배운 경험은 새로운 리그를 만드는 데도 쓰였다. 실업 롯데를 이끌던 그는 프로야구 출범 논의에 참여했고, 창립 과정에서는 롯데 측 대의원으로 나섰다. 경영자들 사이에서 야구 현장을 설명하는 역할이었다. 선수는 어떻게 모으고 연봉은 어떻게 주며 훈련은 어떻게 하는지, 먼저 경험한 프로야구의 틀을 전했다.
그의 설명은 구체적이었다. 가까운 일본에 본보기가 있으니 야구는 준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기업을 설득하고 팀을 만드는 실무는 이용일과 이호헌 같은 야구 행정가들이 맡아야 한다고 건의했다는 것이 그의 기억이다. 감독 한 사람이 선수만 가르치던 시절을 넘어, 구단과 리그의 살림까지 고민해야 했던 때였다.
그는 출범의 정치적 배경도 숨기지 않았다. 청와대에 불려갔을 때 사회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회고했다. “전두환 정권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잖아. 사람들이 모이면 정권 욕만 할 때지. 그러니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어. 그중의 하나가 낮에는 축구, 밤에는 야구였지.”
군사정권의 의도와 야구인들의 오랜 염원이 만난 자리였다. 부산과 대구, 광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 경쟁은 흥행의 바탕이 됐다. 그의 기억 속 프로야구는 권력의 계산으로 출발했지만, 사람들은 그 안에서 자기 고장의 자부심을 찾았다.
◆잊을 수 없는 이름 최동원
1982년 롯데 초대 감독이 된 박 전 감독에게 가장 깊게 남은 이름은 최동원이다. 프로야구 태동 직전인 1981년 실업팀 롯데 감독이었던 그는 최동원 영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과정에서 구단을 설득하기 위해 가네다를 다시 찾아갔다고 했다. “당시 돈으로 2000만원이 넘는 계약금을 주기로 했는데 그룹 고위층이 허락을 안 해줬지. 그래서 가네다 감독에게 일본에서도 통할 투수라는 평가서를 받아왔어. 보증을 선거지. 허허….”
이렇게 은사의 손자이자 경남고 후배인 최동원은 그에게 반드시 데려오고 싶은 선수였다. 이렇게 당시는 현장에서 알아본 재능의 가치를 구단의 결정권자에게 납득시키는 것까지 감독의 몫이었다.
그러나 데려오는 일보다 지키는 일이 어려웠다. 박 전 감독의 기억으로는 최동원의 어깨 상태를 고려해 기다려야 했고, 밖에서는 왜 비싼 선수를 쓰지 않느냐는 불만이 쏟아졌다. 그는 최동원의 부친과 나눈 이야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한 5, 6년 이상 쓸 놈인데 2, 3개월 참아야지.” 당장의 성적과 선수의 앞날 사이에서 버티던 감독은 결국 1983년 시즌 도중 롯데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이듬해 그는 삼성 타격코치로 최동원을 상대했다. 당시 김영덕 삼성 감독은 한국시리즈 상대로 OB가 아닌 롯데를 고르기 위해 ‘져주기’에 나섰다. 박 전 감독은 롯데를 택해서는 안 된다고 김영덕 감독에게 만류했다는 것이 그의 회고다. 바로 최동원 때문이다. 결과는 최동원 혼자 4승을 거둔 롯데의 우승이었다.
◆팀타율 3할 만든 타격 지도자
지금은 감독하다가 다른 팀의 코치로 가는 일이 이상하지 않지만 프로야구 초창기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박 전 감독은 롯데 감독에서 물러난 뒤 삼성의 타격코치로 가게 된다. “대신 조건을 걸었지. 타격 지도만큼은 맡겨 달라는 것이었어. 타순은 감독의 권한이지만 타자의 상태와 훈련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뜻이었지.”
이는 1987년 삼성 감독이 되고 나서 사상 첫 팀 타율 3할이라는 진기록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오랜 친구 김응용이 이끄는 해태에 막혔다. 실업야구의 두 강타자는 프로야구 정상으로 가는 길에서 다시 상대편에 서 있었다.
삼성 시절을 돌아보면서는 이건희와 나눴다는 대화도 꺼냈다. 왜 우승이 어려운지를 설명하며 부산의 최동원, 광주의 선동열을 들었다고 했다. 좀처럼 나오기 어려운 투수들이 다른 팀에 버티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타선을 강하게 만드는 자신의 일과, 그래도 쉽게 넘을 수 없는 상대의 재능을 함께 인정하는 말이었다. 그의 기억에서 두 투수는 삼성의 벽이자 프로야구를 뜨겁게 만든 주인공이었다.
◆후배들아 죽을 듯이 노력하라
1991년 태평양 감독을 끝으로 현장 지휘봉을 놓은 뒤에도 해설과 글로 야구를 이야기했다. 지금도 경기를 보면 타자의 스윙부터 눈에 들어온다. 재능만큼 연습을 믿는 마음은 여전하다. 집에서 방망이를 휘두르고, 누워서도 상대 투수의 공을 치는 장면을 그려보라는 주문이 이어졌다. “지금은 그라운드에 돈이 깔려 있는 시대야. 그걸 다 주워 갈 수 있는데 왜 노력을 안 할까 몰라”라며 일부 젊은 선수들이 나태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가네다, 장훈, 백인천이 왜 야구를 잘했겠어. 배가 고파서야. 당시는 정말 배가 고파서 살아남아야 먹을 수 있기에 최선을 다했지. 요즘 선수들은 정신력이 고파야 해. 자신이 노력하면 가져갈 수 있는 부와 명예가 얼마나 많은데….”
박영길 전 프로야구 감독은…
●1940년 부산 출생 ●경남고·동아대 졸업 ●실업야구 남선전기 육군경리단 한국전력 ●프로야구 롯데(1982∼1983) 삼성(1987∼1989) 태평양(1991∼1992) 감독 ●KBO 상벌위원(2003∼2004) ●한국실업야구연맹회장(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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